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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 만의 대참사, 경쟁력 잃고 추락하는 한국 남자배구 [IS 항저우]

한국 남자배구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잃은 지 꽤 오래됐다. 그래도 아시안게임(AG) 12강 탈락은 너무 충격적인 성적표다. 임도헌 감독이 이끄는 한국(세계랭킹 27위)은 22일 중국 저장성 사오싱시 중국 경방성스포츠센터 체육관에서 열린 12강 토너먼트에서 파키스탄(51위)에 세트 스코어 0-3(19-25, 22-25, 21-25)으로 완패했다. 남자배구는 이번 대회 공식 개막식이 열리기도 전에 12강에서 처참하게 탈락했다. 남자배구는 꽤 오래전부터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을 잃은 상태다. 올림픽에 마지막으로 출전한 건 김세진, 신진식 등이 활약한 2000년 시드니 대회였다. 여자배구가 2012년 런던, 2년 전 도쿄 대회에서 작성한 4강 신화를 부러움 속에 쳐다봤다. 몇 년 전부터는 V리그에서도 인기 역전 현상이 나타난다. 남자배구는 최근 신예들의 등장 속에 세대교체가 한창이다. 그러나 기대만큼 성장하거나 성과가 나타나진 않고 있다. 결국 아시아권에서도 점차 경쟁력을 잃고 추락 중이다. 일본과 중국이 불참한 2023 아시아 챌린지컵에서는 4강에서 바레인(74위)에 덜미를 잡혀 3위에 그쳤다. 지난달 열린 2023 아시아배구선수권에서는 5위에 머물렀다. 대표팀은 이번 대회 선배들의 업적을 이어 금메달에 하겠다는 포부를 내비쳤다. 한국은 1966년 방콕 대회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이래 2018 자카르타·팔렘방 대회까지 아시안게임 14회 연속 메달(금메달 3개·은메달 7개·동메달 4개)을 획득할정도로 아시안게임에서 강세였다. 베테랑 세터 한선수(대한항공)까지 대표팀에 긴급 수혈, 전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첫판부터 망신을 당했다. 지난 20일 세계 73위 인도에 세트 스코어 2-3(27-25, 27-29, 22-25, 25-20, 15-17)으로 충격의 역전패를 당했다. 다음날(21일) 캄보디아를 3-0으로 꺾었지만 1세트에서 접전을 펼치는 등 경기력이 기대 이하였다. 결국 조별리그에서 1승 1패에 그쳐 12강부터 껄끄러운 상대 파키스탄(51위)과 맞붙었다. 직전 아시아선수권에서 파키스탄은 3-1로 꺾어 상대적으로 자신감이 있었지만, 한 달 만의 재대결에서 0-3으로 완패했다. 상대의 날개와 중앙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우리보다 세계랭킹 46계단, 24계단 낮은 팀에 허무하게 져, AG 한국 남자배구 역사상 가장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2019년부터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임도헌 감독의 선수 교체 타이밍은 한 발씩 늦기 일쑤였다. 주축 선수 정지석(대한항공)의 허리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고, 한선수 역시 컨디션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한 수 아래의 상대 팀과 중앙 싸움에서 완벽하게 밀렸다. 일부 선수들의 정신력도 문제였다. 결국 한국 남자배구는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했다. 한국은 24일 오후 8시(한국시간) 항저우 린핑 스포츠센터 체육관에서 바레인(74위)과 순위 결정전을 치른다.항저우(중국)=이형석 기자 2023.09.2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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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맛' 김세진♥진혜지 부부 위해 배구 올스타 총출동

‘아내의 맛’ 김세진-진혜지 부부를 위해 배구 올스타들이 나섰다. 14일 방송될 TV CHOSUN 예능 프로그램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내의 맛’(이하 ‘아내의 맛’) 106회에서는 김세진-진혜지 부부가 지난 방송을 통해 깨알 예능감을 선보였던 갈색 폭격기 신진식, 배구계 강동원 김요한, V리그 트리플크라운 조재성과 함께 유소년 배구팀과 만나는 현장을 공개한다. 무엇보다 지난 주 방송에서 진지 부부는 신진식-김요한-조재성 등 초특급-초호화 ‘배구 레전드’들을 초대, 실시간 검색어를 휩쓸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상황. 당시 유소년 배구팀 결성에 대한 꿈을 털어놨던 김세진이 ‘배구 올스타’ 멤버들과 함께 40년 전통 배구 명문 수유초등학교를 찾아 그 꿈에 다가가는 첫 발자국을 내딛는다. 특히 유소년들과의 만남의 시간에서는 90년대를 휩쓴 레전드 배구 스타이자 ‘좌우쌍포 신화’를 이끌었던 김세진과 신진직이 은퇴 이후, 15년 만에 깜짝 재결합해 왕년의 오빠 부대들을 들썩거리게 만들 전망이다. 김세진과 신진식-김요한-조재성 등은 수유초등학교 배구선수들의 실력에 깜짝 놀라며 자극을 받은데 이어, 레전드 시절로 돌아간 듯 온몸을 내던져 열정을 불사르며 배구 1대 1 코치를 시작했다. 유소년들을 가르치면서 신진식은 “배구가 이렇게 어려웠나”라며 탄식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후 배구 레전드들은 개인카드를 걸고 유소년들과 ‘회식 배 배구 대결’을 개최했다. 팀 결성 방식을 유소년들의 인기투표로 정하게 되자, 레전드들은 유소년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강스파이크 물병 맞히기 대결’을 벌이며 매력 어필에 나섰던 것. 더욱이 ‘회식 배 레전드 올스타 배구 대결’에서는 김세진과 신진식이 은퇴 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좌우쌍포의 역사적인 배구 경기를 선보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세진과 신진식 그리고 김요한과 조재성이 각각 팀을 이룬 가운데, 15년 만에 재결성한 좌세진-우진식이 현역시절 팀 9연패를 이끌었던 환상의 콤비네이션을 재현, 화려한 레전드의 귀환을 증명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었다. 또한 레전드들 중 막내이자, 현역선수인 조재성이 승부욕에 눈이 멀어 대선배를 향해 불꽃 스파이크를 날리는 무리수를 투척해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제작진은 “이번 주 방송될 106회에서는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우리가 사랑했던 배구 황제 김세진과 신진식, 김요한 등 배구 올스타들의 매력을 재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시청자분들도 김세진과 신진식, 배구 레전드들과 울고 웃었던 90년대 아련했던 추억을 다시금 즐기는 시간이 되셨으면 한다”라고 전했다. 황지영기자 hwang.jeeyoung@jtbc.co.kr 2020.07.1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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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맛' 김세진♥진혜지, 11년만 혼인신고…재혼 주저했던 이유

전 배구선수 김세진과 진혜지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내의 맛'에 합류, 11년 만의 혼인신고 현장을 공개한다. 내일(14일) 오후 10시에 방송될 TV CHOSUN 예능 프로그램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내의 맛' 93회에는 11년 열애 끝에 드디어 결혼을 결심한 김세진과 진혜지가 차곡차곡 쌓아 온 사랑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좌충우돌 혼인 신고식을 그려낸다. 한국 배구계의 레전드이자 월드스타였던 김세진은 꽃미남 외모로 한양대 일대를 마비시켜버렸던 전설의 원조 꽃미남 배구선수. 배구계의 황태자 김세진이 '아내의 맛'을 통해 원조 배구 얼짱스타 진혜지와 장장 11년에 걸친 연애를 접고 드디어 결혼을 돌입하는 현장을 선보이는 것. 더욱이 김세진은 이미 한 번 결별의 아픔을 겪었던 만큼 하나뿐인 아들로 인해 재혼에 대해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도 전한다. 이와 관련 아빠의 결혼 소식을 들은 김세진의 아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부자(父子)의 이야기가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특히 김세진과 진혜지는 '20년 지기' 인연의 꽃미남 배구 스타 김요한과 배구 여신 한유미에게 혼인신고 증인을 부탁하면서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김요한과 한유미가 "이대로 사인 못 합니다!"라며 한목소리로 증인 거절을 선언한 것. 김세진과 진혜지는 20년 믿음을 깨트린 후배들의 마음을 돌리고, 증인 사인을 받기 위해 때 아닌 김종서의 '내 앞에선 너에게'를 열창하는가 하면, 올스타 슈퍼매치를 방불케 하는 좌식 배구 경기까지 벌인다. '아내의 맛' 스튜디오에 처음 등장한 김세진은 나오자마자 '세기의 자장면 먹방 대결'을 펼쳐 현장을 초토화시킨다. 자장면 한 그릇을 2분 만에 순삭하는 김세진에게 대륙의 먹방 신성 중국 마마가 1분 안에 자장면을 먹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승부욕이 발동한다. 여기에 괴식 전문 홍현희까지 합세하면서 세 사람의 자장면 빨리 먹기 대결 승자에 귀추가 주목된다. 제작진은 "김세진과 진혜지가 11년 연애 끝에 혼인신고를 결심, 결혼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아내의 맛'을 통해 공개할 수 있어 뜻깊다. 두 사람이 결실을 맺는 생생한 현장을 시청자분들도 함께 하시면서 축복해 주시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 2020.04.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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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30점보다 이기는 1점, 박철우의 내려놓기

‘철우화재’. 프로배구 삼성화재는 2019~20시즌 초반 이런 이름으로 불렸다. 베테랑 라이트 공격수 박철우(34·1m98㎝)가 24일까지 정규리그 11경기 중 8경기에서 20득점 이상 기록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공격수 못지않은 활약이다. 삼성화재는 외국인 선수 안드레아 산탄젤로(25·이탈리아·1m97㎝)가 발목 부상으로 1라운드에는 거의 뛰지 못했다. 하위권 추락이 예상됐는데, 그나마 5할 이상 승률(6승5패·승점 20)로 4위에 올라있다. 1위 대한항공(9승2패·승점 24)과 승점 4점 차다. 득점 3위(220점), 공격 성공률 3위(53.99%) 등으로 펄펄 나는 박철우 덕분이다. 24일 경기 용인의 훈련장에서 만난 박철우는 “개인 기록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발목이 좋지 않아 최근 두 경기는 제대로 뛰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득점 3위에 내 이름이 있어서 신기했다. 초반에 이렇게 득점을 많이 한 건 2004년 프로 데뷔 이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박철우는 경기당 20득점을 기록하고 있어 산술적으로 이번 시즌 36경기에서 720득점이 가능하다. 그의 한 시즌 최다 득점은 2009~10시즌의 592점이다. 박철우는 “라이트 포지션으로 전 경기를 다 뛰어도 절대 쉽지 않은 수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박철우는 이번 시즌 센터로 변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라이트는 높이 점프해야 하고 공도 많이 때려야 하는 포지션 특성상 부상이 잦고 체력 고갈이 심해 30대 초반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월드 스타’ 김세진도 만 32세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 박철우도 더는 풀타임 라이트로는 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신진식 삼성화재 감독에게 “나 때문에 레프트 포지션 외국인 선수를 뽑았는데, 이제 팀에 맞는 라이트를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팀을 위해 할 수 있는 포지션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신진식 감독은 외국인 선수를 라이트 공격수인 산탄젤로로 뽑았다. 박철우가 센터를 맡으면 다 정리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산탄젤로가 다쳤고, 박철우의 센터 전향은 미뤄졌다. 산탄젤로의 컨디션이 올라오면서 박철우는 최근 두 경기에 센터로 잠깐 뛰어봤다. 아직 네트 앞 위치 선정이나 속공 등에서 어색함이 보였지만, 4득점으로 기대감을 높였다. 박철우는 “중학교 시절 키가 커서 센터를 잠깐 한 이후 20년 만에 해본다. 배구를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느낌”이라며 “왼손잡이 센터가 드물다 보니 주변에서 포지션 변경에 대해 걱정이 컸다. 나는 ‘라이트’ 박철우가 아닌 ‘배구선수’ 박철우로 기억되고 싶다. 팀을 위해서라면 어떤 자리든 도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철우는 센터로 변신하면서 장인어른인 신치용 진천 선수촌장 조언을 떠올렸다. 그는 “촌장님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팀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만 생각하라고 하셨다. ‘거기에다 욕심이나 상대와 관계 같은 것까지 고려하며 팀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우리 팀 이기는 것만 생각했다”고 전했다. 이어 “라이트로 30득점 하고 팀이 졌을 때보다 센터로 1득점 하고 팀이 이기는 게 훨씬 기분 좋더라”라며 웃었다. 삼성화재는 21일 현대캐피탈을 세트스코어 3-1로 이겼다. 이 경기에서 박철우는 1득점 했다. 박철우는 2010년 1월 LIG(현 KB손해보험) 전에서 50점을 뽑아 국내 선수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갖고 있다. 지난 시즌에는 남자부 최초로 통산 5000득점을 달성했다. 센터로 뛰면서 이제 그의 득점 시계는 느리게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박철우는 “기록 욕심은 없다. 나는 다시 제로가 됐다. 팀에 민폐 안 끼치고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공헌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30대 중반까지 코트에 있을 줄 몰랐다”던 박철우의 꿈은 이제 “오래오래 배구 하는 거”가 됐다. “20대 때보다 배구가 더 재밌어요. 나이 들수록 자신감이 더 생겨요. 마흔 살까지 한 번 해볼까요? 하하.” 용인=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2019.11.25 08:39
스포츠일반

[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④] 2002년 '붉은 물결' 대한민국을 휩쓸다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1999~2009 : 불모지에서 태어난 올림픽 스타 그리고 붉은물결 2002년불모지 한국. 그동안 한국에서 약했던 종목에서 슈퍼스타들이 등장해 행복했던 시기다. 또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박태환(수영)박태환의 등장. 한국스포츠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수영 불모지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15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따더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400m 정상에 섰다. 200m에서도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2011년 상하이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00m, 2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장미란(역도)한국 역도 역사의 새로운 신화, 장미란이 썼다.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5년 카타르세계선수권부터 2006년 산토도밍고·2007년 치앙마이·2009년 고양까지 4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역도계에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압권이었다.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 kg·용상 186 kg·합계 326kg을 기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했고, 2위와 격차가 무려 49kg이나 났다. 압도적인 우승, 압도적인 선수였다. -진종오(사격)한국은 세계최고의 권총 사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진종오가 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2연패를 달성하더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일궈냈다. 2010년 뮌헨·2014년 그라나다·2018년 창원 등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로 김수녕과 함께 역대 한국인 올림픽 최다 메달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승민(탁구)한국 탁구의 마지막 자존심, 유승민이다.2000년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승민은 2004년 이집트오픈에서 우승하며 기대를 받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 금메달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등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의 간판 역할을 했다. 유승민 이후 한국은 단 한 번도 올림픽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승엽(야구)국민타자. 이승엽이 아니면 붙을 수 없는 이름이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홈런왕. 1999년 54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한국 역대 최다인 56홈런을 때렸다. KBO 통산 465개의 홈런으로 역대 1위에 오른 이도 이승엽이다. 타점(1495점) 득점(1351점) 등도 1위다. 홈런왕 5회·MVP 5회·타점왕 4회·골든글러브 10회 등 기록이 이승엽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기도 하다. -안현수(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가 전이경이라면 황제는 안현수다.많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선 경험이 있지만 안현수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선수. 16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3년 바르샤바부터 2004년 예테보리·2005년 베이징·2006년 미니애폴리스·2007년 밀라노까지 세계 최초로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1000m·1500m·5000m 계주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500m 동메달도 추가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메달 신기록이다. -김세진(배구)한국 배구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스타, 김세진이다.1995년 실업배구 삼성화재의 창단멤버로 합류해 삼성화재 왕조를 이끈 스타였다. 김세진이 활약하던 시기 배구는 폭발적 인기를 받았다. 김세진을 앞세운 삼성화재는 리그 9연패를 일궈냈다. 배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2001년 창원아시아배구선수권과 2003년 톈진아시아배구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 월드리그에서 베스트 6에 오르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장훈(농구)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빅맨, 단연 서장훈이다.1994년 연세대를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 때부터 그는 국보급 센터였다. 공격과 수비 외곽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 1998년 청주SK 입단 후 서울 삼성·전주 KCC·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다. 1999년 리바운드 상 수상. 프로농구 사상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왕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프로통산 1만3231득점·5235리바운드 기록, 역대 1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이 이끄는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경주(골프)한국 남자 골프의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 최경주다.1999년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PGA투어 자격을 획득했다.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뉴올리언즈 콤팩 클래식에서 한국 첫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2승을 챙겼다. 이후 AT&T 내셔널 등 PGA에서 6회 우승을 더 차지하며 통산 8회 우승을 기록했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잡초 골퍼라 불리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한국 골프의 자존심을 높인 영웅이다. -박지성(축구)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환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그 중심에는 두개의 심장을 가진 박지성이 있었다.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을 꺾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성적인 4강에 진출했다. 거리는 붉은물결르 뒤덮혔고, 선수들은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중 핵심은 박지성. 그는 2005년 잉글랜드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 최초의 잉글랜드 진출. 이때부터 맨유는 국민클럽이 됐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리그 우승 4회 등 총 13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①] '박치기왕' 김일에 열광하고 양정모 첫 올림픽 금에 환호[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②] '슈퍼스타' 차범근·선동열·최동원…서울올림픽 감동에 푹[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③] 스포츠 영웅들, 국민에게 희망을 안기다[창간50 한국스포츠 50년 ⑤] 김연아·이상화·손흥민…천재들의 시대가 열리다 2019.09.23 13:00
스포츠일반

[창간 50 특별기획]한국스포츠 50년, 슈퍼스타 50인, 환희의 50신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 <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89~1999 :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 희망을 안긴 영웅>1997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실의와 고통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안긴 스포츠 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가 곧 희망이자 위로였다. -박찬호(야구)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그는 IMF 위기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긴 영웅이었다.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1997년 14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1998년 15승을 수확하며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2000년 18승을 달성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아시아 최다승이다. 또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동메달 등을 이끌며 야구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세리(골프)IMF 위기의 시절 국민들을 위로했던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박세리다.미국 LPGA 개척자. 1998년 LPGA 무대에 뛰어들었고, 데뷔 4개월 만에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US오픈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특히 US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한 장면은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박세리의 모습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LPGA 25승으로 한국인 최다 우승자 역시 박세리다. -황영조(마라톤)'몬주익의 영웅'의 등장으로 한국 육상은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쳤다.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린 뒤 홀로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힘차게 들고 골인했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육상 첫 올림픽 금메달.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금메달 이후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이후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다시 한 번 포효했고, 1994년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당시 한국 최고 기록인 2분8초09를 기록했다. -심권호(레슬링)심권호라는 이름은 세계 최고라는 의미다.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48kg급 금메달을 목에 건 뒤 1995년 프라하세계선수권,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까지 정상을 차지했다. 48kg급이 폐지되자 54kg급으로 체중을 늘려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를 밟았다. 1998년 예블레세계선수권·1998년 방콕아시안게임·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금메달을 일궈냈다. 하계올림픽 최초 올림픽 2연패, 한국 올림픽 사상 첫 두 체급 석권 그리고 세계 레승링 최초 두 체급 그랜드슬램 달성.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기영(유도)한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는 유도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전기영이다.유도 천재, 업어치기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20세의 나이로 참가한 1993년 해밀턴세계선수권 78kg급에서 우승했다. 한국 역대 최연소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5년 지바세계선수권에서는 86kg급에 도전해 금메달을 차지, 두 체급을 석권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는 1회전을 제외하고 모두 한판승으로 이기며 정상에 섰다. 1997년 파리세계선수권에서도 1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다. -박주봉(배드민턴)배드민턴의 교과서 박주봉.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 배드민턴의 전설이었다.1980년 17세의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됐고, 1982년 덴마크오픈에서 이근구와 한 조로 역대 최연소로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1985년 캘거리세계선수권 우승·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1989년 자카르타세계선수권 금메달·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1991년 코펜하겐세계선수권 1위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6년 '배드민턴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허버트 스칠 상을 수상했다. -전이경(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라 불리는 유일한 선수, 전이경이다. 그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1988년 12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000m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석권, 2관왕에 올랐다. 이어 1995년 요빅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1996년 헤이그, 1997년 나가노까지 개인종합 3연패를 일궈냈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도 1000m와 3000m 계주를 석권하며 한국 여자 최초로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품었다. -허재(농구)농구대통령이 당선됐다. 농구 9단이라 불리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 허재다.중앙대 1학년 시절 농구대잔치에 나서 평균 24득점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어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자 기아 왕조가 구축됐다. 기아의 에이스로 농구대잔치 5연패 등 7회 우승을 일궈냈다. 3번 MVP를 수상했고, 베스트 5에 6회 포함됐다.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1990년 아르헨티나세계선수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넣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홍명보(축구)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다.그는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해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 최초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품었다. 이후 일본 J리그에서 진출하며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한국 대표팀 전설이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 최초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홍명보는 A매치 136경기 출전으로 한국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씨름)이만기를 1인자에서 내려앉히고 새로운 1인자로 등극한 괴물, 강호동이다.이만기의 은퇴는 곧 강호동이라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과 연결된다. 1989년 일양약품에 입단한 20세 강호동은 첫 백두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4강에서 이만기와 첫 공식전에서 맞붙어 2-0으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1990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천하장사에 올라섰다. 이후 백두장사 7회, 천하장사 5회를 차지했다. 최단기간 천하장하 5회라는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이 은퇴하자 씨름의 황금기도 끝났다. <1999~2009 : 불모지에서 태어난 올림픽 스타 그리고 붉은물결 2002년>불모지 한국. 그동안 한국에서 약했던 종목에서 슈퍼스타들이 등장해 행복했던 시기다. 또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박태환(수영)박태환의 등장. 한국스포츠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수영 불모지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15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따더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400m 정상에 섰다. 200m에서도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2011년 상하이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00m, 2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장미란(역도)한국 역도 역사의 새로운 신화, 장미란이 썼다.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5년 카타르세계선수권부터 2006년 산토도밍고·2007년 치앙마이·2009년 고양까지 4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역도계에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압권이었다.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 kg·용상 186 kg·합계 326kg을 기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했고, 2위와 격차가 무려 49kg이나 났다. 압도적인 우승, 압도적인 선수였다. -진종오(사격)한국은 세계최고의 권총 사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진종오가 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2연패를 달성하더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일궈냈다. 2010년 뮌헨·2014년 그라나다·2018년 창원 등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로 김수녕과 함께 역대 한국인 올림픽 최다 메달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승민(탁구)한국 탁구의 마지막 자존심, 유승민이다.2000년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승민은 2004년 이집트오픈에서 우승하며 기대를 받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 금메달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등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의 간판 역할을 했다. 유승민 이후 한국은 단 한 번도 올림픽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승엽(야구)국민타자. 이승엽이 아니면 붙을 수 없는 이름이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홈런왕. 1999년 54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한국 역대 최다인 56홈런을 때렸다. KBO 통산 465개의 홈런으로 역대 1위에 오른 이도 이승엽이다. 타점(1495점) 득점(1351점) 등도 1위다. 홈런왕 5회·MVP 5회·타점왕 4회·골든글러브 10회 등 기록이 이승엽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기도 하다. -안현수(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가 전이경이라면 황제는 안현수다.많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선 경험이 있지만 안현수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선수. 16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3년 바르샤바부터 2004년 예테보리·2005년 베이징·2006년 미니애폴리스·2007년 밀라노까지 세계 최초로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1000m·1500m·5000m 계주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500m 동메달도 추가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메달 신기록이다. -김세진(배구)한국 배구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스타, 김세진이다.1995년 실업배구 삼성화재의 창단멤버로 합류해 삼성화재 왕조를 이끈 스타였다. 김세진이 활약하던 시기 배구는 폭발적 인기를 받았다. 김세진을 앞세운 삼성화재는 리그 9연패를 일궈냈다. 배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2001년 창원아시아배구선수권과 2003년 톈진아시아배구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 월드리그에서 베스트 6에 오르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장훈(농구)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빅맨, 단연 서장훈이다.1994년 연세대를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 때부터 그는 국보급 센터였다. 공격과 수비 외곽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 1998년 청주SK 입단 후 서울 삼성·전주 KCC·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다. 1999년 리바운드 상 수상. 프로농구 사상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왕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프로통산 1만3231득점·5235리바운드 기록, 역대 1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이 이끄는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경주(골프)한국 남자 골프의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 최경주다.1999년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PGA투어 자격을 획득했다.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뉴올리언즈 콤팩 클래식에서 한국 첫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2승을 챙겼다. 이후 AT&T 내셔널 등 PGA에서 6회 우승을 더 차지하며 통산 8회 우승을 기록했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잡초 골퍼라 불리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한국 골프의 자존심을 높인 영웅이다. -박지성(축구)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환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그 중심에는 두개의 심장을 가진 박지성이 있었다.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을 꺾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성적인 4강에 진출했다. 거리는 붉은물결르 뒤덮혔고, 선수들은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중 핵심은 박지성. 그는 2005년 잉글랜드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 최초의 잉글랜드 진출. 이때부터 맨유는 국민클럽이 됐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리그 우승 4회 등 총 13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했다. <2009~2019 : 동계스포츠의 비상 그리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과거 한국의 동계스포츠는 쇼트트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종목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프로스포츠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연아(피겨)한국 동계스포츠의 역사는 김연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눌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김연아가 나온 건 기적이다.김연아는 한국을 넘어 세계 피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하이라이트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김연아는 쇼트 78.50점, 프리 150.06점 총합 228.56점으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올림픽·세계선수권·4대륙 선수권·그랑프리 파이널 등을 모두 제패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역사에 기록됐다. 11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상화(스피드스케이팅)'빙속여제' 이상화를 빼놓고 한국 동계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2010년 밴쿠버올림픽 여자 500m에서 76초09로 우승, 한국 여자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74초70, 올림픽 신기록으로 2연패에 성공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3개 대회 연속 메달을 딴 선수로 남았다. 2013년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나온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윤성빈(스켈레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썰매 종목 금메달을 딴 주인공, 윤성빈이다.한국 스켈레톤의 간판인 그는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1∼4차 레이스에서 무려 3차례나 트랙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1∼4차 합계 3분20초55로 정상을 차지했다. 한국과 아시아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켈레톤 불모지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윤성빈. 그의 헬멧에 그려진 아이언맨처럼 그는 한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다. -양학선(체조)한국 체조의 새로운 역사, 도마의 신이 창조했다. 양학선이다.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2011년 도쿄세계선수권 우승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양학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신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구에서 단 한 명만 할 수 있는 최고난위도 기술 '양학선'을 앞세워 도마 금메달을 차지했다. 16.533점. 압도적 우승이었다. 한국 체조 역사상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2013년 앤트워프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황경선(태권도)태권도 종주국 한국. 수많은 선수가 세계 정상에 섰다. 그중 가장 많은 최초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이는 '태권여제' 황경선이다.18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67kg에 나서 동메달을 차지한 그는 2005년 마드리드세계선수권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그리고 2007년 베이징세계선수권까지 재패한다. 남은 건 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멈추지 않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태권도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최초의 올림픽 3회 연속 진출을 일궈냈다. -박인비(골프)미국 LPGA에는 한국 여성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 최선봉에 자리를 잡은 스타, 박인비다.골프 여제의 2008년 US오픈 우승. 박세리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깨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US오픈 총 2회 우승 등 메이저대회에서 7회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최고 기록이다. LPGA 통산 19승으로 박세리에 이은 2위다. 56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유지했고, 4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아시아 최초로 달성하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 역시 박인비 품에 안겼다. -정현(테니스)2018년 1월, 한국에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그 바람은 정현이 일으켰다.정현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2018년 호주오픈 1~3라운드에서 미샤 즈베레프·다닐 메드베데프·알렉산더 즈베레프를 연이어 꺾으며 기대를 받았다. 16강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노박 조코비치.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 한국에 정현 신드롬이 일어났다.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마저 넘으며 4강에 올라섰다. 4강에서 로저 페더러를 만나 부상으로 기권했다. -김연경(배구)한국 여자배구에 이렇게 독보적인 선수는 없었다. 김연경이다.흥국생명에 입단한 2005년. 득점상·공격상·서브상·신인왕·정규리그 MVP·챔피언결정전 MVP까지 싹쓸이한다.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인 지 알 수 있는 기록. 이후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올랐다. 2009년 일본 JT마베라스 유니폼을 입은 뒤 2011년 터키 페네르바체로 이적했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다. 가는 팀마다 우승으로 이끌면서 가치는 올라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배구대표팀에서도 기둥이었다. -류현진(야구)21세기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류현진이다.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자마자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석권한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가 됐다.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로 이적한 첫해 14승 올리며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후 꾸준함을 보이다 2019년 평균자책점 전체 1위를 기록, 올스타전 선발로 나서는 등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야구대표팀 역사와도 함께 했다. -손흥민(축구)지금 한국 축구는 '손흥민의 시대'다.2010년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레버쿠젠을 지나 201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세계 톱클래스 공격수로 거듭났다. 특히 2018~20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우승후보 맨체스터 시티를 침몰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손흥민을 앞세운 토트넘은 최초로 결승에 올랐다. 축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주인공.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2019.09.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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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쳐야 찬다' 양준혁X심권호 "김세진·신태용·임오경 新멤버로 추천"

'뭉쳐야 찬다' 양준혁과 심권호가 추천하고 싶은 멤버로 김세진, 18일 오전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JTBC 신규 예능 '뭉쳐야 찬다' 기자간담회가 진행됐다. 성치경 CP, 김용만, 김성주, 안정환, 이만기, 허재, 양준혁, 이봉주, 심권호, 진종오, 김동현이 참석했다. 양준혁이 스포츠 선수 중 추천하고 싶은 인물에 대해 "배구선수 출신 김세진을 골키퍼 시키면 잘할 것 같다. 그리고 사회인 야구단 같은 경우 야구선수 출신이 한, 두 명씩 뛴다. 축구선수도 함께 뛰었으면 좋겠다. 친구 신태용이 요즘 놀고 있더라"고 추천했다. 심권호는 "핸드볼에 임오경 누나 진짜 힘이 세다. 축구도 잘한다. 스트라이커다. 진짜 파워가 넘쳐서 남자들도 압도할 것이다. 형들보다 잘한다"고 칭찬했다. '뭉쳐야 찬다'는 '뭉쳐야 뜬다' 원년 멤버 김용만, 김성주, 안정환, 정형돈이 대한민국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던 스포츠 전설들과 조기축구팀을 결성해 도전하는 본격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이다. 2002년 월드컵 영웅 안정환이 감독으로 나서고, 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의 스타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축구라는 새로운 종목에서 함께 팀을 이뤄 전국의 숨은 고수들과 대결을 펼친다. 지난 13일을 시작으로 매주 목요일 오후 11시에 방송된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사진=김민규 기자 2019.06.18 12:07
스포츠일반

'응답하라 1996'...전설의 배구 '오빠'들이 뭉쳤다

'컴퓨터 세터' 신영철(52·한국전력 감독), '임꺽정' 임도헌(43·삼성화재 감독), '불꽃남자' 김상우(42·우리카드 감독), '갈색폭격기' 신진식(41·삼성화재 코치), '스커드 미사일' 후인정(42·한국전력 코치), '야전사령관' 최태웅(40·현대캐피탈 감독). 여기에 '월드스타' 김세진(42·OK저축은행 감독)까지. 한국 배구를 대표하는 레전드 7명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4일 서울 화곡동 88체육관에서 진행된 예능 프로그램 '우리동네 예체능'에 출연했다 . '우리동네 배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김세진 감독의 요청으로 모임이 성사됐다. 각자 소속팀을 이끌고 있는 전설들은 배구 저변확대와 V리그 흥행을 위해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다. 한국 여자배구의 '작은 거인' 장윤희(MBC 해설위원)까지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한국 배구 르네상스 이끌다 한국 배구 전설들은 '옛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이들이 현역 시절 활약한 1990년대는 한국 배구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실업과 대학팀이 어우러진 '슈퍼리그'는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며 흥행 가도를 달렸다. 노련한 실업팀과 패기의 대학팀의 맞대결은 최고의 볼거리로 꼽혔다. 남자 국가대표팀은 세계 강호를 상대로 선전을 펼쳤다. 1996년 애틀란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잇따라 진출하면서 한국 배구를 세계에 알렸다. 1990년대 한국 배구의 중심에는 신영철 감독이 있다. 그는 대표팀 주전 세터로 1994년 세계배구선수권 8강, 1995년 월드리그 6강 진출을 이끌었다. 정확한 볼배급으로 '컴퓨터 세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표팀 공격수들은 신 감독의 손 끝에서 나오는 공을 때렸다. 신 감독은 "내가 공을 잘 올린 것보다 후배들이 잘 때려줬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며 겸손해했다. 신 감독이 현역에서 물러날 무렵 김세진·김상우·박희상·신진식 등 '젊은 피'가 무섭게 코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이들의 활약으로 한국 배구는 전성기를 맞았다. 한양대와 성균관대, 삼성화재와 현대자동차서비스(현 현대캐피탈)의 라이벌 구도는 배구의 재미를 더했다. 임도헌 감독은 "라이벌전이 열리는 날에는 배구장 열기가 정말 대단했다"며 "대학 배구의 인기도 정말 높았다. 대학시절 모교(성균관대) 경기에 많은 팬들이 와서 응원을 했다"고 회상했다. 1990년대 스타들은 여성 팬들의 우상이었다. 신 감독은 "김세진·김상우·신진식이 모이면 여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면서 "얼굴이 잘 생긴 김상우 감독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김세진 감독은 워낙 말을 잘해 인기를 끌었다. 신진식 코치는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만 두 감독에게 밀려 3인자에 머물렀다"며 웃었다. 신진식 코치는 "두 감독에 비해 키가 작아서 그렇다"며 한숨을 쉬어 좌중을 폭소케 했다. 신진식 코치의 신장은 188cm다. ◇최고 명승부는 1996년 한일전 전설들이 추억하는 최고의 명승부는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 한일전이다. 1997년 대표팀에 데뷔한 최태웅 감독을 제외하고 6명이 태극마크를 달고 활약했다. 올림픽 지역예선은 한국에서 1차 리그가 열렸고, 2차 리그는 일본에서 개최됐다. 한국은 잠실에 열린 1차 리그에서 일본에게 0-3으로 완패를 당했다.대표팀은 '배수의 진'을 치고 2차전이 열리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중국에게 2연승을 거두면서 기사회생에 성공한 한국은 중국에게 패한 일본과 올림픽 진출권을 놓고 마지막 일전을 벌였다. 한국은 나카가이치 유이치(49)가 이끄는 일본 배구에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생' 신진식의 깜짝 활약에 1~2세트를 앞서 나갔다. 신영철 감독은 "신진식 코치가 공을 올리는 족족 공격을 성공시켰다. 당황하던 일본 선수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신진식 코치는 "당시 컨디션이 정말 좋았다. 신 감독님이 워낙 좋은 공을 올려줘서 좋은 공격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은 일본에게 3세트를 내줬지만, 전열을 가다듬고 4세트에서 마침내 승부의 마침표를 찍었다. 마지막 포인트는 김세진 감독의 블로킹이었다. 김 감독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교체로 나섰다. 마지막 1점을 남겨놓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막아내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서로 얼싸 안으며 정말 기뻐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한국 배구가 최근 일본에게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기본기에서 차이가 난다.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레전드, 20년 만에 코트에 모이다 전설들은 경기를 앞두고 준비를 단단히 했다. 신영철 감독은 "현역 시절에도 해보지 않았던 무릎 테이핑을 했다. 무릎이 버텨줄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신진식 코치가 손가락을 감싸는 밴드를 꺼내자 너도 나도 손을 벌렸다.김상우 감독은 "선수 생활을 하면서 부상을 많이 당했다. 발목은 더 다치면 안된다. 감독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며 너스래를 떨었다. 후인정 코치는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5개월 동안 쉬어서 감각이 돌아올 지 모르겠다"며 걱정했다.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전설들은 시원한 스파이크를 연신 코트에 꽂았다. 세터를 맡은 신영철 감독은 변함없는 실력을 뽐내며 공을 고르게 분배했다. 라이트 공격수로 나선 후인정 코치는 '미사일' 같은 스파이크를 날렸다. 임도헌 감독과 신진식 감독은 공·수에서 변함없는 기량을 선보였다. 장윤희 위원은 가벼운 몸 놀림으로 코트를 누볐다. '막내' 최태웅 감독이 레전드팀 사령탑을 맡았다. 그는 "작전은 준비하지 않았다. 선배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것 같다"며 웃었다.전설들이 20년 만에 코트에 모인 이유는 하나 뿐이다. 배구 '발전'을 위해서다. 후인정 코치는 "김세진 감독께서 좋은 취지로 출연을 요청했다. 당연히 와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현역에서 물러나 지도자를 해보니 유소년 배구가 너무 취약하더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배구가 어렵지 않은 스포츠라는 걸 알리고 싶다. 프로그램을 통해 동호인(사회인) 배구팀이 많다는 걸 듣고 놀랐다. 배구 저변을 확대를 위해 배구인들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병민 기자 2016.05.05 06:00
스포츠일반

김세진, 쇼킹 발언 “솔로였다면 이국주와 만났을 것”

배구선수 출신 김세진이 개그우먼 이국주에게 호감을 나타냈다.김세진은 17일 방송되는 OBS '올리브'에 출연해 과거 선수 시절 인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경찰호위가 없으면 통행이 불가능했을 정도였다"고 자랑했다.이국주는 이날 김세진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며 구애 활동에 나섰지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바로 큰 실망감을 드러냈다. 김세진은 이국주보다 나은 여자 친구의 장점을 묻자 "그런 건 없다. 솔로였다면 진지하게 이국주와의 만남을 고려했을 것이다"고 전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방송은 17일 오후 11시 5분. 김진석 온라인 뉴스 기자 superjs@joongang.co.kr 2013.01.16 15:44
연예

김세진 “최희 아나운서와 열애설 오해다” 해명

국가대표 배구선수 출신 김세진이 KBS N 아나운서 최희와의 열애설을 해명했다.김세진은 30일 방송된 MBC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 출연해 MC 윤종신이 '최희 아나운서가 귓속말로 고백했다?'고 묻자 '같은 방송사에서 일을 하다 보니 해설자와 아나운서로 친한 사이다'라며 연인사이가 아니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지난해 4월 열린 프로배구 챔피언 결정전을 함께 관람하며 귓속말하는 다정한 모습이 공개돼 열애설이 불거졌다. 이어 김세진은 '응원 소리가 큰 경기장에서 최희 아나운서가 귓속말로 '위원님 아이스크림 드실래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수습기자가 찍어 열애설로 기사를 냈다'며 '그 기자가 다니는 언론사 선배에게 전화로 항의했더니 오히려 그 기자가 사과를 했다'고 털어놨다. 또한 '워낙 황당한 기사라 주변 사람들도 믿지 않았다'며 주변 반응을 전하기도 했다. 성형모 기자 hmseong@joongang.co.kr사진=MBC 캡처 2012.05.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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