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별 일과 별의별 사건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그나마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말 그대로 별의별 영화를 보는 것이며 별의별 책을 찾아 읽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동시에 해줄 수 있는 영화가 바로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영화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이다.
대중에게 움베르토 에코(1932~2016)는 소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프라하의 묘지’ 등으로 유명한 작가지만 사실 그는 엄청난 학문적 깊이를 지닌 철학자, 미학자, 역사학자, 기호학자, 언어학자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심지어 피리를 부는 사람이기도 하다. 에코는 한 마디로 잡학의 대식가이며 세기의 현자다.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은 표면상 그가 생전에 지니고 있었던 1500권의 희귀서 그리고 5만권의 장서를 보여 주면서 에코의 개인 도서관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 책들은 현재 유족들의 뜻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에 기증됐으며 볼로냐 대학 도서관과 밀라노 브라이덴제 국립도서관에 분산 수용됐다. 그러나 좀 더 나아가 보면 이 영화는 에코의 장서와 개인 도서관의 모습을 넘어 그가 지녔던 다양한 사상, 그가 지닌 무궁무진한 인문학적 상상의 기초와 뿌리가 어디서 나왔는 가를 추적하는 작품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천착했던 저술가는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이다. 17세기에 살았던 예수회 신부이며 엄청난 학식을 지녔던 인물로 보인다. 아마도 이 키르허야말로 에코의 책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윌리엄이 된 것으로 보인다. 키르허처럼 에코도 온갖 지식에 접근한 인물인데 해부학과 인체에 대한 관심은 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서와 희귀서가 모아져 있는 에코의 개인 서가에는 개의 고환이 알코올에 담겨 보관돼 있을 정도다. 찰리 브라운 인형이 다수 전시돼 있기도 하다.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은 지금과 같은 혼란의 시기에 우리가 지녀야 할 지식과 지성의 가치, 그 방향에 대해 얘기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하다. 예컨대 영화는 살아 생전의 에코가 했던 강연, 인터뷰의 푸티지들을 통해 이런 말들을 전해주고 있다. 에코는 “역사학자들은 유령에 지나지 않는 인물을 환기시키지만 소설가는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을 창조한다”며 픽션과 거짓말의 차이에 대해 얘기한다. “픽션은 믿음에서 출발하는 게임이지만 거짓말은 반대로 진실과 반대되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만들기를 원하는 의도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른바 음모 이론의 기초다. 에코는 이런 생각을 통해 가짜와 거짓이 어떻게 지금까지 역사에 영향을 미쳐 왔으며 중세에 수많은 허위문서가 때론 어떤 역사의 흐름을 만들었는지를 갈파한다.
정보와 하이퍼 미디어의 허상에 대해서도 그는 예리한 비평을 한다. 에코는 “인터넷은 모든 것을 기록하는 백과사전이지만 정보를 필터링할 수 있는 도구는 제공하지 않는다”며 “예전의 도전이 가능한 한 많은 백과사전을 소유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도전은 가능한 한 많은 백과사전을 없애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세 권 정도의 책을 읽을 수는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제공된 백권 목록의 책을 다 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걸러내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는 의미이다.
‘움베르토 에코, 세계의 도서관’은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는 작금의 우리사회에서 작은 은신처를 제공해 주는 것 같은 영화다. 어쩌면 지금의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길의 시작은 움베르토 에코식의 사색과 논리의 구축일 수 있다.
영화는 움베르토 에코의 어마어마한 장서와 함께 토리노 왕립도서관, 밀라노 브라이덴제 도서관, 토리노 대학교 아르투로 그라프 도서관, 이몰라 시립 도서관, 토리노 아카데미아 델레 쉬엔쩨 도서관, 토리노 대학교 노르베르토 보비오 도서관 같은 고풍스럽고 우아하며 장엄한 도서관들을 목도하게 한다. 독일의 울름 시립 도서관, 비블링겐 수도원 도서관, 슈투트가르트 시립 도서관도 만날 수 있고 스위스의 장크트갈렌 수도원 부속 도서관,. 멕시코 멕시코시티 바스콘셀로스 도서관, 중국의 텐진 빈하이 도서관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지친 영혼들을 이 도서관 다큐멘터리가 조금이라도 달래 줄 수 있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개인 도서관, 그리고 세계의 도서관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