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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축구 대부' 김용식 선생 탄생 110주년, 추모 분위기는 없다

7월 25일은 한국 축구 역사에서 특별한 날이다. '한국 축구 대부' 고(故) 김용식 선생의 탄생일. 2020년. 올해로 110주년을 맞이했다. 김 선생은 축구 인프라가 전혀 없었던 한국에 축구의 기틀과 발판을 마련한 1세대 영웅이다. 1910년 7월 25일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일본 대표로 선출돼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나라 뺏긴 설움을 조선인의 우수성으로 달랬다. '축구계의 손기정'이라 불리는 이유다. 일본은 김 선생의 축구 경쟁력을 추앙했고, 김 선생의 핵심적 역할 덕에 8강에 오를 수 있었다. 광복 후 선수로서 1948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다. 한국 축구가 본선에 나선 첫 번째 올림픽. 김 선생이 주장으로 중심을 잡은 한국은 멕시코 5-3으로 꺾고 8강에 오르는 저력을 보였다. 1951년에는 한국 최초로 국제축구연맹(FIFA) 국제심판 자격을 획득했고, 42세던 1952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축구 선수는 40세 이상 현역 생활을 해야 한다며 '1만일 훈련'을 강조했던 그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킨 진정한 축구인이었다. 은퇴 후 더 많은 업적을 쌓았다. 지도자로서 역사는 더욱 찬란했다. 한국 최초의 월드컵 진출인 1954 스위스 월드컵을 감독으로 이끌었다. 1960 한국 아시안컵에서는 한국의 우승을 일궈냈다. 이후 1960년 로마 올림픽 예선 감독, 1962년 칠레 월드컵 예선 감독,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 감독 등을 역임했다. 1968년 양지축구단 감독으로도 활약했으며, 1980년에는 국내 1호 프로 팀인 할렐루야 감독으로 부임했다.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나마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 스위스 월드컵 당시 김 선생이 던진 이 말은 한국 축구의 명언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75세였던 1985년 3월 5일 타계했다. 체육훈장 맹호장이 수여됐고, 2005년에는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김 선생의 이런 열정과 노력의 결과가 훗날 2002 한·일 월드컵 4강,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그리고 K리그의 안착과 발전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한국 축구 발전에 평생을 바친 선구자. 이런 영웅은 영원히 기억돼야 마땅하다. 김 선생 탄생 110주년을 맞아 제자였던 조정수 축구 원로에게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서울시축구협회 부회장, 대한축구협회 상벌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조 원로는 "선생님 인생에서 축구를 빼놓는 일은 없었다. 축구 외에 아무 것도 몰랐던 분이다. 그때 당시에 영어까지 잘 하셨다. 선수로서도 위대했지만 지도자로서는 정말 한국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선수들을 효율적으로 교육하고 좋은 선수로 만드는 이런 모습은 지금 현재 축구 지도자들도 배워야할 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을 많이 길러내셨다. 후배 양성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으신 분"이라고 회상했다. 아직까지도 일본에서는 김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조 원로는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사람들하고 섞여 나가셨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한 일본 선수가 나에게 '내가 골을 넣은 것은 김 선생 덕분이었다. 정말 감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최근에도 일본 요미우리의 한 방송국에서 김 선생님 묘소까지 와서 영상을 담아갔다. FIFA에서도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김 선생님에게 선물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정작 한국에서는 김 선생의 추모 분위기를 느끼기 힘들다. 탄생 110주년을 기리는 그 어떤 기념식, 행사도 없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가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최근 10여년을 돌아봐도 김 선생을 추모하는 움직임은 한국에서 볼 수 없었다. 10여 년 전에는 그나마 각종 추모 사업, 기념 사업 등 이야기가 공론화된 적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도 지금은 싹 사라진 상태다. 지난 22일 일간스포츠는 김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포천의 서능추모공원(광릉추모공원)을 찾았다. 추모공원 관계자는 "김용식 선생 묘소는 대한축구협회가 관리한다. 예우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그게 다였다. 묘소는 관리인의 안내가 없으면 찾을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누구나 쉽게 다가 갈 수 없는 상황이다. 묘소엔 긴 풀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묘비에도 긴 잡초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국 축구 역사 그 자체인 그를 현재 한국 축구가 외면하는 모습이다. 한 축구인은 "올해도 어떤 추모 계획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동안 김용식 선생 기념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다. 동상을 세우느니 말만 많았다. 행동으로 실행된 건 없다.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런 부분을 대한축구협회가 앞장서서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최용재 기자 choi.yongjae@joins.com 2020.07.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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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 역대 최장기간 A매치 출전 1위-최고령 출전 2위가 보인다

이동국(전북 현대)이 한국 축구 새로운 역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현재 이동국은 지난 2014년 10월 14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코스타리카와의 친선경기 출전으로 A매치 최고령 출전 역대 10위(35세 168일)를 기록 중이다.이동국이 오는 31일 이란과의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9차전 이란전에 출전할 경우 순위는 역대 2위로 올라간다. 38세 124일이다.역대 1위는 고 김용식 선생의 39세 274일이다. 1910년 7월 15일생으로 1950년 4월 15일 홍콩에서 열린 홍콩 대표팀과의 친선경기 출전했다.현재 역대 2위는 김병지의 37세 298일이다. 1970년 4월 8일생으로 2008년 1월 3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칠레와의 친선경기 출전했다.또 이동국은 이란전에 출전할 경우 역대 최장기간 대표팀 A매치 출전 1위 기록(19년 107일)한다.현재 최장기간 1위는 이운재의 16년 159일의 이운재다.최용재 기자 2017.08.1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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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클럽 초청사, 한국축구 변방에서 중심으로

해외 명문 클럽의 방한사(訪韓史)를 보면 한국축구의 발전이 보인다. 축구 변방에 머물던 한국축구는 명문 클럽의 주축 선수를 배출할 정도로 성장했다. 독일 분데스리가의 바이엘 04 레버쿠젠이 3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FC서울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대표팀 공격수 손흥민(22)은 레버쿠젠의 대표 선수로 성장해 한국을 찾았다. 이 친선경기는 LG전자가 레버쿠젠을 초청해 이뤄졌다. 해외 유명 클럽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팀은 1961년 브라질 마두레이라(현 3부 리그)였다. 이후 53년 동안 한국축구는 꾸준히 성장했고, 명문 클럽이 한국을 찾는 이유도 변했다.◇ 대표팀 전력의 리트머스지(紙)해방 후 한국축구의 사정은 열악했다. 축구만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던 시절이다. 이런 시절이던 1961년 당시 브라질 1부리그에 있던 마두레이라가 아시아투어를 왔다. 일본과 한국을 거쳐 홍콩에서 친선전을 가지는 일정이었다. 故 김용식 선생이 이끌던 한국 대표팀은 마두레이라에 2-4, 0-2로 완패하며 세계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이후 대한축구협회는 해외 명문 클럽을 초청해 대표팀의 전력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지(紙)로 활용했다. 1970년 포르투갈의 명문 벤피카가 한국을 찾았다. 1970년 도쿄 엑스포 때문에 일본이 벤피카를 초청했는데, 바로 다음에 한국까지 거쳐갔다. 1972년에는 펠레(74)가 뛰는 산투스가 일본을 경유해 한국을 찾았다. 이때 대한축구협회에서 당시 돈으로 3만 달러(약 3000만 원)나 되는 거액의 대전료를 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에도 뒤셀도르프(1984년)·도르트문트(1984·1990년)·레버쿠젠(이상 독일·1994년)과 AC밀란·유벤투스(이상 이탈리아·1996) 등 명문 클럽이 한국 대표팀과 평가전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역사 바꾼 차붐·박지성…그리고 손흥민차범근(61) SBS 해설위원이 한국인 최초로 유럽 무대에 진출한 뒤 명문 클럽이 방한하는 이유는 서서히 달라졌다. 독일 분데스리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1979년 우승팀 함부르크SV(독일)가 방한했고, 이듬해에는 중앙일보가 초청해 프랑크푸르트가 차 위원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프랑크푸르트는 한국 최초의 프로구단으로 발전한 할렐루야와 평가전을 가지기도 했다. 프랑크푸르트를 초청한 주체가 축구협회가 아니라 언론사인 중앙일보라는 점도 눈에 띈다.한동안 끊겼던 한국선수의 유럽진출을 2003년 박지성(33)이 이었다. AC밀란·유벤투스의 방한 뒤 명맥이 끊겼던 명문 클럽의 방한도 다시 이어졌다. 박지성이 진출한 네덜란드의 PSV 에인트호번 등이 2003년 피스컵에 초청됐다. 200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박지성은 2007년 다시 소속팀과 함께 방한했다. 당시 6만 명이 넘는 관중이 맨유에서 뛰는 박지성을 보기 위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가득 메웠다.박지성이 은퇴한 2014년, 독일의 명문 레버쿠젠이 손흥민을 앞세워 방한했다. 지난해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손흥민은 팀의 간판으로 성장했고 이날 4만6722명의 관중을 불러 모으며 자신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 2014.07.3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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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의 사커블로그] 발로텔리, 게으른 천재의 기로에 서다

맨체스터 시티의 마리오 발로텔리(20)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유망주다. 189㎝·89㎏의 당당한 체구에 스피드와 결정력을 지닌 스트라이커다. 이탈리아 인터 밀란에서 뛰던 발로텔리는 올 시즌을 앞두고 맨 시티로 이적했다. 맨 시티가 발로텔리 영입을 위해 지불한 이적료 2400만 파운드(약433억원)는 그의 성장 가능성을 말해준다. 하지만 발로텔리는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인터 밀란 시절 훈련을 게을리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많았고 수비가담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장 마테라치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이에 무리뉴 감독은 발로텔리에게 유소년 팀으로 내려가라는 지시를 내린 적도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지난 10월 발로텔리는 이탈리아에서 운전 중 여성 교도소 무단 침입을 시도해 말썽을 일으켰다. 맨 시티 훈련 중에는 제롬 보아텡과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발로텔리의 재능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는 분명 축구 천재들만이 갖는다는 '축구 DNA'를 지니고 있다. '신이 잉글랜드에 내린 선물'로 불렸던 폴 개스코인은 폭음과 약물중독으로 재능을 펼쳐보지도 못했고, 브라질의 '황금왼발' 아드리아누도 문란한 사생활로 우울한 축구 말년을 보내고 있다. 유럽 뿐만이 아니다. 한국 축구의 대부로 알려진 고 김용식 선생과 동갑내기 스타였던 김영근도 술과 여자에 빠져 일찍 선수 생활을 접었다. 발로텔리는 현재 '축구영웅'과 '사라진 천재'의 갈림길에 서 있다. 2010.12.0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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