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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일반

[박수성의 How are you] ‘돌주먹’ 복서 문성길

그를 만난 곳은 강동구 성내동 둔촌역 근처 한 건물 4층의 당구장이었다. 당구대 8대를 갖춘 당구장을 그는 6개월전에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오후 3시께라 인터뷰 하는 내내 손님이 없었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에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쉰이 되는 그의 손은 아직도 굳은 살이 군데군데 박히고 억셌다.그의 별명은 '돌주먹'이었다. 경량급에서는 보기 드문 강펀치 한 방으로 현란한 풋워크와 잔재주를 앞세운 아웃복서들을 보내버리곤 했다.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평가받던 라이벌 허영모와 대결에서도 세 번 붙어 모두 이겼다. 그 중 두 번의 경기는 박빙이었다. 문성길(48). 호적이 2년 늦은 63년으로 돼있어 나이 때문에 곡절도 많았다는 그는 어느덧 지천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강촌에 살고 싶다'그의 애창곡은 '강촌에 살고 싶어…가 들어가는 노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주먹 하나로 돈 벌어 '먹는 것 걱정 안하고 산다' 할 정도의 경제력을 일궈낸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이제는 아무런 욕심도 없다. 그냥 쉬지 않고 열심히 움직여서 가족들과 웃으며 사는 것이 행복하다.6개월전 당구장을 인수했는데 벌이가 시원치 않단다. 물론 당구장이 전부가 아니다. 중계동, 구리, 서산 등 4곳의 롯데마트에 철판볶음밥 가게를 내 운영하고 있다. 벌이가 먹고 살 정도는 된다. 아내가 주로 운영하고 자신도 일손이 딸리면 틈틈히 도와준다. 아들은 중국에 유학가있고 딸도 대학생이다. 강동 쪽에 널찍한 아파트도 장만했다. 돈을 많이 모으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런 것 까지 다 얘기해야 혀?"하며 웃는다.역시 쉽지 않았던 은퇴 후그는 WBA 밴텀급에 이어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한 90년부터 당시 모 제약회사의 스폰서십을 받아 활동했다. 트렁크에는 제약회사의 글씨가 큼지막하게 박혔었다. 은퇴 후 평생 이사직을 보장한다던 그 회사는 그러나 정작 93년 은퇴 후 말을 바꿨다. 대리 옆에 옹색한 자리를 만들어 놓고 일도 주지 않았다. 가끔 입금표나 몇장 써보라는 게 전부였다. "사회 생활도 배울 겸 3년만 꾹 참고 있자"고 마음 먹었고 꼭 3년 후 사표를 쓰고 나왔다. 세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이 때 뼈저리게 느꼈다.이후 모 언론사 광고지사에서 3개월을 근무하다 내 일이 아니다 싶어 나왔고 그 후 몇년을 방황하다 90년대 후반 철판볶음밥이 한참 유행하던 때 지인의 소개로 체인점을 알게 됐다. 잠실 롯데마트에서 첫번째 체인점을 내 일을 배웠고 장사가 잘돼 체인점을 4개로 늘렸다. 그 와중에 사업 제의도 여러번 받고 몇번 소소한 돈을 떼이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내 힘으로 버는 일 아니면 믿지 말자"는 소신을 지키며 그런대로 돈 관리를 잘 해왔다. 마지막 두차례 방어전의 대전료 1억여원을 소속 프로모션으로부터 받지 못한 일, 병역특례 혜택 의무 기한을 지키지 못해 현역 입대한 것 등 주변과 국가에 대한 서운함과 불신이 '돌 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신중한 생활을 하게 했다. 2000년에 강동구 성내동에 '문성길 복싱클럽'을 내 5년 동안 운영하며 키웠지만 그는 2005년 자신을 도와줬던 후배에게 넘겼다. 수원, 부산 등지에 자신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건 복싱클럽이 몇 군데 있지만 직접 운영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 권투 쪽은 그만 할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 진한 회한이 묻어났다. 올림픽과 10차 방어전 실패가 한으로 남아 프로와 아마에서 모두 정상에 섰던 그가 지금도 가장 아쉬워 하는 것은 올림픽 메달을 못 딴 것과 10차 방어전 실패다. 올림픽보다 어렵다는 세계선수권(86년) 금메달을 따고 아시안게임 메달 2개까지 딴 그였지만 84년 서울올림픽에서는 8강전에서 무너졌다. 확실한 금메달감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1회에 의외의 카운터펀치를 맞은 뒤 경기가 안 풀렸다.WBC 10차 방어전은 더 아쉽다. 호세 루이스 부에노에게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고 홈어드밴티지까지 있었지만 일본세의 입김에 눌려 이긴 경기가 판정패로 돌변하고 말았다. 10차 방어전을 성공하면 통합 타이틀전을 열기로 약속이 된 터라 억울함이 더했다. 문성길은 "당시 대전료를 확실히 주겠다는 약속만 있으면 체급을 올려 3관왕에 도전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이젠 큰 욕심없이 살고 싶다"고 말했다. 권투하고싶어 6개월간 학교 안 가고 버텨문성길이 권투를 시작하기까지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중학교 시절 육상을 했던 문성길이 전남체고(현 광주체고)를 떨어지고 재수를 하던 때였다. 후배로부터 덕인고에서 육상과 권투 특기생을 함께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면접에서 "권투를 하고 싶다"고 했으나 "육상을 하지 않으면 장학금 혜택을 줄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고민끝에 입학을 결정했다. 중장거리가 주종목이었던 문성길은 고1 시절에는 3000m, 5000m 등 종목에서는 목포권에서 1위를 휩쓸었다.고2때 까지는 육상이 끝난 후 몰래 체육관을 다니면서 권투 연습을 했으나 더 미룰 수는 없었다. 고2때 말에 권투에 전념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퇴짜를 맞은 후 6개월 학교를 안나가며 버틴 끝에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이후 전국대회 3위 성적을 6번 내며 목포대에 진학한 후 대학 1학년때 뉴델리아시안게임에서 뜻밖의 금메달을 기록하며 이름을 알렸다. 당시 그를 빛나게 해준 결승전 상대가 태국의 '완차이 풍수리'였다.86 아시안게임 직후 문성길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7000만원대의 계약금을 받고 프로로 전향한다. 빨리 돈을 벌고도 싶었고 껄끄러웠던 상대인 허영모의 존재도 프로행 선택의 한 이유가 됐다. ■ 문성길은? 생년월일: 1961년 7월 20일(호적엔 2년 늦은 63년) 출생지: 전남 영암 체격: 166㎝, 66㎏ 학력: 도신초-도포중-덕인고-목포대-동국대 경영학과 수료 경력: 82년 아시안게임 금  85년 월드컵 금   86년 세계선수권·아시안게임 금   87년 프로 데뷔  88년 WBA 챔피언(밴텀급·2차방어 성공)   90년 WBC 챔피언(슈퍼플라이급·9차방어 성공)  93년 은퇴 가족: 김명자(48)씨와 1남(재광) 1녀(가은) 취미: 골프, 볼링 박수성 기자 ▷ 체조 은메달리스트, 여홍철▷ 96년 유도 금메달 리스트, 전기영▷ 금메달 6개 여자 ‘신궁’, 김수녕▷ 실업배구 원조 스타, 장윤창▷ 경량급 복싱 신화, 장정구 2009.09.03 09:31
생활/문화

[박수성의 How are you] 체조 은메달리스트, 여홍철

"체조를 시작하면서 운동을 그만두면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체조로 유명해지다 보니 어쩌다 한 단계 높아졌네요.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체조와 국민들의 성원에 감사하고 그만큼 체조를 사랑합니다."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여홍철(38). 한국 체조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목전에서 놓쳤던 여홍철은 카메라 앞에서 굵은 눈물을 흘려 국민들의 마음을 짠하게 했다. 당시 그는 외신기자 인터뷰에서 "3등이 목표였는데 2등을 했다면 좋다. 하지만 나는 1등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다"고 말해 풀리지 않는 억울함을 그대로 표현했다. 그는 현재 경희대 체육학부의 스포츠지도학과 교수로 있다. 2003년 9월 임용을 받았으니 내달로 딱 만 5년이다."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가장 아쉬웠다"대부분의 스포츠팬들이 올림픽 은메달을 따던 96년의 여홍철을 기억하지만 그가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다. 기술 완성도에서 가장 높았던 시기가 이때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운은 계속됐다. 당시만 해도 종목별 개인전의 경우 단 한차례 예선으로 결승 진출자를 가렸다. 그러나 그는 예선에서 작은 실수로 0.0몇점이 모자라 9위에 머물렀고 결국 금메달에는 도전해보지도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 단 한차례 연기로 결승 진출자를 가리기 때문에 난이도 높은 기술을 쓴 선수들이 이상하게 줄줄이 탈락하고 말았죠. 결승전에 오른 선수들 연기를 보고 있는데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저기서 뛰고 있으면 금메달은 내건데…" 결국 국제체조연맹은 실력 좋은 선수들이 초반 탈락하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2004년 아테네올림픽부터 예선에서 두 번의 연기를 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유난히 도약지점부터 착지 지점까지 거리가 길었던 여홍철 때문에 '거리 가산점'(4m 이상)이 생긴 것과 함께 여홍철이 '체조 룰'을 바꾼 두 가지 사례다. "아내 덕에 교수 꿈을 키웠죠."체조를 시작할 때부터 그는 막연히 중·고등학교 선생님을 꿈꿨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고 은퇴할 때도 변함이 없었다. 교원 자격증을 따려고 했다. 그러나 5년 연애 끝에 1999년 결혼한 아내의 격려가 대학교수직에 도전하는 힘을 줬다. "당신도 할 수 있어요." 그는 경희대에서 석사를 딴 후 한체대에서 2003년 '도마 손 짚고 몸 펴 앞공중 돌아 540도 비틀기의 역학적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침 그 즈음 경희대에서 운동역학 전공으로 교수 임용 공고가 나 32세의 나이에 교수가 됐다. "지금은 정년퇴임하신 김진수 교수님의 권유로 원서를 냈는데 당시 주위에서 진짜 욕을 많이 먹었어요. 나이도 어린데 선배들 생각도 안한다구요. 그 때 몇개월간 진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경희대 체육학부 30명의 교수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 직함만 10여개…왕성한 활동맡겨진 일을 거절할 줄 모르는 그는 명함에 적어야할 직함이 10여개를 헤아린다. 경희대 체육대 총동문회 사무국장, 운동역학회 이사, 대한체조협회 이사·기술위원, 올림픽 성화회 이사, KBS 해설위원, 경수회 총무 …. 국내·국제대회가 있을 때는 심판으로 달려간다. 올해도 여름방학 후 베오그라드U대회, KBS배·교보·문체부장관배 대회 등을 쫓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개학이 코 앞이다. 여홍철은 "나는 연구자가 아니라 교육자가 되고 싶은데 요즘은 논문에 치여 후배나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쓸 시간이 점점 적어진다. 학교에서도 내 밑으로 6명의 후배 교수가 들어왔는데 아직도 나이로는 막내"라며 웃었다."2020년 올림픽에 서정이가 내 한 풀어줬으면…"여홍철의 부인 김윤지 씨는 2년 연하로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때 여자 대표팀 주장이었고 현재는 여자대표팀 코치로 있다. 부부가 모두 체조 국가대표 출신이다. 딸이 둘인 그는 현재 8살짜리 둘째 서정이에게 체조를 가르치고 있다. 표현력과 체력이 좋고 무엇보다 잘 먹지를 않아 살찌는 체질이 아니다. 여홍철은 "어릴 때부터 항상 몇년 뒤에는 뭘 해야 되겠다 하는 계획을 갖고 살았는데 원하는 것을 다 이룬 지금에는 현재에 최선을 다 하려고 하고 있다. 아내도 대학강단에 뜻이 있으니 잘 풀렸으면 좋겠고 장기적으로는 서정이가 훌륭한 선수로 성장했으면 한다. 2020년 올림픽에서는 내 못 이룬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뤄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홍철 이름 붙은 체조 기술, 현역 선수들 애용여홍철이 체조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클럽활동을 체조로 정했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체조 선생님의 달콤한 한마디였다. "운동 잘 하면 대학도 공짜로 갈 수 있고 하루에 한번씩 빵·우유도 준다!"무협영화를 좋아해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것을 꿈꾸던 여홍철은 어렸을 적부터 남들이 못하는 기술을 꿈꿨다. 중학교 1학년때 골수염을 앓아 1년반 동안 운동을 전혀 못하는 고비를 넘긴 그는 이때부터 머리 속에만 그리던 기술을 차차 현실화하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그의 그의 성을 붙여 국제 공인기술이 된 '여(Yeo)' 기술이다. 한국 체조 선수의 성을 딴 기술은 평행봉의 '권(Kwon·권순성 선수)'과 '정(Jung·정진수)' 기술이 있지만 '여(Yeo)만큼 독창적이고 아직도 애용되는 기술은 없다.'여 1' 기술은 94년 브리즈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선보인 기술로, 설명을 붙이자면 '손 짚고 옆으로 180도 비틀어 도마 집고 뒤로 세바퀴 돌기'다. '여 2' 기술은 '도마 집고 몸 펴서 공중 1바퀴 반 돌아 옆으로 두 바퀴반 비틀기'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중국의 리샤오핑을 이기기 위해 개발한 고난도의 기술이었따. 여홍철의 기술은 착지 불안의 위험성은 있지만 화려함 때문에 금세 국제체조연맹의 관심을 받았다.체조연맹은 최근 들어서는 아주 독창적인 기술이 아니라면 성이나 이름을 붙이는 것을 되도록 자제하고 있어 특정 선수의 이름이 붙은 기술을 보기는 점점 더 어려울 전망이다.■ 여홍철은? * 출생: 1971년 5월 28일 전남 광주* 학력: 광주 학강초―조대부중-(조대부고→)전남체고(현 광주체고)-경희대(학사·석사)-한체대(2003년 박사)* 신체: 165㎝/65㎏* 가족: 부인 김윤지(36) 씨, 2녀* 주요경력: 91년 U대회 금메달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94·9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3년 경희대 스포츠지도학과 교수 * 취미: 골프(80대 중반 타수)박수성 기자 사진=김민규 기자 2009.08.27 09:23
스포츠일반

[박수성의 How are you] 실업배구 원조 스타, 장윤창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다 싶습니다. 나이 서른넷, 영어 한 마디도 못하면서 공부하겠다고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갔으니까요. 더구나 막 석사를 땄을 때는 IMF가 왔습니다. 못 견디고 결국 귀국했죠. 그러고 보니 교수가 될 때까지 딱 9년을 백수생활을 했었네요."사람 좋을 것 같은 인상은 여전했다. 평생을 해온 '스포츠 머리'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돌고래 스파이커'가 아니라 어엿한 대학 교수님이다.장윤창(49). 그는 한국 배구가 최고의 흥행을 구가하던 시절,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스타다. 강만수 보다도 여성들 사이에 인기는 더 높았다. 그는 그 이유로 "내가 불쌍해 보였나 봐요"라고 하지만 그는 배구팬들에게 항상 시원한 볼거리를 보여줄줄 알았던 원조 프로였다.미국서 4년간 스포츠 경영학 공부 94년이었다. 93년 시즌 고려증권을 다섯번째 정상에 올려놓고 은퇴를 선택했다. 대부분 스타들이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선택하지만 그는 항상 공부가 하고 싶었다. 당시 경기대 손종국 총장의 추천서를 받고 날아간 곳이 경기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미국의 조지워싱턴 대학이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면 "피 땀 흘려 했다"고 할 정도로 그는 공부에 매달렸다. 4년간 공부해 스포츠 경영학 석사를 땄다. 그 때 IMF가 터졌다. "800원대 하던 달러가 1800원까지 치솟았습니다. 학비 등 경비가 3배는 더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박사까지 하고 싶었지만 결국 짐을 쌌죠." 귀국 후 한국체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고 2003년 꿈에 그리던 교수가 됐다. 경기대 체육학과에서 4년째 학과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학부 2과목, 석사과정 1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학생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그의 강의는 항상 학생들의 인기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받은 사랑만큼 돌려드려야죠."학교 밖에서 그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가 더 있다. 전·현역 스포츠 스타들과 함께 만든 봉사단체 '함께 하는 사람들'(함사모)의 회장으로 봉사활동에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있고 일주일에 또 4번은 장스클럽(장윤창 배구스쿨)에서 직접 지도도 한다. 둘 다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인 99년 시작해 10년을 계속해 오고 있다. 배구로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에서다다.회원이 5000명에 달하는 '함사모'의 봉사활동은 규모가 크다. 매달 한번씩 불우 이웃을 대상으로 자장면 나눔 활동이나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상반기에는 '희망 마라톤', 후반기에는 '일일 호프' 등을 열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단체들을 돕고 있다. "10년째 회장 장기집권이라 물려줄 때가 됐는데 물려받으려는 후배가 없네요." 그는 그러나 전혀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타고난 성실성그는 자신의 장점으로 끈기와 집념을 꼽는다. 인창고 2학년때 국가대표가 돼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의 기록을 갖고 있는 그의 가장 무기는 엄청난 탄력이었다. 그 원동력이 바로 성실성이었다. 그는 10㎏에 달하는 모래조끼를 입고 하루 3000번씩 줄넘기를 하며 체력을 키웠다. '스카이 서브' '백어택' 등 화려한 기술의 배경에는 이처럼 숨은 노력이 있었다.15년 가까이 대표 선수로 뛰면서 조그만 잡음 하나 없었다. 여성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막무가내식 대시도 많이 받았지만 절제로 이겨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진짜 한눈 팔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은퇴할 때 돌이켜보니 내가 뭘 했나 싶기도 했다. 운동밖에 몰랐고, 오죽하면 술·담배를 시도해볼 시간도 없었다"고 했다.현역 지도자 생각은? "네버!"그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인터뷰 동안 몇번 "코트로 돌아올 생각은 없는가?"를 물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안정된 교수직을 버릴만큼 현장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밖에서 보면 분명히 잘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선수겸 코치로 7년동안 뛰어 지도자로서 어느정도 경험은 했다고 생각합니다."그렇다고 배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리 없다. 지난해 올림픽 본선에 남녀대표가 모두 탈락한 책임을 지고 배구협회 이사직을 그만뒀지만 애정어린 조언은 계속하고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 그는 "현재 한국 배구의 문제는 열매만 따먹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재료가 있어야 맛깔난 음식을 만들고 파이를 더 키울텐데 재료인 꿈나무를 키우는데는 공을 안들이고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습니다"라며 한구 배구의 현실에 일침을 가했다.'스카이 서브' 국내 원조장윤창은 '스카이 서브'의 국내 원조로 유명하다. 80년대 중반과 90년대초 그가 서브를 넣기 위해 공을 통통 튀기고 있으면 관중석은 그의 호쾌한 스카이 서브를 기대하며 들썩들썩했다.당시 외국 선수들도 별로 시도하지 않던 스카이 서브를 트레이드마크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인 81년이었다. 중동 원정을 떠났을 때 몇차례 실전에서 적용해본 스카이 서브의 정확도와 위력은 생각보다 높았고 국내에 들어와 더 가다듬은 후 써먹기 시작했다. 83년은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써비스가 동시에 창단되면서 실업배구가 흥행에 날개를 단 시기였다. 그 해 바로 장윤창이 고려증권에 입단했다. 센터와 라이트를 번갈아 보면서 87㎝에 달하는 엄청난 서전트 점프를 무기로 코트를 휘저었다. 80년대 장윤창-강만수(현대)-강두태(럭키금성)의 거포 싸움은 최고의 흥해카드였다.한국배구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고려증권은 1988년 모기업의 부도로 팀이 해체되지만 당시 멤버는 현재 남녀배구 현장에서 큰 파워를 형성하고 있다.이성희(당시 세터)는 여자배구 GS칼텍스, 박삼용(레프트)은 KT&G, 어창선은 흥국생명 감독으로 있어 여자배구에서는 막강 파워다. 또 유중탁(센터)은 명지대 감독, 정의탁(센터)은 평촌고 감독, 이경석(세터)은 경기대 감독 등으로 남자배구를 지휘하고 있다.박수성 기자 ▷ 맥주집, 수익 보다 안정 따져야▷ 맥주집 가맹점 순위 매겨보니…베스트 5 어디?▷ “실적 꾸준한 회사 선택해야 실패 적어”▷ 경량급 복싱 신화, 장정구▷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 김원기▷ 불운의 경륜황제, 엄인영 >> 박수성의 How are you 시리즈 더 보기 2009.08.06 09:25
생활/문화

김건우 “야구 심리상담으로 꿈나무에게 도움 주고파”

2000년 야구를 완전히 떠난 그는 사회 적응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신림동 고시촌 부근에서 PC방도 해봤고 2002년에는 일산 탄현 부근에 친구와 함께 대형 헬스클럽도 운영했다. 누나가 하는 분식집에서 주방일을 보기도 했다. 와중에 친구에게 서준 빚보증이 잘못돼 큰 경제적인 손실도 입었다. 2002년 그는 처형의 도움으로 심리치료사의 상담을 받는다. LG 코치 시절에도 그랬고, 사회에 적응하면서 소심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 항상 걸림돌이 됐다. 거의 폐인이나 다름없던 그를 처형이 보다 못해 심리상담사 앞으로 끌고 갔다. 2년 가까운 치료 후 그는 이전보다 확실히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도 터득했다. 김건우의 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야구 심리상담의 1인자가 돼 꿈나무 야구선수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다. 어렸을 적 미묘한 심리(멘털)나 두려움 때문에 발전을 못하는 중고생 야구 선수들을 누구보다 잘 이끌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시켜줄 자신이 있다. 자신에게 몇 번 좌절을 안겨준 사고와 부상을 이겨내면서 그는 재활과 심리상담에는 일가를 이뤘다. 가칭 '김건우 야구심리연구소'가 할 일이다.둘째는 자신의 이름을 건 야구장이다. 사회인 야구 선수와 가족들이 야구를 하고 야외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다. 서울 인근에 부지도 물색했고 후원자와도 얘기가 많이 진척됐다. 행정적인 절차도 진행하고 있다.김건우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불운의 사고를 원망하고 아쉬움도 많이 가졌지만 이젠 편안해졌다"며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야구 발전에 묵묵히 밀알이 되고 싶다"고 했다.박수성 기자 ▷ 역대 신인 최다승, 신인왕 김건우▷ 높이뛰기 한국 기록자, 이진택▷ 이은철 “바로셀로나서 경기 후 실핏줄 다 터져…”▷ 사격선수 이은철 “금메달 이후 목표 없어 방황”▷ 장지영 “88년 이만기와 결승이 최고의 승부”▷ 약관의 천하장사, 장지영 2009.05.25 10:28
생활/문화

[박수성의 How are you] 역대 신인 최다승, 신인왕 김건우

선수와 스태프로 LG 유니폼을 각각 두 번씩이나 입었으며 LG 구단이 최초로 은퇴식을 열어준 선수는? 야구를 깨나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질문에는 조금씩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좀 난이도가 낮은 질문으로, 역대 프로야구 신인 최다승을 거두고 1986년 신인왕에 오른 선수는? 바로 김건우(46)다. 역대 신인 최다승 기록은 2006년 한화 류현진이 경신을 시도했지만 결국 타이에서 멈췄고 김건우는 엄연한 공동 타이틀홀더다.&#39김건우&#39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39불운&#39이라는 단어다. 인생의 고비마다 뜻하지 않은 악재가 항상 그를 멈추게 했고 그는 그때마다 때로는 방황하고 묵묵하게 인내하다 또다시 박차고 일어나고는 했다. 2000년 야구장을 완전히 떠난 그는 사회 초년병으로 좌충우돌하다 현재는 그렇게 그리던 야구장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 리틀야구 전도사로서 일하고 있는 그의 직장은 강동구 리틀야구단과 김건우 야구심리연구소다.루키 시절 뜻하지 않은 홈개막전 선발대부분의 팬들이 &#39김건우&#39를 투수로 기억하고 있지만 86년 MBC에 입단할 때 그는 엄연하게 타자로 지명을 받았다. 한양대 4번이었고 타격 재질이 뛰어났다. 그러나 시즌 개막 전 진해훈련으로 떠난 전지훈련 기간 중 우연한 사건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전지훈련 간 지 며칠이 안돼 가져간 나무배트 열 자루가 모두 부러졌다. 김재박, 이광은 등 당시 선배들이 배트를 몇 개 더 줬지만 며칠을 못 버텼다. 마침 나무 배트 적응에 짜증이 났던 그가 3루 연습을 하고 있는데 1루에 뿌리는 공의 엄청난 속도를 유심히 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미즈다니 코치였다. 미즈다니 코치는 당시 김동엽 감독에게 투수 전향을 강력하게 권고했고 그는 이후 투수조에 끼어 연습을 시작했다.시즌 개막. 원정경기를 다녀온 후 4월 3일 홈개막전이었다. 당시 LG 투수진은 하기룡, 유종겸, 오영일, 정삼흠 등 쟁쟁했다. 당연히 그는 개막전 선발은 꿈도 못 꿨고 전날 동기였던 김태원과 한 잔까지 걸친 터였다. 그러나 플레이볼 1시간을 남긴 즈음 감독이 부르더니 깜짝 통보를 했다. "네가 긴장해 잠 못 잘까봐 얘기 안 했는데 오늘 선발은 너야!" &#39가운데만 보고 던지자&#39고 생각하고 공을 뿌렸고 청보 핀토스를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뒀다. 그 해 성적이 18승 6패, 방어율은 1.81. 화려한 루키 시절이었다.불의의 교통사고1987년 9월 12일.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날이다. 12승 7패로 성적도 괜찮았고 팀도 상승세였다. 대치동에 사는 여자친구를 데려다 주기 위해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승용차가 덮쳤다. 오른쪽 다리와 양팔이 조각조각 부러졌고 여자친구도 크게 다쳤다. &#39교통사고&#39식 땜질 수술을 하는 바람에 이후 그의 팔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2년 공백 후 다시 마운드에 섰지만 구속은 10㎞ 이상 떨어졌고 변화구의 각은 무뎌졌다. 그해 성적은 3승 2패 2세이브. 그해부터 91년까지 기록한 승수가 모두 6승이었다. 그 중 90년에 기록했던 1승 1세이브는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록이다. 1승은 당시 6연패를 끊어주는 소중한 1승이었고 1세이브는 3연승을 완성하는 알토란같은 세이브였다. 교통사고만 없었더라면, 수술을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김건우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옆에서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던 여자가 아내인 정재연(45)씨다."타자를 했다면…?"선린상고 2학년 시절 그는 이영민 타격상을 받을 정도로 타격에 재능이 있었다. 게다가 어깨까지 강했다. 큰 모션 없이도 100m는 공을 보낼 정도였다. 당시 선린상고에 박노준 외에 투수 자원이 마땅히 없던 것이 그를 투수의 길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한양대 시절에는 타자만 하다 프로에 갔으니 그의 어깨는 싱싱했다. 86년 신인 최다승을 세운 것도 그 싱싱한 어깨가 원천이었다. 김건우는 87년 부상을 입은 후 투수로서 재기를 모색하다 이후 타자로 전향했다. 90년부터 타석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92년부터 본격적으로 타자로 변신했다. 92년 그는 시즌 초 최다안타 수위를 달릴 정도로 방망이에 불이 붙었다. 붙박이 4번 타자였다. 그러나 7월 12일, 장종훈과 충돌하면서 손목골절을 입는 불운이 찾아왔다. 93년에는 독한 마음을 먹고 강훈련을 하다 연습이 지나쳐 손등에 피로골절이 왔다. 참고 참던 그도 버틸 힘이 없었다. 94년 LG구단이 그에게 은퇴를 권유했고 그는 담담히 받아들였다.그러나 KBO 김건우 기록에는 97년에 7경기에 나와 11과 ⅔이닝을 던진 기록이 있다. 2군에서 주로 재활 선수들을 돌보던 그는 스스로 재활법을 터득했고 강해진 어깨를 발견했다. 97년 복귀했고 승·패·세이브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마운드에 서는 게 너무 행복했다. 김건우는 "&#39투수 김건우&#39보다는 &#39타자 김건우&#39가 사실 더 애착이 간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을 왜 못 갔는지 후회가 된다"며 "타자에만 전념했다면 박재홍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회한에 젖어들었다. 박수성 기자 ▷ 높이뛰기 한국 기록자, 이진택▷ 이은철 “바로셀로나서 경기 후 실핏줄 다 터져…”▷ 사격선수 이은철 “금메달 이후 목표 없어 방황”▷ 장지영 “88년 이만기와 결승이 최고의 승부”▷ 약관의 천하장사, 장지영 2009.05.25 10:18
생활/문화

[박수성의 How are you] 높이뛰기 한국 기록자, 이진택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한국 육상의 지상 과제는 &#39메달&#39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마라톤을 제외하고는 육상에서 결선에 오른 것도 손으로 꼽을 정도다. 세계적인 수준과 벽이 이처럼 높은 육상에서 메달 가까이 갔다가 아깝게 6위에 그친 육상스타가 있다. 바로 이진택(37)이다.92년 첫 한국신기록을 시작으로 무려 6차례나 기록을 갈아치웠던 그의 기록(2m34·97년 기록)은 지금도 엄연한 한국기록이다. 요즘 높이뛰기의 세계적인 추세가 하향화됐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당분간 그의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베이징올림픽 남자높이뛰기에서 2위를 한 저메인 메이슨의 기록이 234㎝였으니 조금만 늦게 태어났어도 한국육상 올림픽 첫메달의 주인공이 그일 수도 있었다.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은 1명의 선수라도 더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 유망주 발굴에 목이 빠지고 있다. 지금 이진택은 높이뛰기에서 이같은 유망주를 찾는 주니어대표 감독이 돼있다. 올해초에는 대한육상연맹의 이사진에 포함돼 육상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야를 갖출 공부도 시작했다.키가 5㎝만 더 컸다면 그의 실력이 절정에 달했던 90년대 중후반은 높이뛰기의 전성기였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세계기록(2m45) 보유자인 하비에르 소토마요르(쿠바·194㎝)를 비롯해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평균 신장이 195㎝였으나 이진택의 키는 &#39고작&#39 190㎝였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결선에 오른 12명의 선수 중 그는 항상 최단신이거나 뒤에서 둘째였다. 선천적으로 탄력이 좋은 중남미권 선수가 아닌 그가 상대적인 단신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신체적인 한계를 기술력으로 극복한 셈이었다.시련 안겨준 시드니올림픽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그는 한국육상에 첫 메달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육상연맹은 그에게 독일 바이엘클럽에서 4개월간 기술연수를 시키며 집중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예선탈락이었다.돌이켜 보면 약이 독이 됐다. 당시 체력적으로는 하향 사이클을 그리고 있던 그가 독일 연수 중 경기에 계속 출전한 것이 결과적으로 마이너스가 됐다. 기술적으로는 눈이 높아졌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니 기록이 좋을 리 없었다. 결국 한국에 돌아와 2m20 초반대 기록을 냈고 올림픽에서도 예선탈락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가장 많은 노력을 했던 대회에서 성적이 참담했으니 일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좌절한 그에게 당시 높이뛰기 여자 대표선수였던 김미옥 선수가 큰 위안이 됐고 결국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뒤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현재 체육교사를 하는 아내와 민우(5)·민훈(3) 두 형제를 키우며 알콩달콩 살고 있다.기억에 남는 것은 U-대회 우승 올림픽 3회, 세계선수권 4회의 출전경력을 가진 그이지만 그는 유난히 유니버시아드대회가 기억에 남는다. 무려 5회 연속 출전으로, 유니버시아드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상무 복무 시절에도 U대회에 나가면서 작성한 기록이다. 셰필드(91년)에서 팔마(99년)U대회까지 그는 무려 5회 연속 U대회에 나갔고 1997년 시칠리U대회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덕분에 그는 대구에서 열린 2003년 U대회에서는 성화봉송 최종 주자로 필드에 나서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나보다 더 높이 뛰는 후배 기르겠다그는 은퇴를 두 번 했다. 2003년 부산국제육상대회에서 공식적인 은퇴경기를 가졌으나 2년만인 2005년 다시 운동화 끈을 조여맸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 출전하려는 욕심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보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성적은 역시 신통치 않았고 갈등하고 있던 그에게 2006년 7월 주니어대표팀 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왔다. 현재 그는 주니어대표 154명 중 도약종목(높이뛰기·멀리뛰기·세단뛰기·장대높이뛰기) 분야 35명을 지도하고 있다. 중3부터 대학교 1학년까지 유망주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일이다. 한국육상은 세계의 벽을 뛰어넘기가 어려운 트랙종목 보다는 도약·투척 종목 등 기술종목에 더 집중해 경쟁력을 키워야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높이뛰기에서 세계 최고에 근접했던 이진택의 노하우가 절실한 이유다.이진택은 "나도 처음 세계대회에 나갈 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2~3번 나가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절실함과 자신감이다. 미쳐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2011년까지 미치는 선수를 찾아내 나보다 나은 후배를 꼭 길러내겠다"고 말했다. 박수성 기자 ▷매출 30%↓…PC방 전면금연화 추진 논란▷ 세계 4강 비걸(B-Girl), 서혜미▷ 제1편 : 다리가 무거울 때▷ 임형주 “어린 시절 어머니의 특별상, 마요네즈 새우”▷ 임형주를 위한 호텔 주방장의 ‘마요네즈 새우’ 2009.05.11 09:32
생활/문화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 17년만에 무대로

극한의 시련을 이기는 사랑…. 베토벤이 남긴 유일한 오페라 &#39피델리오&#39가 오는 7일부터 10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17년 만에 국내 무대에 오른다. 출연진은 120여 명의 배우·합창단(무악합창단과 그란데오페라합창단)에 오케스트라(코리아심포니오케스라)까지 합쳐 200여 명이다. 베토벤의 대작에 걸맞은 규모다. 오페라 팬이라면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든 작품이다. 베토벤이 1814년 완성한 &#39피델리오&#39는 18세기 스페인의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살해될 뻔한 정치가이자 남편 플로레스탄을 그의 아내인 레오노레가 남장을 하고 간수의 부하로 위장해 구해낸다는 이야기다. 피델리오는 레오노레가 남장을 하고 사용하는 가명이다. 숭고한 사랑과 정의의 승리를 주제로 한 이 오페라는 절망적인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랑의 위대함을 숭고하면서도 장중하게 찬양한다. 1막 2장에서 레오노레가 남편을 구하리라고 결심하며 부르는 아리아 &#39난폭한 자! 급히 어디로?&#39 등이 유명하다. 이번에 선보이는 &#39피델리오&#39는 독일어로 공연된다. 1970년대와 1992년 열렸던 두 차례 공연에서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39피델리오&#39를 창단 공연작으로 선택한 무악오페라 측은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자 독일어 초연을 한다. 무악오페라가 경영과 예술의 분리를 통해 각 분야의 전문성을 극대화해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레오노레 역으론 소프라노 나경혜와 수잔 앤서니, 플로레스탄 역으론 테너 한윤석·스티븐 해리슨가 번갈아 출연한다. 장상용 기자 ▷ 이은철 “바로셀로나서 경기 후 실핏줄 다 터져…”▷ 시속 130km 강속구, 제인 어 “여자 아닌 야구선수”▷ 걷기와 함께 몸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요가▷ “운동,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벤처산업·e스포츠 경기장…상암, 최초의 IT 컨트롤타워 뜬다 2009.05.04 10:27
게임

3년 만의 우승자 매치, 이윤열-박정석 “양보 없다”

개인리그 챔피언이자 100승을 놓고 치열한 승부를 펼치던 두 영웅이 6일 3년만에 정면승부를 펼친다.MSL 3회 우승의 이윤열(위메이드)과 박정석(공군)이 6일 신한은행 프로리그에서 팀과 개인의 영광을 위한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이윤열과 박정석은 2002년 10월 5일 열린 KPGA 투어 3차 리그 결승전에서 맞붙어 이윤열이 3대 0으로 완승한 바 있다. 이후 이윤열과 박정석은 크고 작은 대회에서 계속 전적을 쌓아 나갔고 비공식전까지 포함하면 24승 15패로 이윤열이 앞서 있다.최근에 열린 두 선수의 공식전 대결은 2005년 11월 1일에 열린 스카이 프로리그2005 후기리그일 만큼 서로 슬럼프를 겪었다. 박정석은 2006년부터 개인전보다는 팀플레이에 주력했고 이윤열은 꾸준히 활약했지만 2008년부터 출전 기회가 줄었다. 박정석과 이윤열이 벌인 신경전은 지난달까지 불꽃이 일었던 100승 고지 달성여부였다. 지난 시즌까지 90승으로 타이를 이뤘던 두 영웅은 이윤열이 08~09 시즌 들어 96승까지 먼저 치고 나가며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하지만 박정석이 공군 입대 이후 컨디션을 회복해 재역전에 성공하며 가장 먼저 100승을 달성했다. 박명기 기자 ▷ 이은철 “바로셀로나서 경기 후 실핏줄 다 터져…”▷벤처산업·e스포츠 경기장…상암, 최초의 IT 컨트롤타워 뜬다▷ 시속 130km 강속구, 제인 어 “여자 아닌 야구선수”▷ 걷기와 함께 몸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요가▷ “운동,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 2009.05.04 10:25
생활/문화

[박수성의 How are you] 이은철 “바로셀로나서 경기 후 실핏줄 다 터져…”

이은철이 사격과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때 소풍 삼아 갔던 곳이 인천 자유공원이었기 때문이다. 코르크 총으로 인형을 맞히는 게임을 했는데, 쏘는 족족 인형이 떨어졌다. 어릴 때부터 총알이 든 총을 유난히 좋아하던 숨은 실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어머니에게 총을 더 배우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는 당시 경동시장 근처 &#39대왕사격장&#39에 데리고 갔다.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당시 문교부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모르게였다. 그런데 당시 몇십만원 하는 총을 사야될 때가 오자 더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 &#39사격 허락&#39을 놓고 ROTC 출신 아버지와 &#39맞대결&#39이 펼쳐졌고 이은철이 신승하며 정식 선수의 길을 걸었다. 이 때 어머니와 약속이 &#39올림픽 금메달&#39이었다.아버지의 유학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이은철은 학업과 함께 사격에 매진했다. 전미사격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자 선발전없이 LA올림픽의 한국 대표로 발탁됐다. 파격적인 예우였고 첫 올림픽 출전이었다.사격과 인생에서 그의 코치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사격 교본을 독파하고 총알까지 직접 디자인하는 등 전문가 뺨치는 수준까지 오른 어머니 박인화씨였고, 다른 한 명은 래니 베삼 코치다. 세계선수권 8회 우승에 빛나는 베삼 코치는 사격 자세보다는 정신수양법을 가르쳐준 은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사태를 풀 수 있는 정신수양법을 베삼 코치로부터 배웠다.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그는 8명이 겨루는 결선에 제일 낮은 점수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시 그의 별명이 &#39결선 선수&#39. 결선만 올라가면 거의 우승할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에 강했기 때문이다. 결선에서 그는 감(感)을 잃을까봐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견착을 풀지 않는 초인적인 힘으로 결국 금메달을 일궈냈다. 경기가 끝나고 난 후 왼팔의 실핏줄이 다 터져 감각이 없을 정도의 투혼이었다.박수성 기자 ▷ 사격선수 이은철 “금메달 이후 목표 없어 방황”▷ 장지영 “88년 이만기와 결승이 최고의 승부”▷ 약관의 천하장사, 장지영▷ ‘100m종목 그때도 있었더라면…’ 유선희의 세가지 아쉬움▷ 유선희 “금메달 한 씻어줄 후배 키우겠다”▷ 유진선, 술 한 모금 못하는 숙맥 ‘아웃사이더’ 2009.05.04 09:46
스포츠일반

[박수성의 How are you] 사격선수 이은철 “금메달 이후 목표 없어 방황”

마치 정신분석학자, 심리상담사를 만난 느낌이었다. 40대 중반의 어엿한 벤처기업 사장으로 잘 나가는 인생을 살고 있는 그는 누구보다 절망에 가까운 고비를 많이 맞았고 그때마다 고비를 기회로 전환시키며 진화했다."자신이 의심하는 만큼 목표는 빗나가게 돼있다. 긍정하는 만큼 더 많이 가능해진다." "항상 진화할 수는 없다. 한 단계 진화하려면 뒤로 조금 움츠렸다 다시 나가는게 자연의 이치다. 운동에서는 그걸 슬럼프라고 하지만 슬럼프는 거꾸로 보면 앞으로 나가기 위한 전조다."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에 처음으로 사격 첫 금메달을 안겨준 이은철(42). 그는 운동선수로는 드물게 벤처기업 사장이 돼 현재 IT 첨단분야의 신제품을 개발 중이다.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로 세계 정상에 올랐던 그는 똑 부러지는 사격 솜씨만큼이나 능수능란한 일처리로 벤처 대박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서 벤처기업 사장으로현재 그의 회사는 분당의 파크뷰 건물 내에 있다. 사무실 입구에는 '실리콘밸리테크'라는 자신의 회사 이름 외에 미국의 3개 IT기업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있다.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IT업체들의 인큐베이팅 역할을 겸하고 있다. '실리콘밸리테크'는 통신장비, 보안 분야의 제품을 개발하고 있고, 특히 무선중계기에 사용되는 파워앰프에 회사 역량을 앞으로 집중할 생각이다. 올해초에는 국가로부터 '이노비즈' 인증을 받아 회사운영에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2005년 회사를 창립한 그는 매해 2배 이상의 성장을 이뤄내며 착착 꿈을 실현해가고 있다. 금메달 이후 목표 없어 방황 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두 번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 중 한번이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난 이후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인생의 가장 정점이지만 그는 "목표가 없어지자 마치 칠흑같은 어둠 속에 혼자 팽개친 기분이었다"며 당시의 느낌을 털어놓았다.당시 그는 지도자로 후배들을 양성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여건은 녹록치 않았다. 지도자가 되기에는 젊은 나이였고 자리도 나지 않았을 뿐더러 협회에서는 선수로 더 뛰어줄 것을 주문했다. 그는 결국 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84년 LA올림픽부터 무려 5년 연속 올림픽에 나가게 된 것이다. "당시 '번아웃(burn out) 상태였다. 목표가 없어지자 온 몸의 기력이 쇠진한 것을 느꼈다."시드니올림픽이 끝나고 난 후 그는 과감하게 IT에 인생을 던져 보기로 결심했다. 소속팀이었던 KT에서 3급 정직원 신분까지 약속했지만 새로운 도전이 고팠다. 처음 찾은 곳이 '윈드 리버'라는 회사였고 이후 IP인퓨전 한국·대만 지사장으로 발탁됐으며 2005년 지금의 회사를 설립했다.기대만큼 실망도 컸던 88올림픽 그의 인생에서 첫번째 막다른 골목은 88서울올림픽이었다. 당시 그의 실력은 지금 돌이켜봐도 인생 최고의 정점에 있었다.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인 87년 복사, 3자세, 공기총 등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신기록과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수십번 작성했다. 당연히 주위에서, 매스컴에서도 금메달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선탈락. 88년초부터 연습 성적이 하향점을 그리더니 결국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당시 그는 모 신문에서 난 그를 비꼬는 기사를 보고 자살까지 생각했다. 생전 처음으로 술을 입에 대봤다. "당시 나의 고민을 들어줬던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랐다"는 것이 그의 술회다.스포츠·장학 재단이 궁극의 목표 그러나 그의 고향은 역시 운동, 스포츠다. 그는 현재 벤처기업 사장으로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장학재단, 특히 스포츠 재단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지금 돈을 버는 것은 그것을 위한 과정이다. 마지막 올림픽었던 시드니올림픽에서 만나 의남매를 맺은 강초현을 만난 것이 그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계기가 됐다. 어려운 소녀가장이지만, 밝게 살면서 운동도 열심히 하는 '초현'이를 보고 스포츠 장학재단을 머리 속에 그렸다. 그는 "내가 돈을 벌면 누구보다 잘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나는 재단 일에 몰두하고 싶다. 특히 운동하는 후배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고 했다.박수성 기자 ▷ 장지영 “88년 이만기와 결승이 최고의 승부”▷ 약관의 천하장사, 장지영▷ ‘100m종목 그때도 있었더라면…’ 유선희의 세가지 아쉬움▷ 유선희 “금메달 한 씻어줄 후배 키우겠다”▷ 유진선, 술 한 모금 못하는 숙맥 ‘아웃사이더’▷ 아시안 게임 4관왕, 유진선 “라켓은 내 운명” 2009.05.0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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