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배우일까'에 앞서 '어떤 사람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먼저 되새기게 만드는 존재감이다. 2011년 데뷔 후 약 10여 년간 활동했지만 인터뷰를 통한 직접적인 만남 또한 처음. 친근함과 신비로움, 설레임과 긴장감을 동시에 자아내는 배우 김새벽(35)이다.
글로벌 59관왕을 달성한 영화 '벌새(김보라 감독)'로 제5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우조연상을 품에 안았다. 왠지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할 것만 같은 이미지로 익숙했지만,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쉽게 입을 떼지 못한 채 울컥했던 얼굴은 의외의 인간미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 날의 기억은…. 그냥 '멍' 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렴풋이 기억은 나는데 솔직히 명확하지는 않아요. 정신차리는데 시간이 좀 걸렸고, 이후 수상 영상도 차마 돌려보지 못했거든요. 트로피는 여전히 역시나 참 무겁네요.(웃음)"
김새벽을 애정하는 팬들은 종종 김새벽을 '무채색'에 비유하지만 김새벽은 1초의 고민없이 "무지개!"를 외쳤다.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을 모두 담고 싶은 배우, 계속 보고싶은 배우가 되길 희망한다'는 솔직한 바람이다. "방금 전까지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전 멀었어요"라며 꺄르르 터트린 미소도 해맑다. 조근조근 '인간 김새벽'에 대해 하나 둘 꺼내놓은 대화들은 수채화 같은 분위기 속 한편의 수필집을 보는 듯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사이 엿보인 의외의 엉뚱함은 혼자 알기엔 너무나 아까운 매력으로 빛났다.
묵묵히 활동하며 '독립영화계 여신'으로 자리매김했고, 최근 대형 소속사에 새 둥지를 틀며 변화를 꾀할 준비도 마쳤다. 막연히 '사랑받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배우 세계에 발을 들였던 김새벽 스스로 일궈낸 성과다. "연기는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서 '이 놈 봐라?' 싶은 오기로 욕심이 자꾸 생겨요. '지금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이젠 노력 좀 하고 살아라'라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전 활짝 열려 있습니다" 장마전선이 급부상하기 직전 눈부시게 화창했던 어느 날, 해질녘의 따뜻한 오후까지 맥주 한 모금과 함께 털어낸 김새벽의 이야기다.
※취중토크①에서 이어집니다.
-'연기가 어렵다'고 여러 번 언급했어요. "이유가 여러가지인데…. 어떤 인물이 그려져 있으면 그것을 마음으로 소화해 캐릭터가 하고자 하는 말들을 고스란히 내뱉고 싶어요. 근데 잘 안 될 때가 있으니까. '모든 신들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시나리오에서 필요한 만큼 적확하게 연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더 다양한 톤의 사람을 연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좋은 연기'에는 사실 답이 없죠.
"욕심이 생기면서 내려놓는 법도 배웠어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연기 역시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거잖아요? 예전에는 '우와!' 하면서 감탄만 했다면 지금은 '저건 어떻게 하는 거지?'라는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제가 더블액션을 잘 못하는데 한동안 더블액션에 꽂혀 계~속 그것만 봤던 때가 있었어요. 근데 어느 날 어떤 작품을 보는데 이자벨 위페르의 더블액션이 안 맞는 거예요.(웃음) 당연히 연기는 너무 잘하죠. 작품에 방해가 되지도 않고요. '어? 이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하면서 집착을 조금은 떨치게 됐어요."
-어렵지만 놓지 못하고, 업으로 삼고 있는 특별한 매력이 있을까요. "되게 웃긴데(웃음) 생각해보면 너무 잘 안되니까 동시에 욕심도 생기는 것 같아요. '어? 이 놈 봐라?' 약간 그런 마음 있잖아요. 더 알아보고 싶고, 더 잘하고 싶고. 집에서 쉬고 있으면 그렇게 현장에 가고 싶어요. 제가 연남동에 사는데, 경의선 숲길에서 산책을 하다 보면 촬영을 엄청 많이 해요. '촬영'이라고 쓰여져 있는 남의 현장을 보면서 '와~ 뭐 찍나보다. 와~ 현장이다. 나도 현장가고 싶다' 그러고 있어요. 하하. 그런걸 보면 연기를 좋아하긴 하는 것 같아요. 욕심나는 대상이랄까요?"
-연기, 배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흐흐. 진짜 단순하게, 사랑을 많~이 받고 싶었어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죽는다는 생각을 했는데, '내가 죽으면 내가 살다 갔던 것들을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싶은 거예요. 계기는 그거였어요. '사랑 많이 받는게 뭐가 있지? 연기하는 사람? 아, 그럼 연기를 해야겠다' 순으로 흘러갔던 것 같아요."
-20대 중반,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했죠. "신기해요. 제가 보통 잘 움직이거나 뭔가를 찾아서 하는 편이 아닌데 꽂히면 확 해버려요. 엄마에겐 '취직했다'고 하고 서울에 왔거든요.(웃음) 대학을 졸업할 무렵이라 인턴을 한다는 핑계로요. 마침 서울에 친언니가 살고 있기도 했고 언니 집에 붙어 살면서 버텼는데, 방학이 끝나니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겠더라거요. 그때 집에 편지를 썼어요. '엄마, 난 연기를 할거야.' 우편으로 부쳐서 얼마 후에 엄마가 편지를 받게 됐는데 바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네가 무슨 연기야!'(웃음)"
-누구도 예상 못한 행보였나봐요. "네!(웃음) 엄마뿐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이 놀랐어요. 학교 다닐 땐 발표조차 안 하고 싶어하는 아이였거든요. 영화를 하다 보니 TV에 출연할 일이 많지 않잖아요. 가끔 시상식이나 '방구석1열'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면 TV로 보게 되니까 아는 분들은 '이 사람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인가'라며 의아해해요. 성향 자체가 연기를 하거나 나를 앞세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어요."
-부모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린 작품은 뭔가요. "'줄탁동시'인 것 같아요. 여전히 엄마, 아빠는 조금 불안해 하세요. '잘 할 수 있나.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 하시는거죠. 작품도 편하게 못 보세요. 저는 제가 뭘 하는지 굳이 먼저 이야기 하지 않고요."
-SNS에 '혜성비디오 둘째 딸' 과거를 공개했죠. 배우가 될 운명이었던 걸까요. "하하. 부모님께서 비디오 가게를 하셨어요. 어릴 때 유치원이 끝나면 가게로 가 손님들이 반납한 비디오 테이프 감고, 빌려가면 비닐봉지에 담아주고 거스름돈 받고 그랬어요. 몇몇 손님이 '추천해 달라' 하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거요. 저게 지금 제일 잘 나가요' 하기도 했고요.(웃음) 가게 안에 계속 비디오가 틀어져 있으니까 종일 영화를 볼 수 밖에 없었죠. 사실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 나한테는 비디오가게 딸이었다는 이력이 있어' 굳이 짜 맞추면서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하려고요. 하하."
-어떤 비디오가 기억나나요. "음…. 영화 제목이 기억나지는 않아요. 어느 칸 어느 자리에 어떤 영화가 꽂혀 있는지를 기억해요. 홍콩 영화는 카운터 오른쪽, 새 영화는 TV 뒤에 있었어요. 꽂혀 있는 그 모습이 생생해요."
-사실 하고 싶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연기학원을 몇 개월 정도 다녔고, 영화 관련 정보가 올라오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는데 오디션 공고를 보고 메일을 보냈어요. 그렇게 단편영화를 찍고, '줄탁동시' 오디션도 메일을 보내 성사 됐고요. 시작은 그래요. 관객이 돈을 내고 관람하는 영화를 기준으로 한다면 '줄탁동시'가 데뷔작이 되겠네요. 이후엔 소개를 통해 프로젝트에 합류했어요. '한 여름의 판타지아' 감독님도 주변 지인의 추천으로 만나게 됐고, 그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작품 출연으로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네요."
-홍상수 감독과도 호흡을 많이 맞췄죠. "연출부 스태프 분이 홍 감독님께 제 사진을 보여주셨대요. 감독님이 '한 번 만나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하게 됐어요."
-칸을 비롯해 해외 영화제에도 일찌감치 발을 들였고요. "영화제에 가면 좋은 에너지를 받는 것 같아요. 해외든, 국내든 어디든요. '영화에 관심있고 좋아한다'는 대부분의 목적이 명확한 공간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확실히 힘을 얻게 돼요. '계속 좋은 작품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요."
-서울에 처음 왔을 때 지금의 모습을 예상했나요. "전혀요. 이렇게까지 연기를 계속하고 있을 줄도 몰랐어요. 애초에 제가 그려놓은 뚜렷한 그림이 없었거든요. 일단 눈 앞에 놓인 하나를 하고 그 다음을 생각하곤 했죠.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는 '나랑 너무 잘 맞는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내가 내 재능을 이렇게 발견했구나.' "하하하하. 아니! 아니에요~ 진짜 아니고, 오히려 대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그때는 '대상이 없는 사랑을 받고 싶다' 였다면, 지금은 같이 하는 사람들과 잘 지내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작업하는 것이 우선이에요. 그래서 전 누군가 '새벽씨 같이 작업 합시다'라고 하면 진짜 설레고 너무 좋아요. 꼭 누군가에게 고백받는 것처럼. 엄청난 기쁨을 느껴요. 그래서 계속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러려면 연기를 잘해야 하고. 무한 반복인거죠.(웃음)"
-처음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아무 개념이 없었어요. 그냥 했어요. 그냥, 진짜 그냥.(웃음) 오히려 무언가를 점점 알아가고, 알게 되니까 더 어려워지게 됐죠."
-실제론 여린 모습에 가까운데, 작품에서는 강인한 역할을 많이 맡은 것 같기도 해요. "그런가요. 캐릭터도 완전히 경계를 나누기는 힘들 것 같아요. 노랑과 주황 사이도 있듯이, 하다 보니까 어떤 역할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근데 저는 재미있는 역할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극단적이고 악역 같은 것들이요. 액션도 해보고 싶어요. 지금은 안 해 본 것이 참 많아서 좋아요. 과거에 하고 싶은 게 없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게 그렇게 절망적일 수 없어요. '어떡하지?'라는 생각만 들어죠. 힘 없이 무기력해요. 생각할 시간이 많았을 때여서 더 그랬었나 봐요."
-'벌새' 이후 대중적 스포트라이트를 조금 더 크게 받게 됐어요. 변화를 느끼나요. "다양한 (분야에서) 연락을 주세요. 이전에는 '김새벽은 이런 걸 좋아할 것이다'는 생각들을 하셨다면, 이제는 제가 생각해도 의외의 제안도 다양하게 해주시죠. 좋아요. 저도 의식하면서, 혹은 무의식 중에 제 동굴 안에서 스스로의 한계 같은 것을느낄 수 있을텐데 먼저 제안을 주시면 동굴을 나와 조금 더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잖아요. 감사해요."
-몇 년 전과 비교해 많이 가벼워진 느낌이에요. "솔직히 이전에는 많이 불안했어요.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에겐 시기라는 게 있잖아요. 지금도 아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어요. 다만 얼마 전 다리를 다쳐 제 뜻과 무관하게 집에 계속 누워있어야 했거든요. 코로나19와 맞물리기도 했고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빨리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가 떨고 싶어지더라고요. 아, 다리는 지금 다 나았어요.(웃음)"
-평소 어떤 것에 자극을 받나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진짜 매력적인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너무 좋기도 해요. 그런 캐릭터가 있다는 것,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존경스럽고, 그러한 현장에 있다는 것이 부럽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