농촌 지역의 어느 행사장에서 농민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5년 전 즈음입니다. 그동안에 농민은 더 늙었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3년 현재 농민 중 60세 이상이 70%에 육박합니다. 70세 이상이 36.7%, 60대가 30.6%입니다. ‘늙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농촌에는 이미 와 있습니다.
“서울 사람들이 싫어하잖아요. 차 막힌다고….”
농민이 늙어서 이제는 서울에 못 간다는 말보다 이 말에 저는 가슴이 더 아렸습니다. 농민의 사정에 공감하지 않는 서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는 뜻일 것입니다.
윤봉길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 상해로 가기 전에 충남 예산에서 농민운동을 했습니다. 그는 <농민독본>이라는 책을 써서 이웃을 가르쳤습니다. <농민독본>의 ‘농민’ 편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입니다. 과거 4000여 년 동안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느 때에 비록 하루라도 농업을 아니 하고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역사의 첫머리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혀 농민의 나라인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태정태세문단세’의 왕조 역사였습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의 왕들이 무슨 일들을 했는지 외우는 것이 역사 공부의 9할이었습니다. 그들 왕이 한반도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배웠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역사관은 달랐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라고 농민에게 가르쳤습니다.
산업화 이전 대한민국은 인구 분포상 농민의 나라인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1950년대 대한민국 인구의 80%가 농민이었습니다. 1970년대까지 선거 유세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저는 가난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산업화는 농민을 도시로 밀어내어 노동자로 만들었습니다. 산업화 초기에는 도시에서 돈벌이를 하는 노동자여도 자신이 농민의 자식이라는 인식은 하고 살았습니다. 어버이와 삼촌, 이모, 고모, 사촌 등등 피붙이가 농촌에 살았고, 명절에 고향 농촌을 찾아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처음 목격한 농민 상경 시위는 1988년 ‘고추 투쟁’이었습니다. 고추 가격이 폭락하자 농민들이 고추를 트럭에 싣고 와서 민정당사 앞에 내려놓고 시위를 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면서 우루과이 라운드 사태로 농민이 서울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서울 시민들도 농민 시위에 합세를 하거나 곁에서 응원을 하였습니다. 농민의 일이 곧 자신의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때만 해도 대한민국은 농민이거나 농민의 자식으로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2024년 현재 대한민국 국민 중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4%입니다. 도시의 노동자는 이제 농민의 자식이 아니라 노동자의 자식입니다. 노동자의 자식에게 농민의 사정은 먼먼 남의 일입니다. 농민이 서울에서 시위를 하면 농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려는 생각보다 당장에 여러 불편만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다 눈치가 있습니다. 늙은 농민은 더 이상 서울에 올라오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윤봉길 의사가 농민운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농민을 잘살게 하려면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일제 착취를 종식시키는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일 수 있다고 저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먹을거리 생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농민독본>에 이런 구절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입니다.”
늙은 농민의 나라에서 우리는 먹고 살아야 합니다. 농민의 사정은 우리 먹을거리의 사정입니다. 노동자의 손자, 아니 증손자 현손자이어도 좋은 먹을거리를 확보하려면 농민의 사정을 살펴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늙은 농민은 쌀값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