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 서로를 고양시키는 음악적 공명, 그리고 타인의 재능을 향한 인간적인 질투.” (박현석 감독)
“만약 모차르트와 살리에르가 절친이었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을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한 작품.” (신이원 작가)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N 토일드라마 ‘포핸즈’를 이끈 박현석 감독과 신이원 작가가 일간스포츠를 통해 밝힌 드라마의 핵심 줄기다. ‘포핸즈’는 음악 천재들만 모인 예술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청춘들의 우정과 사랑, 경쟁과 성장을 그려냈다. 노력형 천재 피아니스트 강비오 역은 송강이, 타고난 천재 피아니스트 최정요 역은 이준영이 맡아 열연을 펼쳤다. 여기에 장규리(홍재인 역), 윤세아(강지혜 역), 정진영(강승운 역), 서재희(윤선주 역) 등 내공 깊은 배우들이 합세해 극의 무게감을 탄탄하게 잡았다.
‘포핸즈’는 제작 초기 캐스팅 단계부터 송강과 이준영이라는 대세 스타의 만남만으로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방송이 시작되자, 우정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두 인물의 절절한 관계성에 시청자들이 매료됐다. 웬만한 로맨스물 못지 않은 애틋함 덕에 일각에선 ‘BL’ 장르로 해석하는 시선까지 나왔다. 급기야 티빙 ‘환승연애’ 시리즈처럼 비오 정요의 서사를 엮은 2차 가공 콘텐츠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뜨거운 반응에 박 감독은 “시청자분들이 저마다의 다양한 시선으로 드라마를 즐겨주시는 건 모든 제작진에게 더없는 행복이자 감사한 일”이라며 “작가님의 텍스트와 영상화된 장면 사이의 여백을 풍성한 해석으로 채워주셔서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라고 전했다.
◇ ‘포핸즈’, 현대판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18세기 음악사를 뒤흔든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는 열등감과 애증의 대명사다. 당대 궁정 악장으로서 최고 권위와 안정적인 기량을 가졌던 살리에르는 신이 내린 타고난 천재성을 가진 모차르트의 음악을 접한 뒤 깊은 절망과 자괴감에 빠졌다. 천재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기에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살리에르의 비극은 세월이 흘러 ‘포핸즈’ 속 비오와 정요의 학창 시절 서사로 재탄생했다.
신 작가는 “제가 천재들이 수두룩한 예고에서 스스로를 살리에르라고 생각하며 열등감에 찌들어 학교에 다녔던 케이스”라며 “하지만 대학교 때 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예술은 한낱 알량한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예술로 사람을 감동시키려면 너이 모든 인생을 담아라’고. 그것이 바로 ‘포핸즈’의 주제가 되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음악에 인생을 담아라”는 대사는 극중 비오의 할아버지 강승운이 비오에게 해준 충고이기도 하다.
◇ 우정 → 오해 → 혐관... 그리고 사랑?
사진=tvN 제공 비오와 정요의 서사를 두고 “웬만한 로맨스보다 더 애틋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두 사람이 겪는 감정의 궤적이 실제 연인들이 사랑하고 이별하는 순간들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친구는 ‘피아노’라는 매개체로 우정을 쌓고, 서로를 깊이 아끼면서도 견제하는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9년이라는 절절한 공백기 끝에 다시 만난 두 사람. 그러나 서로를 깊이 ‘오해’한 채 재회한 이들은 반가움을 억누른 채 눈물과 분노, 복수로 지난 세월의 설움을 토해낸다.
신이원 작가는 이들의 특별한 관계성을 구축하기 위해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과 이를 영화화한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2011)을 가장 깊이 참고했다.
“그곳에 등장하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는 남녀이지만, 그걸 떠나 그들 관계의 본질은 그 척박하고 바람 부는 땅에서 의지할 단 한 사람이 서로뿐이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아버지에게 심하게 매질당한 히스클리프의 상처를 캐서린이 가만히 보듬어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캐서린은 모두가 외면하던 히스클리프를 인간적으로 아껴준 유일한 존재였고, 그 순간 히스클리프에게 캐서린은 생을 바칠 단 한 사람이 되었으니까요.”
신 작가는 야생을 맴도는 한 마리 늑대 같은 ‘히스클리프’의 이미지를 정요에게 투영했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차갑고 냉소적인 ‘캐서린’의 결을 비오에게 입혔다. 실제 ‘포핸즈’에서도 비오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가족이 단 한 번도 편안한 존재였던 적이 없었고, 정요는 유일하게 가족 같았던 비오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결국 서로에게 서로가 유일한 안식처였던 만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최정요, 그저 비오를 사랑한 굶주린 늑대
사진=tvN 제공 ‘포핸즈’ 중후반부를 끌고 가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정요의 복수’다. 중요한 콩쿠르 출전을 앞두고 비오 어머니가 사주한 범인들에게 납치당해 어깨 총상을 입은 정요. 평생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됐다는 절망과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는 상처를 안고 9년의 세월을 견뎠다. 반면 비오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정요의 부재 속에서 손쉽게 1위를 차지하며 클래식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이 모습을 그늘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정요는 복수를 다짐하며 피아니스트가 아닌 ‘지휘자’로 그의 앞에 다시 선다.
신이원 작가는 대본을 쓰는 내내 현대 클래식 거장 막스 리히터의 ‘온 더 네이처 오브 데이라이트’를 반복해서 들었다고 밝혔다. 2004년 발표된 이 곡은 묵직한 베이스 라인 위로 차갑고 애절한 현악 선율이 겹겹이 쌓여가는 현대 클래식의 명곡이다. 영화 ‘컨택트’, ‘셔터 아일랜드’ 등에서 거대한 상실감과 슬픔, 복잡한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표현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신 작가는 이 곡에 달린 “배고픈 늑대는 양을 사랑한다”는 한 댓글의 문장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본능대로라면 늑대에게 양은 허기를 채워줄 먹잇감이지만, 그 양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늑대는 자신의 욕망과 사랑 사이에서 모순에 빠진다. 정요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년을 버티게 한 복수의 끝에는 비오가 있지만, 정작 그를 무너뜨리려 할수록 자신이 여전히 비오를 아끼고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복수해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인 셈이다.
작가는 이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해칠 수 없고, 미워하기 때문에 놓을 수도 없는 정요의 딜레마를 ‘배고픈 늑대’의 이미지와 겹쳐내며 비오를 향한 복수와 애증의 서사를 한층 짙게 완성했다.
◇ 비오와 정요는 왜 ‘죽음의 무도’를 쳤나
사진=tvN 제공 ‘포핸즈’가 음악 드라마인 만큼 피아노곡 선정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단연 서사와의 ‘개연성’이었다. 작품의 오프닝이자 비오와 정요가 듀엣(포핸즈) 연주로 관계의 서막을 알렸던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는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곡이다.
‘죽음의 무도’는 밤 12시 종이 울리는 순간, 죽음의 신이 무덤에서 해골들을 불러내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기괴한 춤을 추게 한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명곡이다. 곡 초반 악마를 상징하는 섬뜩한 화음과 날카로운 현악 선율이 팽팽한 긴장감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특징을 지녔다.
신이원 작가는 한 소규모 실내악 공연 영상에서 두 고등학생 피아니스트가 ‘죽음의 무도’를 연주하는 모습을 우연히 본 뒤 큰 영감을 받았다.
“두 사람의 연주가 분명 하나의 협주였음에도, 마치 목숨을 건 결투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떨 때는 서로의 소리를 조율하며 협력하다가도, 어떨 때는 으르렁거리며 치열하게 싸우는 듯한 묘한 에너지를 풍겼죠.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분위기를 압도하는 긴장감 역시 대단히 드라마틱했습니다.”
이어 신 작가는 “더 적합한 레퍼런스가 있을까 싶어 수많은 포핸즈 곡을 검토했지만, 정요의 첫 등장과 두 사람의 첫 연주라는 중요한 순간을 대체할 곡은 없었다”며 “첫 마디의 강렬한 불협화음이 주는 중압감과 리듬이 고조될수록 죄어오는 긴장감이 우리 대본의 서사와 완벽히 일치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기획 단계부터 배치된 음악사적 힌트도 흥미롭다.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는 1872년 성악곡으로 처음 탄생한 뒤, 1874년 관현악을 위한 교향시로 확대·개작됐다. 이후 프랑스 작곡가 에르네스트 기로가 두 명의 연주자가 한 대의 피아노에서 함께 연주하는 ‘포핸즈’ 버전으로 편곡했다.
결국 피아니스트로서 ‘포핸즈’ 연주로 시작해 훗날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로 돌아오는 정요의 서사는 ‘죽음의 무도’가 걸어온 편곡의 역사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곡의 오리지널리티와 편곡사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넣은 제작진의 공으로 ‘포핸즈’는 한층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기억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