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 년 공백 후 악역으로 재기에 성공,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악역으로 제53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남자 조연상도 수상했다. 영화 '부산행'에서 좀비 보다 더 징글징글한 용석 역으로 열연, 생애 첫 백상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김의성은 1987년 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해 1988년 '성공시대'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주연도 맡고 더 승승장구 하던 찰나, 1999년 돌연 영화계를 떠났다. 공백이 있었고, 2011년 '북촌방향(홍상수 감독)'으로 복귀 했다. 어렵게 다시 시작했지만, 솔직한 성격이 때때로 비수가 되어 그를 공격했다. 정치, 사회, 연예계 등 분야를 막론하고 거친 발언을 쏟아내 논란과 이슈의 중심에 여러번 섰다. 하지만 배우는 연기로 얘기하는 법. 임팩트 있는 캐릭터와 연기로 충무로에서 우뚝 일어섰다.
인생에 많은 굴곡을 겪어서일까. 세월의 흐름과 나이 때문일까. 취중토크를 위해 만난 김의성에게선 '의외로' 뾰족함을 찾을 수 없었다. 말투는 건조해도 날 선 느낌은 아니었다. 정중하고 젠틀했다.
※인터뷰①에서 이어집니다.
- '부산행'은 '1200만 공약(돌파시, 마동석에게 명치를 세게 맞겠다)'이 화제를 모았죠.
"절대 안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말한거죠. 그 공약을 걸었을 땐 이미 900만 명이 넘어갔을 때였어요. 1000만, 1100만까지는 넘을 줄 알았지만 1200만 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죠. 선수들은 다 알잖아요. 근데 예상보다 빨리 수치가 올라가고 떨어지지 않아서 '혹시?' 싶었죠. 그 때 되게 쫄았어요.(웃음)"
- 연속적으로 센 캐릭터를 맡은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요.
"약한 것도 들어왔는데 안 한거죠(웃음). 작품보다는 캐릭터를 신경쓰는 편이에요. '어떤 캐릭터가 좋은 캐릭터냐. 어떤 캐릭터가 좋으냐'라고 묻는다면 제가 주연배우가 아니잖아요? 결국은 이야기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거죠. 그게 제일 중요해요. 그렇다는 이야기는 주인공에게 영향을 끼치느냐와 연결되겠죠."
사진=영화 `부산행` 스틸컷 - 어린 배우들과도 친하게 지내는데 비결이 있을까요.
"제 스스로 위·아래가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무리 어려도 저한테 호칭을 선생님이라고만 안 부르면 돼요. 설리는 저를 '의성씨'라고 불러요. 설리는 우연히 어떤 친구 술자리에서 소개받아 봤는데 너무 좋아서 친구가 됐어요. 자주 보고 같이 술마시고 놀고 그랬죠. 설리는 친구예요. 지금까지 저에게 한 번도 '선배, 오빠'라고 말한 적 없어요. 항상 '의성씨'라고 불러요. "
- 긴 공백기가 있었죠. 이후 다시 '배우를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원동력은 뭔가요.
"일을 쉴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되게 힘든 시간을 갖기도 했었고. 2011년 초가 그런 시기였는데 경제적으로는 엄청 힘든데 내적으로는 굉장히 좋은, 언밸런스한 시기의 마지막에 아버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 아버지가 연기하길 원했나요.
"아버지는 평생을 실패하면서 산 사람이었어요. 저에게 기대가 컸어요. 어릴 땐 '공부해라', 대학 가서는 '데모하지 말아라', 배우 한다고 했을 땐 '미쳤냐', 직업배우가 된 후에는 '왜 PD들에게 인사하러 안 다니냐'. 평생을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만 하셨죠. 돌아가시기 전 날 병실 침상 위에서 '야, 재미있게 살아라'라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게 저에겐 유언이 됐어요. 그 결과가 배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고요."
- 마음가짐도 달라졌겠네요.
"전에는 날카롭고 불만이 많은 청년이었어요. 항상 '난 여기에 속해있지 않아. 여기보다 더 좋은 곳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야. 나에게 더 잘 맞는 곳이 있을거야'라고 생각했죠. 지금은 이 곳이 제일 좋아요. 인생의 어느 시기로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 아버지가 지금의 배우 김의성을 봤다면 많이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뭐 팔팔할 땐 나에게 그런 힘을 줄 수 있었던 분이 아니라. 그건 아버지 잘못이죠. 진작에 용기를 줬어야지.(웃음) 우리 아버지 그런 명예 되게 좋아하거든요. 상 받았을 때도 '아버지가 진짜 좋아하셨을텐데'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