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 ➃ 용서는 다정한 모습으로 (2)
박지효 기자
등록2026.09.18 18:17
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제1회 하이니티 청소년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 금알음 작가의「세계에서」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내려앉은 실내의 공기는 그리 편한 느낌을 선사하진 않았다. 침묵도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해 얘기하자면, 지금 상황이 훌륭한 교보재가 되어줄 것이리라. 칩을 강제로 파손시킨 자리에는 작은 열상이 남았다. 치료에 앞서 받아먹은 진통제가 정신을 조금 몽롱하게 했다. 여로가 나가지 않았으면 좀 나았을까. 열린 문틈으로 상황을 확인한 사감 선생님은 경악을 차마 숨기지 못한 채, 여로로 하여금 나를 부축하게 해 보건실로 보냈다. 전에도 설명한 적 있는 것 같지만, 편하지 않은 상대와 단둘이 있는 건 꽤나 많은 정신력을 요한다. 어느 정도 염두에 둔 상황이었기에 나는 여전히 차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역시 편할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화장실에 올려둔 비커를 잘못 건드려서 그랬다… 이거니?” 선생님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상처를 소독하며 입을 열었다. 따끔거리는 고통이 미간을 찌푸리게 하려는 것을 의식적으로 참으며, 피가 채 닦이지 못해 끈적한 손끝을 비볐다. 고통을 참는 것은 익숙하다. 적어도 이것은 내 통제 범위 안에 있는 고통이었다. “… 예. 찬장에 보관해 둔 비커를 꺼내려다가 놓쳤는데, 그게 깨지면서 잘못 맞아서 이렇게 됐습니다.” 나는 무감한 눈길로 자초지종을 꾸며내어 설명했다. 물론 보건 교사의 눈에는 택도 없는 변명일 터다. 깨지면서 한 곳에만 이리 깔끔하게 상처가 날 수 없다는 건, 보건 관련 지식이 전무한 나도 추론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구태여 거짓을 논하기를 택한 것은, 그저 한 가지가 궁금해서였다. 진실이 다 들여다보이는 뻔한 거짓말에, 선생님이 어떻게 나올지. 열이 펄펄 끓던 그 날, 선생님에게서 느낀 기시감은 정말 진실이었는지를 다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다정한 눈빛 속에 많은 것들을 안고 있는 선생님은 위선자일까, 외부의 눈을 가진 채 세계 속에서 유리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수도자일까. “어쨌든, 기록이 송신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다행이구나. 백업 신청을 해두면 포인트 지원에 문제는 없을 거야.” 툭. 가위의 날이 부닥치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자 소름이 끼쳤다. 선생님은 애써 평이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시험도 훌륭하게 끝냈던데, 이런 일 때문에 물거품이 되면 안타깝지. 그래, 어디 지원할 건지는 정해뒀니?” 내 것이 아닌 손끝의 온기가 상처 부위에 닿는다. 단단하게 드레싱 된 상처에서는 더이상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묵직한 온기의 자락에서, 그가 대화의 주제를 돌리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글쎄, 안타까운 얘기지만, 나는 딱히 그 가장된 평온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상당히 바로 선 정신으로 입을 열었다. “아뇨, 아무 데도 지원하지 않으려고요. 쌓아둔 포인트는 양도하겠습니다.” 멈칫. 테이프를 꼼꼼히 눌러 붙이던 움직임이 잠시 멎는다. 선생님의 시선이 푹 꺼지는 게 보여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협력 연구 포인트는 한 사람에게 양도가 가능하다고 들어서요, 한결이에게 전부 양도하고 싶어요." "하하… 머리를 다쳤다고 장난이라도 쳐보는 거니? 시도는 좋았지만 인지를 담당하는 부분은 그 안쪽에-" "거기까지 안 다쳤으니까 장난이 아니겠죠." 나는 진중한 눈으로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거짓이 아님을 똑바로 주지시키려는 시도였다. 예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있기에 포인트와는 별개로 죄책감이 들었지만, 당당한 태도로 나가지 않으면 박혀버린 이치를 빼내는 것은 영영 불가능할 터였다. 사회적 체면을 모두 저버릴 정도의 각오가 아니라면.
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먹혀들어 간 모양인지, 선생님의 입가에서 어색하게나마 존재하던 미소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여기까지 잘 달려와 놓고, 대체 왜…” “왜 달려왔는지를 모르겠어서요, 선생님.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달려가는 것만큼 위험한 게 어디 있겠어요.” 상급 학교의 그 어디에도 내가 도착해야 할 곳이 없었다. 목표 하나를 정했어도 계속 공허하기만 했던 것은, 이 과정 자체가 목적 없는 주행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꼭 어디로 향해야지만 좋은 삶은 아니야. 다들 그렇게 살아, 여명아. 달리는 이유조차 모르고 달리는 거지. 내일이 있으니까.” 잠시 침묵하던 선생님이 입술을 꽉 내리 물더니 입을 열었다. 악에 받치려는 것을, 애써 참는 듯한 모습으로. “어차피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거, 조금 더 편하게 달리는 게 현명한 일이야. 어쨌든 살아내야 하니까. 너라고 다를 게 없어. 너라고, … 아니, 나라고 다를 것도 없었지.” 바다를 향해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선생님은 내 눈동자에서 젊은 날의 자신을 읽었다. 슬픈 어조는 현실에 순응한 자신에 대한 애도이자 제자를 자신과 같은 길에 묶어두려는 것에서 기인한 죄책감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말은 틀린 게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았고, 나도 그렇게 살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형을 기쁘게 하고 싶어서, 속죄를 해야해서, 낙오자가 될 수 없어서. 살아내야 해서. 나를 위해서라고 표방한 외압에 의해 편한 길이라 불리는 것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나는. 편안하고 따스한 공허보다는 거칠고 괴로운 광야에서 구르는 편을 택하려 한다. 그 공허를 메꾸기 위해서도, 척박한 광야에서 보물을 찾는 이들은 꼭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가보지도 않는 건 바보짓이죠.” 그곳엔 길을 찾지 않아도 길이 있을 거예요. 덧붙이자 선생님의 표정이 알 수 없게 변했다. 면면에 떠오르는 저 감정들은…
그때, 선생님의 눈앞에 푸른 창이 떠올랐다.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메시지를 읽는 선생님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린다. 무슨 일이지. 그리 크게 동요할 일이 있나 싶어 의문에 잠기는데, 선생님이 별안간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딘가 비장하고도… 안타까움을 담은 눈으로. “… 여명아. 놀라지 말고 들어야 한다. 네 형이… 위독하시다는구나.” 형에게 가보렴. 이건 그 후에 다시 얘기하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어깨를 단단히 잡은 선생님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를 진찰대에 박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형이… 예견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직접 마주하는 감정들은 예견 따위로 미리 대비할 수 있을 만큼 옅은 감정이 아니었다. 형. 나는 오래간 입에 담지 못했던 이름을 담으며, 아무 표정도 짓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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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색도 없는 냄새. 대륙을 가로지르는 자가 부양 열차가 거의 아무런 소음도 없이 플랫폼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17시 40분경 남부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탑승하실 승객들은 7번 게이트를 향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17시 40분경, 남부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음성이 아닌 것이 플랫폼을 울리자, 몇 개의 인기척들이 부산스레 열차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짐짓 공허한 담임 선생님이 보내온 전자 티켓의 바코드를 띄웠다. 잘 추스르고 오길 바란다. 전자 티켓과 함께 떠오른 전언은 담백했다. 아니, 잘 추스를 것도 없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나는 그저 배웅을 하러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 그렇게 느껴야 했다. 그러니까, 슬퍼할 필요도… 비탄에 잠겨서, 주저앉아 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강하게 감았다 뜨며 열차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창문에 비친 눈가가 붉다. 짙은 감정들이 훑고 지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는 가슴보다는 눈가를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곧 스러져갈 것들을 보내기 위해선, 조금 긴 여행을 떠나야 했다. 시험이 끝나지 않았다면, 작별을 위해 길을 떠나는 것조차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내 고향은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이다. 수도에 있는 학교에 들어오게 되면서 떠나온 그곳은, 이 학교보다 배는 척박한 곳이었다. 지구에서 버려졌는지 너른 바다도, 울창한 숲도 존재하지 않고, 현대 기술의 축복이 내려앉다가 마음을 바꿔 떠나기라도 한 듯, 파멸 전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 형은 아직 그곳에 남아있었다. 부모를 일찍 잃은 내게 나이 터울 많은 형은 유일한 보호자이자 후견인이었다. 그리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좋은 동거인쯤은 되는. 유일한 혈육을 대하는 태도치고는 이상하게 회의적이라 생각한다면, 그게 맞다. 형은 그리 나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못했을 거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나의 모든 치부와 죄악과 비탄의 이유도 그곳에 있다. 그러니 중태라는 형에게 향하는 지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지. 부드러운 진동과 함께 열차가 출발한다. 나는 다시금 눈을 감고 마음을 좀먹는 죄악들을 선연히 느꼈다. “남부엔 언제쯤 도착해?” “쾌속 열차니 아마도 8시 전엔… … 어?” 거의 자동적으로 알고 있는 정보들을 내뱉다 말고,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얼굴이 눈앞에 있다. … 여로? 멍청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여로가 후드를 벗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왜 여기 있어? 아니, 그것보단 어떻게…” “결석계 내고 왔어. 곧 동생 기일이거든.” 여로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 디자인으로 획일화된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그는 제 나이에 비해 훨씬 어려 보였다. … 동생이 있었구나. 꽤 슬픈 사유에 나는 놀란 시선을 거두고 애써 여상한 태도를 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차피… 침잠하는 감정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일까. “좀 괜찮아? 기숙사에 없는 사이에 그렇게 나가버려서 꽤 놀랐어.” “아, 미안… 그러고 보니까 얘기도 못 하고 나왔네.” 여로의 시선이 반투명한 재생 밴드가 붙어 있는 곳을 향하자, 나는 슬며시 그것을 가리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쓰라린 상처의 아픔 따위는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떤 큰 일렁임 앞에서, 그것보다 작은 고통의 안위를 묻는 건 공허한 울림에 불과하다.
… 그래. 적어도 창가에 비친 붉어진 눈가는, 아무런 동요도 겪지 않은 사람의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지금 나는, 슬퍼하고 있는 걸까. 심장이 고장난 게 아니라면, 이리 낮게 뛰고 있을 리가 없었다. “형이 곧 떠날 것 같대.” “….” “작별 인사를 하고 오라고…, 잘 보내드리고 오라고 하셨어.” 고요한 목소리의 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뒤이은 토로 앞에서, 여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것은 이별에는 생각보다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침묵이었다. 고개가 유독 무거워 잠시 눈을 감으니, 곧 어떤 손길이 부드럽게 고개를 돌리게 한다. 오른쪽 볼에 따뜻한 것이 닿는 게 느껴졌다. 여로는 기꺼이 나에게 제 어깨를 내어 주었다. 안온하고, 단단하고, 안전한 인간만의 온기… 오랜만에 느끼는 그것이 그게 못내 달가워서, 나는 구태여 그의 손길을 외면하지 않고 힘을 뺐다. 잠시 그렇게 눈을 감는데, 별안간 커다란 천이 몸을 덮는 게 느껴진다. “남부는 춥잖아.” 가만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자, 내 몸 위로 담요를 덮어준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 지었다. 그래, 말마따나 남부는 추운 지역이었다. 아무리 겨울은 아니라지만, 얇은 섬유만으로는 방어하기 힘들 정도였다. “… 너, 남부 출신이야?” 남부의 날씨에 익숙한 듯한 그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꽤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로는 언젠가 고향 사람이라는 단어로 나를 부른 적이 있었다. 세계를 빠져나온 후에는 그것이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었노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어쩐지 여로는 정말 나와 동향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느낌을 주었다. 조금 멍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데, 여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로는 깔끔하게 암묵적으로 감춰두었던 사실을 인정했다. “응. 이곳저곳 전전하긴 했지만… 전학 오기 전까진 결국 남부를 벗어나지 않았어. 동생이 남부에 있기도 하고.” “… 정말 동향 사람이었구나. 언젠가 만난 적 있었을 수도 있겠네.” 나는 차창 너머로 휙휙 바뀌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조금은 씁쓸한 기분. 여로를 조금 더 이른 시점에 만났더라면, 지배당하지 않고 상급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때는… … 잘 모르겠다. 과거를 생각하면 여전히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차라리, 그것들을 똑바로 마주하면 나을까. 숨기고 억누르면 언젠가는 조금 더 악화된 방식으로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노을이 뒤덮은 세상은 붉었다. 불타는 듯한 빨간 노을은, 내게 후회를 안긴 적이 딱히 없다. 나는 포화 상태에 이른 머리로 차라리 마음을 뒤덮은 것들을 하나둘 똑바로 마주하기로 했다. “내 얘기 해도 돼?” 말간 눈으로 묻자 여로가 놀란 듯 잠시 숨을 들이켜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 담백하게 마주 웃어주며 낮은 한숨을 뱉었다. "… 나한테 가족이라곤 형뿐이었어. 어릴 적 기억들이 드문드문 잘려 있어서… 가장 첫 기억도, 가장 마지막 기억도 형이야."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고해를 시작했다. 신부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혹은 더 어린 시절의 우리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게 없었으니까. “형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형이 거의 나를 키우다시피 했어. 그래도 그때 형은 많이 어렸는데, 더 어린 내가 있었으니까… 형이 거의 인생을 포기했어야 했지.” 그래, 어쩌면 나의 원죄는 존재 그 자체였다. 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나와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인생을 바쳐야 했던 형은, 실은 학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기초 교육만을 받고 의료원에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간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은 어땠을지 몰라도, 형 덕분에 나는 딱히 부족하게 자라진 않았어, 다만 회의감이 있을 뿐. 형은 책임감이 강했지만 불행했고, 그 불행의 기저에 내가 있었으니까.“ 그걸 좀 일찍 깨달아 버렸거든. 눌러두었던 것을 회상하자 다시 숨이 막혀오는 기분에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상황이 그러니 형이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부양해야 할 내가 없었다면, 형은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꿈을 이뤘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불행이란 게 꼭 사람에 의해서만 찾아오진 않더라고. 열세 살 땐가, 형이 여명을 받아왔어. 여명이란 개념상으로는 조금 길었지만, 삶으로 봐서는 잔인할 만큼 짧은 거.”
하지만, 형의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불행은 아무 소리 없이 죄 없는 자에게 찾아오기 마련이었고,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형은 어느 날 생명이 몇 해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았다. 내 기억이 그친 곳은 거기까지였다. 형은 의지만 있다면 웬만한 병을 치료할 수도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명을 늘리기 위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울면서 간청해도, 돌아오는 것은 담담히 이별해 달라는 잔인한 말이었다. 그것조차 형의 증오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몸이 약해지는 날이면 고질병처럼 찾아오곤 했다. “… 그 여명이란 게,” “응. 그때부터. 지금이 오기까지였어. 그래도, 생각보다 조금은…” 조금은 이르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자조적으로 웃던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그래, 이건 말 그대로 잔인하다. 여명이 길다는 건, 성장을 준비할 수는 있지만 성장을 마친 후를 알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은. “끝을 알아서인가, 그때부터 형은 하나둘 마쳐야 할 것들을 정리했어. 그중 하나도 나였고. 그냥 그때부턴… 아무것도 보지 않고, 이 세계로 뛰어들 준비를 했던 것 같아.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죄지은 것을 조금이라도 사함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형의 운명을 알게 된 후부터였을까. 미력한 희망을 저버리고자 한 형 대신, 텅 비어버린 내 마음속에 기만이란 옷자락이 펄럭였다. 형은 미련을 버리려 하는데, 그의 꿈을 향한 내 비겁한 안타까움이 가슴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한 번 꿈을 향해 달려본 적 있는 형은 복지 대상자를 위한 중급 학교 편입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혹시, 라는 단어가 있지 않은가. 항상 올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이 문제였다. 혹시 시간을 더 많이 쓸 수 있었다면. 혹시 공부에만 온전히 신경 쓸 수 있었다면…
아이들은 감정에 유독 기민하다. 더구나 또래보다 조금 더 일찍 커버린 마음은 그런 미숙한 증오와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의 의지가 향하는 곳을 알았다. 제 감정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게도. 그래서 나는 형이 마지막 미련으로 제 꿈을 내게 투영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바람대로 공부에 매진하고, 전국 시험을 보고, 이곳 수도로 올라왔다. 형이 어떤 강제적인 행동이나 언어 표현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는 순종했다. 형이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전가하길 택했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하면서. 어린 심장으로도, 그것이 내가 빼앗아 버린 형의 삶에 대한 유일한 속죄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다른 길을 볼 새도 없었지만, 그것을 후회하진 않았다. 활로가 정해진 후에는, 더이상 고향에 대한 미련은 없어야 했으니까. 내겐 고향이란 걸 마음에 품을 자격이 없었다.
[열차가 곧 정차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행선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원활한 여행을 위한 안내 로봇이 각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딱딱한 기계음과 함께 열차는 중간역에 멈춰 섰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열차에서 내리는 승객은 많아지고, 올라타는 승객은 한두 명 정도로 준다. 열차가 역에서 멈출 때마다, 넓은 통창은 그들의 만남과 이별 따위를 선연히 비추었다. 그들은 웃고, 울고, 마음을 표정 뒤에 숨기고는 차라리 열차에 올라타고 난 후에 눈물을 흘렸다. 오래간 볼 수 없었던 인간의 감정들은 너무나도 생경했다. 이별을 고하러 가는 길, 이별을 마주하는 이들의 슬픔은 세계 속에서 억제되어 무던해진 가슴으로도 시선을 멈추게 한다. 무감함을 표방한 가슴과 거짓말을 하지 못한 시선의 간극은 후회를 자아냈다. 나는 힘이 모두 빠져버린 듯 몸을 축 늘어트리며, 자조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거기까지였으면, 지금 조금이라도 더 의연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게 그리 깔끔하게 끝났더라면,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하진 없었을 텐데.” 손끝이 저려온다. 깊은 호흡을 내쉬듯 끊김 없이 내뱉어진 말은 뒤에 가서야 조금씩 떨렸다. “… 여명이 본명이 아니야?” 그 떨림에 잠시 멈칫한 여로가 물었다. 나는 얼굴에 상투적인 미소를 띄워내며 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저림은 그 작은 움직임을 뒤늦게 따라온다. “응. 입학할 때 지은 거야. 새로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게… 그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여명. 나는 삼 년을 채 쓰지 못한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가장 먼저 이름을 버리고, 나를 버리고, 그렇게 모든 미련들과 함께, 남부 어딘가에 유년 시절을 묻으려 했다. 여명을 따라온 것은, 낙인처럼 새겨진 죄악에서 흐르는 붉은 것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정리하고자 했던 나와는 다르게, 정작 버리라고 했으면서 미련을 가진 것은 형이었던 모양이다. 형의 미련은 제 삶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었다. "그냥, 그렇게 조용히 숨을 죽이며 살다가… 이 학교에 합격하게 됐는데, 형이 날 어느 병실에 데려가는 거야. 살면서 본 것 중에 제일 환한 미소를 보여줘 놓고.“ 그 차가운 공기를 떠올리자 머리 한가운데에서 지끈거리는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그 환상은 시간이 꽤 오래 흐른 지금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로 나를 데려다 놓고는 했다. 형은 이 학교에 합격한 그날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고, 내 손을 잡고 의료원에 가 나를 수술대에 눕혔다. 미성년자의 기억 제거 수술은, 수용 가능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당사자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법적 보호자의 동의만 있어도 진행 가능하다고 했다. 형은 내 합격을 염두에 두고, 거금을 들여 기억을 없애는 수술을 맡겼다. 영문 모를 상황에 얼이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수술의 정체를 알게 되고는 힘차게 저항했으나 그 저항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차가운 수술대에 눕혀지면서 본 형의 표정이, 전에 없이 슬펐으니까. 마치 길가에서 볼 수 있던 붉은 토양 같았다. 졸린 호흡이 닿고, 흐린 시야가 감겼다. 수마가 그리 원망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그 무력했던 과정들을 말로 뱉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삶의 모습이 다양하다지만 이건 그다지 평범한 일이 아니었고, 한결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치부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고해하는 날이 온다면, 분명 숨이 막혀올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가슴을 누르고 있던 납덩이가, 점점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웃기지도 않지. 또 내 기억이 온전히 지워진 건 아니었어. 조금이나마 받아들이고 난 후에 따로 찾아보니까, 어릴수록 뇌가 다 발달하지 못해서, 기억 제거술이 부분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게 내 이야기가 된 거고. 자조적인 어조로 덧붙이자, 어쩐지 공기의 흐름이 일순간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의 긴장은 착각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금세 제 궤도를 찾았지만, 어쩐지 들이쉬는 것들에서 일종의 향수(鄕愁)가 느껴진 듯도 했다. 그래, 그 짙은 내음처럼, 운명이라는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운명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알싸한 소독약 향기를 맡으며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 잠이 깨지 않아 흐린 시선으로 천장을 올려다본 나는 몇 년 만에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묵직한 슬픔과 차마 대상을 말할 수 없는 일말의 원망이, 심장을 죄이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기억 중 일부가 날아갔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럼에도 날 수술대에 눕힌 형을 증오할 수 없던 건 하나였다. 눈을 완전히 감기 전, 마지막으로 의사를 묻는 담당자에게 형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은 말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세상으로 나아갈 이 아이가, 민춤한 양육자로 인해 잘못된 과거를 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형은 내게 행복한 기억만을 남겨 자신을 좋은 보호자로 기억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과거에 묶인 밧줄을 끊어준 것뿐이었다. 그것은 형의 속죄이자 사랑이었다. 정작 나는, 그를 미워해 본 적이 없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적이지 않은 힘이 형에게 잔인했던 것인지, 내게 잔인했던 것인지, 우리 형제 모두에게 잔인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력하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미련한 손길로 서로를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래, 옛말로 표현하자면, 이건 비극 그 자체였다. "하필이면 수술 직전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더라. 그때 형의 얼굴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항상 죄를 지은 건 나라고 생각했는데, 형은 무슨 용서받지 못할 죄를 고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그래서… 병실에서 눈을 뜨고도 원래의 모습으로 형을 대할 수가 없었지." 그 무표정한 모습 뒤에 숨긴 것이 내 것과 같은 축축한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무어라 표현할 수 없던 그때의 심정을, 그 축축한 것들을, 차마 형에게 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형이 나와 편지만 간간히 나누는 사이의 형제라고 자신을 설명하며 병실로 들어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척 아무것도 모르는 눈빛을 자아내는 게 전부였다.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면, 또다시 수술대에 눕혀지는 것은, 너무나 쉬웠으므로.
그리고 형과의 기억은, 거기서 얼마 머지않은 이 학교에 입학하는 시점이 마지막이다. 나는 잠시 말하던 것을 멈추고 수도로 올라온 이후의 기억을 회고했다. 그 이후엔 모두가 짐작할 수 있을 법한… 그런 당연한 수순이었으니, 구태여 입으로 뱉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는 원래 거리가 있었다는 방어막을 두르고 세상을 처음 맞는 나를 맞이한 형과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서로가 알지 못하는 굳어진 죄책감은 고질적으로 형제 사이의 거리를 벌려 놓기만 했다. 같이 지내는 마지막 시간 동안 거의 남과 같은 사이를 표방했으므로, 이별도 담담했다. 하지만 형이 뒤돌아서며 아프게도 울었을 것이라는 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 또한 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숨죽여 한참을 울었으니까. 나는 형을 애도하며 여명이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쇠잔한 목숨. 나는 그것을 먹고 자라났다는 걸, 그의 죄책감을 양분으로 삼아 수도에 올라왔다는 것을… 사람된 일말의 도리로, 결코 잊지 않으려고.
시간은 고통 속에서도 계속해서 흘러갔다. 시험을 치고, 포인트를 쌓았다. 사고조차 지배를 받는 건, 적어도 과거의 일을 생각할 일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동향 친구 한결을 이곳에서 다시 마주했을 때 잠시 동요할 뻔했으나, 한결은 나를 처음 보는 체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모르겠으나… 그것도 형의 뜻일 터다. 정제된 거짓 속, 어릴 적 한결의 눈빛과 행동 따위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것을 숨기기는 쉽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삶의 고됨과 바쁨은 그것조차 무뎌지게 했다. 한결과 고향의 일을 이야기할 여유 따위도 없었으니까. 가끔 한결을 보면, 형을 떠올리면, 조각조각 남아있는 유년의 기억이 나를 미칠 듯이 괴롭게 했지만, 고향 사람 한결과 수도의 이야기를 하면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언젠가 고통에 완전히 의연해질 수 있을 때… 그때서야 고장 난 기억을 극복할지, 완전히 버릴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므로, 내가 버티기 위해 택한 건 순간의 망각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내가 과거를 다시 마주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은, 아직 그리 의연해지지 못한 시점이라고.
너무나 큰 낙관에 젖어 있던 걸까. 여로의 어깨에 기댄 채 가만히, 그의 호흡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의 박동은 곧았다. 정상 궤도를 벗어난 지 오래인 내 심장과는 다르게. 이 어깨가 없었다면, 남부로 향하는 이 여로는 조금 많이 외롭고… 퍽 서러웠을 것이다. 온기는 언제나 간절한 것이었으니까. “… 안녕. 넌 이름이 뭐야?”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여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하다가, 곧고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고작 몇 개월 전, 어영부영 첫인사를 했던, 그 복도에서처럼. 여전히 변함없이, 그의 눈은 파랗기만 하다. 이유 없는 서러움에 소리 없이 허우적대던 나는, 그 올곧음을 보고 그만 아주 낮게 웃어버렸다. 이름을 물어준 사람은, 적어도 기억하는 한에서는 처음이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고백하듯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한이야. 이 한.” 진솔한 시선과 시선이 처음으로 맞닿는다. 내 눈은 어떤 색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 무엇도 제대로 알지는 못하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젠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름이 꽤 괜찮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증오와 혐오로 점철되어 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그 이름을 뱉는 입에는 아무런 껄끄러움도 존재하지 않았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린 열차 안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것은 마술사가 제 모습을 벗어던지기에 충분한 시간과 암전이었다. “나는… 방랑하며 살았어. 집이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고, 모든 세상이 곧 집이었어.” 드문드문 인공적인 불빛이 여로의 얼굴을 비추었다가 어둠 속에 감추기를 반복했다. 나는 가만히 그 피사체를 바라보며, 여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 삶을 아무에게도 보인 적 없었듯,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난 딱히 이름을 바꾸진 않았어. 여로도 내가 지은 이름은 맞고. 보육원에서 자라서, 제일 첫 기억에선 아예 번호 말고는 이름이 없었는데…" 조금 쌉싸름한 그의 이야기는 꽤 오래 길게 이어졌다. 나그네의 방랑기는, 결코 순탄할 수 없지만, 결국엔 아름다운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는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➄ 그리고 아이는 자라난다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