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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뜨강' 김소현-나인우, 고구려 왕실 본격 입성 '진짜 전쟁 시작'

'달이 뜨는 강' 북주와의 전쟁에서 이긴 김소현, 나인우가 고구려 왕실까지 잠식할 수 있을까. 30일 시청률 조사 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29일 방송된 KBS 2TV 월화극 '달이 뜨는 강' 13회는 전국 기준 8.7%(2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 시간대 및 월화극 1위 자리를 지켰다. 이날 방송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나인우(온달) 장군의 첫 전쟁인 북주와의 전투가 그려졌다. 역사서를 찢고 나온 듯 생생하고 역동적인 전쟁신이 드라마에서 펼쳐지며 안방극장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먼저 역사적 기록에 상상력을 덧입혀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만든 한지훈 작가의 필력이 돋보였다. 김소현(평강)과 혼인한 뒤, 바보에서 북주를 무찌른 장군이 된 나인우의 성장사를 탄탄하게 그려낸 것. 또한 나인우의 북주 전투 활약 이면에 투항하는 척 적을 안심시켰던 김소현의 지략이 있었다는 설정은 김소현과 나인우의 이미지와도 맞아 떨어지며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대본 속 고구려를 완벽하게 그려낸 배우들의 열연도 인상적이었다. 화려한 액션부터, 섬세한 감정 표현까지 주어진 장면을 120%로 소화해내는 이들의 연기력에 시청자들이 몰입도를 높였다. 특히 백마 탄 공주님이 되어 전장을 누비는 평강의 활약이 김소현이라는 배우가 지닌 카리스마와 맞물리며 더욱 빛을 발했다. 이와 함께 나인우는 "가진이 네가 내 고구려, 나의 나라니까"라는 대사에 온달의 절절한 사랑을 담아내며 큰 여운을 남겼다. 무엇보다 이를 생동감있게 담아낸 윤상호 감독의 연출력이 길이 남을 명장면을 탄생시켰다. 안방극장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스케일이 큰 전쟁신이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더불어 전쟁에서 이긴 고구려 병사들의 함성과 전쟁에서 가족 류의현(타라진)을 잃은 김희정(타라산)의 울음이 동시에 터져나오며 카타르시스와 전쟁의 참혹함을 동시에 전달해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했다. 북주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소현과 나인우는 김법래(평원왕)으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고 공주와 부마로서 입궁했다. 그러나 방송 말미 김법래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한재영(두중서)이 그의 앞에서 태자 박상훈(원)을 죽이려는 계략을 펼쳐 긴장감을 더했다. 외부의 적은 막았지만, 고구려 내부의 본격적인 전쟁은 지금부터다. 김소현과 나인우가 사방의 적이 가득한 고구려 왕궁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이 과정에서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주목된다. '달이 뜨는 강' 14회는 오늘(30일) 오후 9시 30분에 방송된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 2021.03.30 09:33
스포츠일반

실크로드따라 흐른 역사의 강물 사마르칸트를 빚다

중앙아시아 한 가운데 자리한 우즈베키스탄은 ‘섬나라’다. 섬이라는 단어를 바다 뿐 아니라 땅으로 둘러싸인 채 일정한 영역을 가진 지역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설명한다면 말이다. 주위로 카자흐스탄·키르키스스탄·아프카니스탄 등 이른바 ‘~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이슬람어 ‘스탄’으로 둘러싸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바다를 접하지 못한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 나라중 하나다. 그런데 푸른 물결 출렁이는 바다 대신 ‘희망의 바다’가 있었다. 과거 동서양 문물을 전파하던 상인들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될 오아시스를 곳곳에 곳곳에 품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를 바탕으로 곳곳에 문명을 전파하는 실스코드의 허브로 발전, 한 때는 서남아시아 일대를 호령하는 제국을 건설했던 나라가 우즈베키스탄이다. 지금도 실크로드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대표적 도시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다. 사마르칸트는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사람이 모여살며 도시를 형성했다니 그 역사가 4000년을 넘기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에서 남서쪽으로 약 280㎞ 떨어진 사마르칸트는 일찍부터 실크로드의 중간에 위치해 세계 어느 도시 못지않게 번영을 구가했던 곳이다.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을 시작으로 세계 최대의 제국을 형성한 징기스칸, 그리고 이들과 함께 세계 3대 정복왕으로 꼽히는 아밀 타미르까지 이 도시를 거쳐갔다. 사마르칸트를 거치지 않고서는 동서양 어디고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라는 뜻을 가진 우즈벡어 사마르칸트가 이 도시의 이름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일듯 싶다. 지금도 인구 36만여 명의 사마르칸트는 우스베키스탄에서 타쉬켄트에 이은 제2의 도시로 자존심을 이어가고 있다. 사마르칸트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 전부터이지만 정식 도시로서의 기능을 가진 것은 기원전 750년 경이다. 이는 로마의 역사가 시작된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사마르칸트의 역사를 로마와 동일시하고 있다. 특히 아밀 티무르가 자신의 왕궁을 이곳에 두면서 사마르칸트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에 따라 사마르칸트에는 티무르제국 이후 만들어진 유적이 대부분이다. 다만 티무르왕의 사망 이후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감으로 인해 왕궁 대신 영묘나 사원 등만이 남아 있는 점은 유감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티무르왕이 묻힌 구르에미르 영묘, 대상들의 물물교환 장소로 이용됐던 레기스탄 광장과 이를 3면으로 둘러싼 3개의 메드레세(이슬람 신학교) 등이 꼽힌다. 특히 이들은 서남아시아 최고의 아름다움을 갖춘 건축물로 사마르칸트의 상징이기도 하다.시내를 지나다 보면 거대한 옥색 돔을 이고 있는 대형 건물이 눈에 띈다. 구르에미르 영묘다. 1403년 티무르왕은 끔찍히 아끼던 손자 무하마드 술탄이 죽자 1년 6개월 만인 1405년 이 건물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도 같은 해 명나라 원정 도중 고령으로 숨을 거두면서 이곳에 묻히게 됐다. 전통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진 영묘의 돔은 주름이 63개 있는데, 이는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하마드가 숨을 거뒀을 때의 나이로 이슬람에서는 신성시하는 숫자라고 한다. 돔에 63개의 주름이 있는 건물은 이 영묘가 유일하다. 내부는 금으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새겨넣는 등 화려하게 치장했다. 영묘 좌우로는 과거 상인들이 묵었던 숙박 시설이 있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구르에미르 영묘에서 동쪽으로 약 1㎞쯤 가면 ‘모래의 땅’이란 의미의 레기스탄 광장에 이른다. 정면에 서면 쌍둥이처럼 똑같은 건물이 서로를 바라보며 좌우 대칭을 이루고, 정면으로 또 하나의 건물이 이들을 바라보며 멋진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과거 동서를 오가던 상인들이 모여 물물교환을 하던 실크로드 최대의 시장이었으나 울르그렉이라는 학자가 1417년 이슬람 신학교인 메드레세를 세운 이후 그의 후손들이 반대편에 시르도르 메드레세를 만들었고, 정면으로 탈라가리 메드레세가 들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화려하기만 했던 이들 건물은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해 낡고 퇴락했다. 게다가 1966년 지진으로 시르도르 메드레세의 첨탑 하나와 실내 복도가 조금 기울었다. 현재 보수 공사중이지만 적은 예산 탓에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고 한다. 이들 메드레세 내부에 들어서면 기념품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빼곡히 들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역사 유적 내부에 상점이 들어선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현물 교환을 위해 형성된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라는 역사성을 감안하더라도 선조의 혼이 담긴 문화재 관리 방식이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밖에 수십 명에 이르는 타미르왕의 애첩 가운데 한 명인 중국인 비비하눔을 안장한 비비하눔 영묘, 사마르칸트의 4000년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는 아프로시압 박물관 등도 들러볼 만하다. 아프로시압 박물관에는 특히 7세기 벽화가 전시돼 있다. 1965년 발굴된 이 그림에는 이 지역을 다스리던 속지아나국의 바후르만왕을 알현하기 위해 찾아온 고구려 복장의 그림이 있어 눈길을 끈다.비비하눔 바로 옆에 있는 사마르칸트 최대의 재래시장도 돌아볼 만하다. 이 나라 사람들의 주식으로 빵의 일종인 리뾰쉬카, 우즈베키스탄 특산물 가운데 하나인 건과류, 식료품 등을 팔고 있는데, 가격이 생각 이상으로 싸면서도 구입할 때 흥정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마르칸트(우즈베키스탄)=글·사진 박상언 기자 2008.10.21 11:14
스포츠일반

숨겨진 관광 보고 랴오닝을 가다 1

랴오닝성은 우리가 만주라 부르는 중국 동북 지방(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의 경제적 중심지다. 부여 이래 고구려·발해의 영토였고, 중국 최후의 통일 왕조인 청나라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고려 이후 중국과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교류는 이곳을 거쳐 갔다. 아직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랴오닝은 볼거리·먹을 거리·놀거리 등이 풍부한 관광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근 을 비롯해 등 TV 드라마를 통해 소개되면서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4~5일 시간을 내 선양을 중심으로 다롄·단둥 등을 돌아본다면 중국 동북 지방의 새로운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양에 자리한 중국 최초의 라스베이거스식 극장 식당 천환수궁은 중국인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최고의 명물로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일간스포츠(IS)는 랴오닝 지방을 재해석, 4회에 걸쳐 소개한다. 굴뚝 치솟는 만주 벌판/누르하치의 호령은 잠들지 않는다 중국서 다섯번째로 큰 도시 선양 청나라 도읍지로 숨겨진 관광지 선양고궁 등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랴오닝성의 성도인 선양은 청나라 도읍지이자 중국 최대 공업 도시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시 면적은 3495㎢로 서울의 5배 가량 되고, 인구는 약 750만 명이다. 충칭·상하이·베이징·광조우에 이어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중국 동북 지구의 정치·경제·문화·교통·무역·금융·과학·관광 중심지이기도 하다. 연간 선양을 찾는 외국인은 약 20만 명. 동북 지구 최대 도시답게 구석구석 볼거리·먹을 거리·놀거리 등 관광 자원이 풍부하지만 업무차 방문객이 대다수를 차지할 만큼 관광과는 아직 거리가 있는 편이다. ■중국 마지막 통일 왕조의 요람   선양은 17세기 초 만주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후 9년 만에 새 도읍지로 정했던 도시로 그의 아들이자 국호를 청으로 고친 태종이 죽을 때까지 이곳은 만주 일대를 지배한 본거지였다.   이 때문에 선양에는 청나라 초기의 유적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누르하치가 정사를 펼쳤던 선양고궁, 동쪽의 동릉, 북쪽의 북릉 등이 꼽힌다. 동릉과 북릉은 누르하치와 청 태종의 무덤으로 선양고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됐다.   시내에 있는 선양방송타워에 오르면 선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옅은 안개로 시야 확보가 어려웠지만 사방을 돌아봐도 얕은 구릉 하나 보이지 않는 지평선의 연속이다. '만주 벌판'이란 단어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다.   선양은 중국의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새로 들어선 마천루와 아파트 단지가 뒤섞여 있다. 선양고궁은 타워에서 동북쪽, 빌딩숲 사이에서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동쪽과 북쪽에서 황금색 기와 건물을 찾으면 이 또한 동릉과 북릉이다. 황제가 거처하던 궁전이나 무덤만이 갖는 특권이다.   선양고궁은 1625년 짓기 시작해 1636년 완공됐다. 베이징의 자금성에 이어 궁궐로는 두 번째 규모다. 자금성과 마찬가지로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직사각형 형태로 돼 있으며, 청나라 초기의 왕궁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다. 색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만주족의 습성이 많이 반영돼 자금성과 달리 화려하며, 만주족·한족·몽골족의 건축 문화가 혼재돼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300여 칸에 이르는 90여 개의 건물로 된 선양고궁은 원래 모습 그대로다. 전쟁 혹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거나 도시화의 물결에 밀려 헐리는 다른 유서 깊은 건물과 달리 400년 가까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동릉과 북릉의 구조는 비슷하다. 긴 직사각형 형태의 성을 쌓은 후 그 안에 제실을 둔 형태다. 무덤은 제실 뒤에 있는데 동산만하게 흙을 덮은 후 입구는 회를 이용해 봉하는 형태다.   시내에서 약 11㎞ 떨어진 동릉의 원래 이름은 복릉이다. 누르하치와 그의 황후가 잠들어 있는 무덤으로 선양의 동쪽에 있다 해서 동릉으로 불리고 있다. 1629년에 조성하기 시작해 후대 황제들에 의해 여러 차례 수리되면서 정홍문·108계단·융은문·동서배전·대명로 등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누르하치의 아들 청 태종의 묘가 있는 북릉은 동릉에 비해 규모도 훨씬 크고 화려하다. 청조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만들어졌으며, 면적만도 450만㎡에 이른다. 입구를 들어서면 능까지 약 1㎞를 걸어가야 한다. 좌우로 펼쳐진 넓은 인공 호수와 우거진 수풀은 산책로로 더없이 좋다.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정문과 능을 왕복하는 전동 카트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왕복 요금 10위안(약 1250원).   동릉과 북릉은 유감스럽게도 문화혁명 당시 상당한 훼손이 있었다. 당시 홍위병에 의해 건물 대부분이 파괴됐으나 최근 복원됐다. - 170년 역사 만두집·세계 최대 공원 선양공원   선양의 변화는 눈이 부실 정도다. 중국의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번화가의 경우 수많은 상점과 밀려드는 인파 등은 한국과 다를 바 없다. 선양에서는 대표적 쇼핑 거리인 중지에(中街), 중국 최대 시장인 우아이시장, 세계에서 두 번째 규모의 코리아타운 서탑가, 세계에서 가장 큰 공원인 선양공원 등이 가 볼 만하다. ■중지에   선양고궁 길 건너에서 약 1㎞ 이어지는 중지애는 서울의 명동과 흡사하다. 세계 유명 브랜드 매장이 줄지어 있으며, 특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선양의 대표적 요리인 꼬치를 사 들고 길거리에서 먹는 모습은 여기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동쪽 끝에는 170년 된 만두집 라오비앤이 있다. 만두만 36종류에 이르고, 가격은 1인분에 6위안(약 750원)~60위안(약 7500원)이다. ■우아이시장   동대문 주변 상가보다 훨씬 크다. 매장을 둘러보려면 하루 종일 걸려도 부족할 지경이다. 길에는 중국인의 대표적 이동 수단인 자전거가 보관대에 끝없이 보관돼 있으며, 택시 영업을 하는 꼬마 삼륜차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중국 최대의 짝퉁 시장도 이 안에 있다. ■서탑가 미국 LA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상점이 밀집된 지역이다. 과거 선양에는 동서남북에 탑과 절을 지어 경계를 표시했는데, 서쪽 경계인 서탑 일대를 지칭한다. 서탑가의 코리아타운은 일제 시대 서탑 부근에서 국밥 장사로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8명의 독립 지사 부인들의 가게에서 시작돼 이젠 사방 1㎞에 걸쳐 1000여 개의 상점이 영업 중이다. ■선양공원   동릉공원에서 자동차로 약 10분 정도 동북쪽으로 더 가면 닿는다. 넓이만도 245㏊에 이른다. 지난해 세계원예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설치한 세계 주요 국가의 정원, 공원의 랜드마크인 백합탑, 우거진 수풀과 호수공원 등 볼거리가 많다. 셔틀버스가 상시 운영되는데 20위안(약 2500원)을 내면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다. 선양=글·사진 박상언 기자 2007.06.19 09:09
스포츠일반

연초록 `잎새 터널` 타고 1500년 전 백제 꿈 새록새록

`계절의 여왕` 5월도 어느덧 중반이다. 지난 주말(6일)이 여름으로 들어선다는 입하였으니 이젠 새로운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할 참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먼저 계절의 변화를 읽는 혜안을 가진 이가 바로 식물이다. 화려한 꽃송이로 봄을 알리더니 이젠 앙징맞은 잎사귀를 내놓았다. 때마침 신록이 아름다운 웅진 백제의 고도 충남 공주를 찾았다. 계룡산 동학사와 웅진성이 있었다는 공산성은 명성 그대로였다. 아득한 옛날 첫삽을 떴을 때에도 이런 모습이었으려니 하는 생각을 품으니 5월이면 변함없이 찾아오는 신록은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된 양 아득한 옛날로 안내하는 듯했다. ■계곡물에도 물든 신록의 소나타“봄 동학사 가을 갑사”라는 말이 있다. 물론 마곡사의 봄도 빼어나지만 계룡산 동학사의 그것도 못지않다. 이로 인해 동학사의 이맘때 풍경은 ‘계룡 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동학계곡 신록의 감상 포인트는 일주문을 지나야 만날 수 있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계룡산 동학사 매표소 직원의 설명이다. 실제 일주문을 지나니 앞을 완전히 가로막을 듯 울창한 수림이 펼쳐졌고. 그 사이로 동굴처럼 길이 보였다. 길 옆에는 자연성능. 쌀개봉 능선. 장군봉 능선. 황적봉 능선 등 계룡산을 대표하는 능선에서 흘러내리는 동학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숲은 성긴 잎 사이로 하늘이 보였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완전한 ‘잎새터널’을 이룰 것처럼 울창했다. 사찰까지 이르는 약 2㎞의 길을 따라 다양한 종류의 잎새가 신록을 뽐내고 있는데 얼마나 싱그러운지 느티나무·신갈나무·소나무 등 일부밖에 알아보지 못하는 짧은 지식도 솟아나는 앤돌핀을 막지 못했다. 이양하는 자신의 수필 에서 “이즈음 신록은 우리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고 역설했다. 실제 신록이라는 ‘젊은 피’로 온몸을 닦아 내니 모든 욕망과 굴욕. 고통과 곤란이 모두 사라지고 그 빈 자리에는 별·바람·하늘·풀이 기쁨과 노래를 갖고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동학사에서는 계룡산 신록의 장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동학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전통 강원이다. 학인 스님들이 수행자로서 거듭나기 위해 4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닦는 승가대학이다. 1860년 이후 150명의 스님을 배출했다고 한다. 때마침 방학이어서 동학사 주지 요령스님이 평소 닫혀 있던 산문의 문을 열었다. 그 가운데 졸업반 학승들이 공부하는. 절 맨 뒤편 가장 높은 곳 실상료로 안내했다. “잘 봐 둬. 여기서는 계룡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어.” 과연! 이런 곳이 존재하다니. 왼쪽 문필봉(796m)으로 시작해 관음봉(765m). 자연성능. 삼불봉(775m). 그리고 그 뒤 최고봉 천왕봉(845m)이 연한 초록옷을 입은 채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아마 녹음이 짙은 여름이었다면 이런 감동은 덜했을 듯싶었다. ■무령대왕을 만나다 공주 공산성은 1500여년 전 쌓은 성이다. 백제의 최고 융성기로 꼽히는 무령대왕 시절에 이 성은 백제의 수도였다. 곳곳에 당시 흔적이 남아 있다. 금강변 해발 110m 능선에 쌓은 공산성은 동서 약 800m. 남북 약 400m. 둘레는 2660m가량 된다. 강 건너에서 보면 성 전체가 담록(淡綠)을 띠고 있어 아무리 보고 있어도 눈이 피로하지 않다. 공산성 관람은 금서루에서 출발한다. 금서루를 지나 오른쪽 언덕을 오르는 길은 ‘무령왕이 걸었던 길’로 불린다. 지금은 말끔하게 포장돼 있지만 1500년 전 무령왕이 오가며 정사를 돌봤던 현장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그 길을 따라 오르니 넓은 잔디밭이 나온다. 백제 왕궁 추정 터이다. 한쪽에는 돌로 정교하게 지은 연못터도 있다. 이곳에 왕궁이 있었음이 분명하다고는 하나 정확한 자료가 없어 추정 터로 부를 뿐이다. 공산성은 가볍게 눈도장만 찍어도 한 시간은 족히 필요하다. 성곽을 따라 걸어도 좋고. 이곳저곳 기웃거려도 상관없다. 곳곳에는 한층 물이 오른 민들레가 홑씨를 흩날리고 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푸른 잎으로 따가운 햇살을 가리면서 살랑살랑 땀을 식혀 준다. 웅진 백제는 한성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공으로 죽게 되자 475년 문주왕이 남하해 도읍을 웅진으로 정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삼근왕→동성왕→무령왕에 이어 성왕이 538년 사비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웅진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시기가 웅진 백제이다. 그 도읍지가 지금의 공산성 자리다. 당시 웅진성이란 이름의 토성이었으며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고려 때 공산성으로 바뀌었다. 조선 인조 후에는 쌍수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백제 왕궁 추정 터에서 북쪽으로 보면 쌍수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그 자리에는 원래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해 있을 당시 이 나무 너머 북쪽 한양을 바라보며 ‘난리가 하루빨리 끝나야 할 텐데’라며 시름에 잠겨 있을 무렵 난이 평정됐다는 낭보를 들었다. 왕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 두 그루의 나무에 벼슬을 내렸고. 그때부터 쌍수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조선시대 벼슬을 받은 나무는 이 두 그루와 속리산 정이품송 등이 있을 뿐이다. 두 그루의 나무가 수명을 다하고 죽자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워 그 뜻을 잇고 있다. 공주=글.사진 박상언 기자 2006.05.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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