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없는 시상식, 의미없는 트로피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연례 행사처럼 찾아오는 스케줄이라면,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뒤바뀌는 순간이 될 수 있다. 제53회 백상예술대상은 배우 이상희(33)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미래를 선물해 준 영광의 순간이었다. 배우 활동을 이해하지 못한 아버지로부터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처음받게 만든 것도, 축하 문화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만든 것도 모두 백상예술대상 영화 여자신인연기상 트로피다. "어머니가 울산에서 식당을 하세요. 아버지는 현장 일을 하시고요. 상을 받고 2주 후에 울산에 내려갔는데 식당 TV에서 하루종일 '백상' 시상식만 나오는거예요. 민망해 혼났네요."
백상 트로피를 안긴 영화 '연애담(이현주 감독)'을 통해 이상희는 많은 관객과 지금의 소속사, 그리고 수상의 영예까지 선물 받았다. 동성애를 소재로 꾸밈없는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 이상희는 "제 시야를 조금 더 트이게 만들어 주기도 했죠"라며 "그 사람들에게는 삶이고 생존인데 무엇을 '찬성하네, 반대하네' 그런 말을 할 것은 아니라고 봐요."라며 다부진 소신 발언을 꺼내 놓기도 했다. 부모님 다음으로 '존경심'을 느끼게 만든 선배 한석규의 영향력도 적지 않다.
어느 날 뚝 떨어진 충무로 샛별이 아니다. 배우로 데뷔하기 전 간호사로 오랜 사회생활을 경험했다. 잘 다니던 병원에 사표를 낸 순간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연기의 꿈'이 피어 올랐다. 스스로 '가난한 집안의 딸이자 기둥'이라 표현할 정도로 굴곡많은 인생이다. 연고지 없는 서울에서 홀로 프로필을 돌리고 영상을 만들고 오디션을 보면서 새 삶을 계획했다. 어머니는 오열했지만 이상희는 행복을 찾았다. "3년 정도 연기를 하다 돈이 필요해 1년간 다시 병원에 다녔죠. 다시는 돈 때문에 연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홉수에 서른앓이를 제대로 겪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이를 악물고 덤볐다. 치열한 고생 끝에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당신의 부탁', 그리고 곧 첫 방송을 시작할 드라마 '20세기 소년소녀'까지 빈틈없는 스케줄이 완성됐다. 신선함과 익숙함의 경계에 서 있는 이상희는 지금 연기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하다.
- '연애담'은 이상희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아 있나요. "제 경험치에 있어 너무 많은 관객들을 만났고, 지금의 회사도 만났고, 상도 받게 해 준 영화요. 고마운 영화이고 저의 시야를 조금 더 트이게 만들어준 영화이기도 해요."
- 동성애를 다룬 스토리도 영향력이 있겠죠. "대부분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잖아요? 근데 분명히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것들이 있고 의도와 다르게 숨기고 존재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됐고, 소수…. 솔직히 명확하게 소수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수라고 분류해 버리는 '그 사람들'이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편견을 너무 당연시 보내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고 관심갖고 응원하게 됐어요."
- 여전히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응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에게는 삶이고 생존인데 무엇을 '찬성하네, 반대하네' 그런 말을 할 것은 아니라고 봐요. 인간의 존엄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고 그런 쪽으로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아요."
- 연기하기 어렵지는 않았나요. "제 연기의 업 다운이 심하다는 것을 알게됐죠.(웃음) 많이 어려웠어요. 기본적으로 실제 제 모습과 약간 거리가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답답했어요. '이쯤되면 한 번 질러도 되지 않나? 난 언제까지 참아야돼?' 싶었죠. 감독님께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그리는 그림이 확고 하셨어요. '처음 사랑하는 감정을 느꼈던 그 당시를 생각해 봐요. 나이만 다를 뿐 머뭇거리고 아닌 척하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어요' 찍을 땐 동의하지 못했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죠."
- 가장 공감했던 감정과 포인트가 있을까요 "대체로 공감은 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아예 연기 자체를 할 수 없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있어요. '내가 뭐 했냐?'라고 말하는 신이요. 찍을 때도 억울했어요."
- 실제 연애 스타일은 어떤가요. "다 이야기 하는 편이에요. 잘못하면 잘못한대로, 서운하면 서운한대로. '네가 나한테 이래서 난 서운해'라고 말해요. 일 할 때도 그래요.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을 누가 지적해주면 받아들이고 저도 원하는 것을 항상 전달하죠. 그게 편하더라고요."
- 연기는 어때요. "좋아요. 좋아하고. 힘들고 괴로울 때가 훨씬 더 많은데 이 일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전 무언가 마음에 들면 항상 왜 좋아 하는지 이유를 찾거든요? 나이와 흐름의 과정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요. 지금은 제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이 연기라 생각해요. 일상적인 삶을 살면 제 주변, 제 테두리만 보게 되잖아요. 근데 연기는 제가 몰랐던 저라는 사람을 알게 해줘요. 안 했다면 평생 저를 그렇게 들여다 볼 일이 없었겠죠."
- 새롭게 알게 된 모습은 무엇인가요. "전 제가 되게 모나지 않고 밝은 사람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연기를 하면서 알게 됐죠.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편하고, 어쩔 때는 밝아 보이기 위해 애쓴다는 것도 알게 됐고. 뭐가 나에게 더 편한지 찾고 있어요."
- 기분이 다운되면 주로 뭘 하나요. "아무것도 안 해요. 그대로의 저를 내버려 둬요. 영화 보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어요. 책 읽는 것은 안 좋아하는데 보려고 노력하죠. 최근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이렇게 행복하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어요. 그 행복의 깊이를 깊게 깨우치고 있는거죠. 옛날에는 자괴감이 들었는데.(웃음)"
- 힘이 되는 사람이 있나요.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된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것에 엄청난 타당성을 부여해준 분을 만났어요. 한석규 선배님이요. 사람이 사람답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분을 통해 알게 됐어요. 만남 자체가 되게 감동적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한석규 선배님처럼 끊임없이 사람에 대해 관심갖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커요."
- 현재 같은 소속사죠. 자주 보나요. "네. 그래서 더 좋아요.(웃음) 조언도 많이 해 주세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 캐스팅 됐는데 촬영가기 전 한석규 선배님께서 '나 나문희 선생님이랑 같이 작품 했었잖아~'라면서 도움 될 만한 이야기들을 해 주셨죠."
- 상 받은 후에 축하 인사도 해주시던가요. "그런 건 안 하세요. 하하. 신기한게 흔히 '너는 연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니?'라고 물어 보잖아요? 근데 선배님이 그렇게 물어봐 주시면 '넌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자랐니?'라고 들려요. 처음 만났을 때도 '배.우.'라는 느낌보다 대체불가의 '사람'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어요. 예전엔 인터뷰에서 존경하는 인물 뽑아 달라고 하면 없다고 했는데 처음으로 그런 인물을 만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