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김식의 야구노트] 선수의 존재 이유는 팬, 무관중이라 더 절감
몇 년 전 “팀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묻자 한 프로야구 선수가 답했다. “구단 홈페이지가 없으면 됩니다.” 그 말에 동의할 순 없었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에는 선수와 감독·코치·구단에 대한 감정적 비난이 넘쳐난다.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까지 물어뜯는다. 소수라도 목소리가 크다. 프로야구는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다. 미움도 많이 받는다. 2010년 이후 KBO리그 경기력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반면 선수 몸값은 계속 올랐다. 사인 한장 해주는 걸 귀찮아하는 선수가 꽤 된다. 야구 스타에 대한 동경이 전과 같지 않다. 많은 선수가 ‘악플보다 무플이 낫다’고 생각했다. 2020년 5월 5일은 출범 39년째인 KBO리그 선수와 팬이 가장 멀리 떨어진 날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개막이 예정보다 38일 늦었다. 그래도 어린이날의 야구는 기적 같았다. 야구 종주국 미국, 선진국 일본이 리그 일정조차 잡지 못한 상황에서 KBO리그를 생중계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야구 개막 매뉴얼을 받아갔다. 미·일 야구를 쫓아가던 KBO리그는 자부심을 느낄 만한 과정이었다. 리그 구성원 모두의 헌신 덕분이다. KBO 사무국은 정부의 방역 방침을 따르면서도 매주 회의를 열어 코로나19 대응책을 마련했고, 개막을 준비했다. 구단과 선수단에서는 단 한 명의 확진자도 나오지 않았다. 개막전이 열린 5개 구장 관중석은 텅 비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생활 방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무관중으로 경기했다. 팬은 경기장을 찾는 대신, TV 중계를 보며 인터넷에 모여 야구를 즐겼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선수와 팬의 ‘심리적 거리’는 근래 들어 가장 가까워졌다. 선수들은 텅 빈 관중석을 보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되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보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빠른 투구도, 아무리 큰 홈런도 ‘그깟 공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것으로 믿는다. 관중석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팬이 내지른 ‘침묵의 함성’이 온라인에서 뜨겁게 퍼졌다. 여기에 KBO리그 특유의 발랄한 아이디어가 더해졌다. SK는 ‘무관중’을 빗대 플래카드에 무를 그려 좌석에 배치했다. KT는 어린이 회원이 투명 볼 안에 들어가 비접촉으로 시구했다. 개막을 앞두고 2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미디어데이 행사는 ‘덕분에 챌린지’로 시작했다. 코로나19와 싸움에 앞장선 의료진에 대해 감사를 전했다. 어린이날 개막을 성공적으로 끝낸 선수들이 고마워할 대상은 더 있다. 리그 축소가 불가피한 미국·일본은 선수 연봉을 삭감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KBO리그는 ‘재난 상황’이 아니다. 팀당 144경기를 예정대로 치러 수입 감소를 최소화하려고 KBO와 구단이 노력 중이다. 팬들이 야구를 봐줘야 선수는 ‘재난 상황’을 맞지 않는다. 야구팬도 KBO리그를 다시 볼 기회를 얻었다. 못마땅할 때가 있어도, KBO리그는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콘텐트다. 관중석이 열리면 빨리 응원하러 가고 싶다는 이들이 많다. 미국 팬도 어느 팀을 응원할지 고민하고 있다. 마침 개막전에서 실책(5개 구장 3개)은 별로 없었고, 수준 높은 플레이가 많이 나왔다. 적어도 지금은 ‘국뽕 야구’에 취해도 좋겠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2020.05.07 0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