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철이 사격과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때 소풍 삼아 갔던 곳이 인천 자유공원이었기 때문이다. 코르크 총으로 인형을 맞히는 게임을 했는데, 쏘는 족족 인형이 떨어졌다. 어릴 때부터 총알이 든 총을 유난히 좋아하던 숨은 실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어머니에게 총을 더 배우고 싶다고 하자 어머니는 당시 경동시장 근처 '대왕사격장'에 데리고 갔다.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는 당시 문교부 고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모르게였다.
그런데 당시 몇십만원 하는 총을 사야될 때가 오자 더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 '사격 허락'을 놓고 ROTC 출신 아버지와 '맞대결'이 펼쳐졌고 이은철이 신승하며 정식 선수의 길을 걸었다. 이 때 어머니와 약속이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아버지의 유학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이은철은 학업과 함께 사격에 매진했다. 전미사격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자 선발전없이 LA올림픽의 한국 대표로 발탁됐다. 파격적인 예우였고 첫 올림픽 출전이었다.
사격과 인생에서 그의 코치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사격 교본을 독파하고 총알까지 직접 디자인하는 등 전문가 뺨치는 수준까지 오른 어머니 박인화씨였고, 다른 한 명은 래니 베삼 코치다. 세계선수권 8회 우승에 빛나는 베삼 코치는 사격 자세보다는 정신수양법을 가르쳐준 은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사태를 풀 수 있는 정신수양법을 베삼 코치로부터 배웠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그는 8명이 겨루는 결선에 제일 낮은 점수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시 그의 별명이 '결선 선수'. 결선만 올라가면 거의 우승할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에 강했기 때문이다.
결선에서 그는 감(感)을 잃을까봐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견착을 풀지 않는 초인적인 힘으로 결국 금메달을 일궈냈다. 경기가 끝나고 난 후 왼팔의 실핏줄이 다 터져 감각이 없을 정도의 투혼이었다.
박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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