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패러게임 탁구 남자 단식(스포츠등급 CLASS 2) 결승전에서 만난 박진철과 김경현이 손을 맞잡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벤치에는 지도자가 없었다. 같은 나라 선수끼리 맞붙는 결승전에는 코칭스태프가 들어가지 않는 관례에 따라 두 선수는 각자 홀로 타석에 섰다. 경기 전 랠리 도중 공이 빗나가자 후배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쳤지만, 서브가 시작되자 테이블 위 공기는 이내 날카로워졌다.
박진철(44)과 김경현(43·이상 서울시장애인체육회)이 20일 일본 아이치현 도요타시 스카이홀 도요타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APG) 탁구 남자 단식(스포츠등급 Class 2) 결승에서 맞닥뜨렸다. 결과는 관록의 완승이었다. 박진철이 세트 스코어 3-0(11-9 11-6 11-3)으로 이기며 2018 자카르타, 2022 항저우에 이어 대회 3연패를 달성했다. 탁구 전향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종합대회에 나선 김경현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승패가 갈린 뒤 박진철은 후배부터 감쌌다. 그는 "외국 선수들을 꺾고 둘이 결승에서 만나게 돼 솔직히 마음은 편했다"면서도 "경현이가 큰 대회 결승이 처음이라 긴장한 탓에 본래 기량을 다 보여주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이에 김경현은 "롤모델과 결승이라는 큰 무대에서 맞붙은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며 "좋은 배움의 자리였다"고 화답했다. 박진철이 "더 치열하고 멋진 승부를 기대했다"고 장난스레 말을 건네자, 완패를 인정한 김경현은 "제가 조금 덜 멋졌던 모양"이라며 활짝 웃었다.
이 특별한 맞대결의 출발점은 소셜미디어 다이렉트 메시지(DM) 한 통이었다. 김경현은 본래 한국 장애인 수영의 간판이었다. 2010 광저우와 2014 인천 APG에서 금메달 3개를 따낸 실력자였다. 실업팀 플레잉코치로 활동하던 그는 유튜브에서 우연히 도쿄 패럴림픽 탁구 영상을 보고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꼈다. 영상 속에서 맹활약하던 선수가 바로 박진철이었다.
20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패러게임 탁구 남자 단식(스포츠등급 CLASS 2) 결승전에서 만난 박진철과 김경현이 경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탁구에 매료된 김경현은 일면식도 없던 박진철에게 긴 장문의 DM을 보냈다. 수영 경력과 함께 "경기 영상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꼭 탁구를 배우고 싶다"는 절박한 마음을 담았다. 낯선 이의 연락을 거의 확인하지 않던 박진철도 정성이 가득한 장문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김경현에게 "스포츠등급 Class 2 판정을 받아오면 광주 소속팀에서 함께 훈련할 수 있게 돕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박진철은 당시를 떠올리며 "몸 상태가 이 등급에서 최상위권이었고, 무엇보다 함께 복식을 뛰고 싶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김경현은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겼다. 해당 등급 판정을 받자마자 2024년 광주로 내려가 급여도 없는 훈련생 신분으로 박진철 곁에서 라켓을 잡았다. 이후 두 사람은 서울시장애인체육회로 나란히 둥지를 옮겨 호흡을 맞췄다. 박진철의 노하우를 그대로 흡수한 김경현은 가파르게 성장했다. 박진철은 "거의 나를 복사해 만든 수준으로 플레이가 닮아간다"며 흐뭇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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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이자 스승인 박진철에게 김경현의 의미를 묻자 "아픈 손가락"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진철은 "정말 지독하게 노력하는데, 그 열정에 비해 기량이 더 빨리 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입문 몇 년 만에 국제대회 결승에 오른 것도 대단하지 않냐는 질문에는 "맞는 말이지만, 내가 녀석에게 거는 눈높이가 높아서 그렇다"며 웃어 보였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겨룬 승부는 끝났고, 두 사람은 21일부터 다시 한배를 탄다. 남자 복식(MD4)에 출전해 함께 금메달 사냥에 나선다. 정상에 오를 경우 박진철은 3개 대회 연속 2관왕이라는 금자탑을 쌓고, 김경현은 2014년 수영 이후 12년 만에 종목을 바꿔 아시아 정상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