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아, 윤진서는 나중에 영화 연출에도 손을 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혹은 ‘서예 같은 건 왜 안 해?’ 하하! 무슨 얘기냐면, 윤진서가 영화 외에도 뻗쳐놓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은 거예요. 예체능과 관련된 것들 중에 과연 윤진서가 못하는 건 뭐냐는 거죠. 예를 들면 피겨 스케이팅 같은 거랄지.
A 못하죠, 피겨 스케이팅. 흐흣! (농담으로 얘기한 건데?)
Q 어쨌든 두루두루 재능을 발휘해왔는데, 이건 구혜선 케이스와는 다른 것 같은데, 내재된 에너지가 참 많구나 싶어서…. 막 나와요, 그런 게?
A 네. (심플한 대답일세.) 으흐흐.
Q 내가 너무 몰라봐서 실망한 것 같은데?
A 프흐흐흐…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대답할 게 뭐…. 사실 저는 말보다 먼저 배운 게 피아노였거든요? 일부러 말보다 먼저 피아노를 가르쳐줬어요. (왜죠?) 말이 아닌 언어가 있다는 걸 가르치고 싶으셨나 봐요. 그래서 먼저 피아노를 말과 함께 배웠어요. 세 살 반? 네 살 때부터 피아노에 앉아 건반을 두드렸어요. 선생님이랑 같이. 영재교육 하는 데서. 베토벤 틀어놓고 악보 그리라 그러고. 그러다가 바일올린도 켜고. 그렇게 한 10 몇 년을 살았어요. 너무 싫었어요. 연습하는 거. 하루에 여덟 시간씩. 나는 영화 보고 싶은데. 그때 홍콩 영화에 완전 빠져들었거든요. (그게 중학교 때?) 초등학교 때. 한 번은 너무 싫어서 기절도 한 적이 있었어요. 사람이 정말 미친 듯이 싫잖아요? 그러면 정신이 튕겨져 나가요.
Q 떼쓰고 울부짖다가 그런 게 아니고?
A 아니, 방법 없어요. 방에 갇히면 네 시간 동안 딱 하고 나가야 돼요. 그걸 다 외워서 마치면 그 다음 파트로 넘어가고, 또 네 시간 마치면 다음…. 방법은 없어요. 우리 엄만 이미 돈을 다 냈고, 나는 그걸 하러 가야 되고, 안 가면 두들겨 맞고…. (씁쓸한 웃음.) 가기 싫다고 떼쓰고 그런 반항을 할 때는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이었어요. 유치원 때는 장롱 속에도 숨어봤고 침대 밑에도 들어가 봤는데, 그래봤자 걸리면 안 간 거 다 알잖아요.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Q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데 이렇게 컸어요?
A 으히히히힛!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그걸 알았어요. ‘아, 사람이 뭔가를 극도로 싫어하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정신세계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구나.’ 초등학교 2학년 때 그걸 딱 경험한 순간에, 처음으로 기절을 했던 날이었는데, 막 발버둥을 쳤는데 집인 거예요. 순간이동을 한 거예요, 제가. ‘아, 나, 순간이동을 했다’며, ‘타임머신을 타고~’ 하하, 그땐 그렇게 철없이 생각했던 거예요. 정신을 차려보니 집이네? 우와~! 기절이 뭔지 모르니까요, 난 아홉 살이고. 기절해서 내가 여기 와 있구나 하는 걸 인지할 만큼 그런 상황에 있어보질 못한 거죠. 순간이동을 했는 줄 알고 “우와~!” 막 이러고 있는데, “너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아프니?” 이렇게 된 거죠. 그리고는 “어, 이제 정신 차렸으면 다시 학원 가~” 푸하하하핫!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런 좀 서글픈 분위기에서의 박장대소.) 그래서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Q 열심히 하자, 일단?
A 파트 1, 한 악장에 네 시간을 주잖아요. 그럼 두 시간 만에 외우자. 나머지 두 시간은 그냥 하고 싶은 걸 하자.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갔어요. 딱 네 시간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하루 종일 해야 되니까. 그걸 다 외우기만 하면 끝나는 일인 거잖아요? 미친 듯이 두 시간을 집중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 영화를 보러 가고. 그런 식으로 틈만 나면 영화 보고, 자는 척하다가 엄마가 방에 들어가 주무시면….
Q 윤진서가 어렸을 때 그랬다는 게 상상이 안 되네? 되게 흥미롭네?
A 그러면서 고등학교 땐 시를 되게 좋아했어요.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되게 좋아했고. (이해를 돕기 위한 참견: <입 속의 검은 잎> 은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초판 발행한 기형도 시인의 유고 시집이다.) 고등학교 때 영화에 빠져서, 할리우드나 홍콩 영화가 아닌 제3세계 영화에 빠지기 시작했고….
Q 그 시절쯤에, 사춘기 때였겠죠? 앞서 어렸을 적 얘기까지 들은 판이니, 당시의 정서가 약간 염세적이거나…. 왜, 남자들도 그런 거 되게 많거든요? 쇼펜하우어 읽고. 소녀 윤진서도 혹시 그랬었어요?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염세적이거나?
A 염세적이다? 그보다는 좀 비관 쪽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반항하는 청소년기? 세상의 모든 아픔은 내가 다 갖고 있는 줄 알았어요. ‘내가 가장 아픈 애야’ 이렇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장 뤽 고다르의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Q 그래서 책 제목도 그렇게 지은 거예요? (이해를 돕기 위한 참견: 윤진서가 2013년 여름에 낸 산문집 제목은 <비브르 사 비> 다. 장 뤽 고다르의 2005년 작품 제목도 <비브르 사 비> 다.)
A 원래 그 뜻을 되게 좋아해요. ‘비브르 사 비’(Vivre Sa Vie)라는 말도 있고 ‘사브와르 비브르’(Savoir-vivre)라는 말도 있거든요. 그 말들을 되게 좋아해요. 제 발목에 있는 문신도 ‘사브와르 비브르’라는 문신이고. ‘사브와르 비브르’는, 직역하면 ‘삶을 알다’인데, ‘센스, 매너, 인생의 풍류를 알다’, 이런 뜻이에요. 고로 ‘인생을 좀 알다’ 이런 느낌이 들어 있고요. ‘비브르 사 비’는 직역하면 ‘그녀의 일생’인데, ‘자신의 일생을 살다’ ‘자신만의 삶을 살다’ 이런 식으로 의역이 가능한, 프랑스인들은 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그런 말인데, 둘 중 하나로 하고 싶었어요. 되게 좋아하는 의미였고. 근데 지금 내가 몇 살인데 ‘삶을 알다’, 이건 좀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 의미는 책과는 좀 안 어울린다. ‘비브르 사 비’는 ‘자신만의 일생을 살다’. 모두 자신만의 일생을 살아야 되는데 모두가 똑같은 인생을 살기도 하고 뭔가 맞춰 가면서 평준화된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반항하는 심리, 제목을 지을 때 그런 느낌도 좀 있었던 것 같고. 또 출판사 대표님이, 제가 고민하고 있으니까 “그 제목이 어떠냐, 그 제목으로 가자”, 이렇게 얘기해주셔서. 보통 책 많이 팔려면 책 표지에다 자기 사진도 넣고 그러잖아요. 컬러풀하게 해가지고. 제목은 또 한글로 쉬운 제목으로 해야 되고.
Q 그래, <두나's 도쿄놀이> <두나's 런던놀이> 이런 책도 있었죠.
A 그 세 가지를 다 뺀 거죠, 제 책은. 그냥 흰색 바탕에 제가 찍은 흑백…. 제가 대학 때 사진학과 수업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사진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아.) 되게 좋아해요. 풍경 사진을 되게 좋아해요. 풍경이라는 게 꼭 자연 풍경만이 아니라 이런 풍경, 일하는 풍경…. 뭐 그런 사진이 흑백으로 하나 들어가 있고, 제가 그리스에서 찍었던 사진. 그 다음에 자주색으로 ‘VIVRE SA VIE’ 이렇게 돼 있으니까, 흐흐흐, 제가 책을 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