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8년만 첫 사극 영화다. 오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것 만으로도 손현주(55)에게는 의미있는 도전이었다.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김주호 감독)'에서 역사적 인물 한명회로 분해 세조를 쥐고 흔들며 광대들과 판을 벌인 손현주는 왜 이제야 사극을 했나 싶을 정도로, 정말 첫 사극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찰떡같은 캐릭터 소화력을 자랑한다. 낯선 장르? 어려운 역할? 탄탄한 연기력 앞에서는 핑계일 뿐이다.
대단한 본업에 인성은 더욱 훌륭하다. 조진웅은 손현주 인터뷰 장소를 급습해 '볼뽀뽀'를 깜짝 선물로 남긴 채 휘리릭 떠나기도 했다. 후배들이 존경해 마다하지 않는 선배. 손현주는 인터뷰내내 의아할 정도의 겸손함을 표해 눈길을 끌었다. "이제는 각 작품에서 모셔가는 배우일텐데, 불합리함에도 화를 내지 않냐"고 묻자 손현주는 "선택의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 결정은 내 몫이다. 누가 나에게 '연기 좀 해 달라'고 매달리지 않는다. 그럼 어떤 것에도 절대 군말하지 말아야 한다. 짜증내고 화낼거면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배우 손현주의 중심이자, 모든 후배들에게 전달돼야 마땅한 가르침이다.
실제 손현주는 인터뷰 전 촬영에 한창인 KBS 2TV '저스티스' 쪽대본을 정독 중이었다. "이게 방금 날아왔다"며 껄껄 웃은 손현주는 인터뷰를 마친 후 다시 현장으로 달려가야하는 빼곡한 스케줄에도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사이 특별출연까지 소화하며 의리도 지켰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른 순간, 기꺼이 제 몸을 열 개로 만들어내는 배우. 손현주는 믿고 보는 이유다. -완성된 영화는 어떻게 봤나. "과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분명 과포장한 지점들이 있다.(웃음) 하지만 그만큼 볼거리와 즐거움이 풍만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영화적으로 신명나게, 재미있게 봐 주셨으면 싶다."
-출연을 결정지은 이유는 무엇인가. "주인공이라서. 하하. 농담이다. 사극 영화는 처음인데다가 참신하다고 느꼈다. 세조와 한명회가 얽혀있는 미담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실 허구다. '텍스트로 쓰여져 있는 현상들이 영상으로 어떻게 구현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출연을 하면서도 '이게 가능해?' 싶었다. 한명회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사극이 처음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극에 최적화 된 연기였다. "그렇게 봐 주셨다면 정말 감사하다.(웃음) 영화로는 완전 처음이지만 드라마로도 사실상 처음이다. 내가 '일천구백구십일년'이라고 표현하는데, 과거 KBS에서 대하사극을 엄청 많이 만들 때 '삼국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걸 찍으면서 부상도 입고 상처도 많이 받아 사극을 좀 기피했다. 말을 타다 억울하게 밟혔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수 있는데, 대관령에서 전투신을 촬영할 때 감독이 나에게 '어떤 배우가 말을 잘 못 타니 그가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고 있어라'라고 했다. 그래서 잡고 있는데 메가폰으로 '야, 고개 숙여!'라고 하더라. 보이지 말라고. 그러다 말이 움직여 내 말을 밟았고 그대로 발톱이 빠졌다." -부상이 심했겠다. "사극은 물론이고, 드라마 자체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던 때라 노하우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지금이라면 양말도 신고 버선도 신었겠지만 그때는 그냥 추운 겨울에 짚신 하나 신고 있었다. 그러니 밟히자마자 발톱이 빠지지. 아파하니까 감독이 '야, 쟤 치워!'라고 소리쳤다. 발이 아프기도 했지만 마음이 더 아팠다. '사극은 내가 할 것이 아닌가보다' 받아 들었고, 사극이라고 하면 일부러 도망다녔다. 오랜시간이 지나 '광대들'을 만났다. '광대들'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이번에는 위험이 없었나. "있었다.(웃음) 사실 말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었지만, 불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근데 '말을 타고 불에 들어가라'고 하더라. 두려웠다. 훈련된 팀이 불을 다뤘지만 불 자체가 굉장히 뜨거웠다. 잘 붙지 않으니까 기름으로 가스에 압을 줘서 불을 질렀다. CG는 단 하나도 없다. 진짜 불을 지폈고, 내가 말을 타고 그 안으로 들어가 촬영을 했다. 진짜 어마어마하게 뜨거웠다."
-감독에게 양해를 구하지는 않았나. "딱 하나 건의했다. '직접 말 타고 불 속에 들어갈테니, 대신 말을 잡고 있는 분을 보조출연자가 아닌 숙련된 조련사로 바꿔주면 안 되겠냐'고 했다. 나 뿐만 아니라 보조출연자 분의 안전도 대비해야 했다. 근데 현장 자체가 뜨거우니까 못살겠더라. 말도 피부가 굉장히 약하다. 만져보니까 '컷' 소리만 들리면 이미 튀어나갈 준비가 돼 있었다. '누구라도 다치면 안 되는데 다치면 어쩌지'라는 생각만 했다. 심지어 분장으로 붙여놓은 귀는 화기 때문에 녹아서 흘러 내리고 있었다. 목 뒤 쪽에 약간 화상을 입긴 했다."
-감독이 미웠을 것 같다. "미웠다기 보다는 약올랐다.(웃음) 아무리 있어도 '컷'을 안 외치더라. 복화술로 '컷, 컷, 컷!'을 혼자 외쳤다. 물론 감독과 스태프들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단편 영화로 써도 될 정도로 오랫동안 말 위에 올라가 있었다. 겨우 내려갔을 땐 단숨에 감독에게 달려갔다. 따지려는 마음이었다. 심지어 감독이 내가 갔는데도 모니터만 보고 있어서 속상하고 얄미웠다."
-감독은 뭐라던가.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하도 모니터만 보고 있길래 '뭘 그렇게 보고 있나' 싶어 나도 슬쩍 봤다. 근데 화면이 너무 잘 나왔더라. 그림처럼 멋있었다. 원래 내가 좀 단순하다. '어? 그럴듯 하네?' 싶어서 말하려던 모든 것을 다 잊었다.(웃음) 심지어 '한번만 더 해주면 안 되겠냐'는 디렉팅도 바로 받아들였다. 모든 트라우마가 싹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마음 속으로만 멱살이 잡고 싶었지 진짜 잡으면 다음에 안 써줄 것 같아서 참은 것도 있다. 하하."
-감독의 스타일은 어땠나. "김주호 감독의 장점이 배우의 말을 굉장히 잘 들어준다는 것이다. 가끔 '이게 더 좋은 것 같은데?' 하면 그 절충안을 귀신같이 찾는다.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한번 더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불러 주려나 모르겠다.(웃음) 근데 내가 또 하라면 하라는대로 하는 사람이라 캐릭터가 아주 안 맞지 않는 이상 안 부를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전 5시 반까지 나오라고 하면 '아우, 예~' 하면서 4시 반에 나간다.(웃음) 아침 못 먹고, 잠 못 자도 별 불평없이 잘했다."
-한명회와 세조는 실존 인물이다. 실제 역사 사료를 공부하기도 했나. "안 할 수 없었다. 팩션 사극이라고 해도 한명회가 어떤 인물인지는 명확하게 알아야 했다. 본인이 죽지 않기 위해 독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파내면 파낼 수록 꼼꼼한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광대들'은 정통 사극이 아니고,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보니 표현 자체를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더라. 절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