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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40년팬' 강주용 씨 "99년 불씨가 2025년 불꽃으로" [IS 인터뷰]

강주용(50) 씨는 40년 한화 팬이다.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빙그레 이글스를 응원하던 기억이 그 시작이었다. 1986년 창단한 빙그레가 이듬해 1군에 진입하고, 94년 한화로 이름을 바꾸는 동안의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한화가 99년 한국시리즈에서 처음 우승하는 장면은 그의 가슴에 작은 불씨를 심었다. 2025년 9월, 그는 한화 유니폼을 챙겨 입고 충북 진천 집을 나섰다.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 터미널에서 내려 한화생명 볼파크로 가는 길부터 응원의 시작이다. 선수들의 훈련을 보고, 경기 때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부른다. 강주용 씨는 “2025년 한화가 LG 트윈스와 1·2위를 경쟁하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 아직도 ‘꿈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며 웃었다. 그의 일상은, 어쩌면 인생은 이글스로 꽉 채워져 있다.시작은 작고 낡은 야구공 하나였다. 대전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이웃이 장종훈(현 KBO 총재 특별 보좌) 가족이었다. 강주용 씨는 “내 아버지와 장종훈 형님의 아버지가 형님·동생 하며 지내셨다. 그분이 ‘내 아들이 세광고 4번 타자’라고 자랑하시며 공을 선물해 주셨다”고 떠올렸다.이웃집 형이었던 장종훈이 ‘연습생 신화’를 쓰고, 홈런왕에 오르는 과정을 보며 강주용 씨는 운명처럼 한화를 사랑하게 됐다. 그는 “90년대에는 주말 경기만 TV 중계로 볼 수 있었다. 평일에도 야구 소식이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일간스포츠를 구독하셨다. 매일 신문 기사를 보며 야구 갈증을 풀었다”고 떠올렸다.사회생활을 하며 자유롭게 야구장을 드나들기 시작한 그가 푹 빠진 스타가 김태균(현 KBS 해설위원)이었다. 강주용 씨는 김태균 팬카페 운영자로 활동했다. 강주용 씨는 “2001년 8월 28일 신인이었던 김태균이 연장 10회 끝내기 홈런을 터뜨려서 한화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장면이 생생하다. 그 타구 궤적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 기사 제목이 ‘열아홉 살 김태균, 끝냈다’였다”며 웃었다.강주용 씨는 “시즌 뒤 공식 팬 미팅뿐 아니라 시즌 중에도 김태균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단지 만남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함께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고 했다. 강주용 씨를 비롯한 한화 팬들은 10여 년 전부터 충청 지역 보육원, 장애인 보호시설에서 봉사했다. 이 활동에 김태균도 함께 참여하기도 했고, 기부금도 쾌척했다. 강주용 씨는 “2007년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나자, 팬클럽 회원들이 가서 돌을 닦았다”고 회상했다. 야구팬이 아니었으면 무관심했을지도 모르는 사회 이슈에 ‘김태균 팬클럽’, ‘한화 이글스 팬’으로서 동참한 것이다.강주용 씨를 비롯한 보살팬에게 한화는 ‘정체성’이다. 그게 늘 자랑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는 “아무래도 팀 성적이 늘 하위권이니까 응원하는 데도 힘이 빠졌다. 모든 걸 초월하는 경지였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침체의 터널은 2006년 시작됐다. 김인식 감독이 이끈 한화는 그해 준플레이오프에서 KIA 타이거즈, 플레이오프에서 현대 유니콘스를 꺾었다. 그러나 삼성 라이온즈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승 1무 4패로 패퇴했다. 강주용 씨는 “1차전을 빼고 모든 경기를 직관했다. 6차전 2-3 패배가 너무 아쉬웠다”며 “9회 말 2사 만루에서 3번 타자 제이 데이비스가 오승환에게 삼진을 당했다. 4번 타자 김태균의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데이비스가 침착하게 볼을 골라냈으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2006년 이후로 그렇게 오랫동안 가을 야구를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한화 팬’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때도 있었다. 야구장에 자주 간 덕에 선수들과 친분도 생기는 등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지만, 그들 유니폼을 입고 다니기가 껄끄럽기도 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한때 강주용 씨는 미국 메이저리그(MLB)팀 유니폼, 일본 프로야구(NPB)팀 유니폼을 입고 대전야구장에 왔다.한화 팬들의 마음고생은 2025년으로 끝났다.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야구장에서 승리를 즐길 때까지 한화 유니폼이 부끄러운 순간은 없어졌다. 강주용 씨는 “상상하지 못한 순간이 왔다. 올해 2등만 해도 한화가 정말 잘한 거”라면서도 “그래도 이 기회에 우승을 꼭 해보고 싶다. 코디 폰세, 라이언 와이스 등 외국인 투수들이 내년에도 한화에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류현진·채은성 등 베테랑들도 한 살씩 먹지 않나”라고 되물었다.인터뷰가 길어질수록 강주용 씨의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우승을 염원하는 팬들의 염원이 행여 선수들에게 부담을 줄까 봐 염려했다. 그는 “한화 덕분에 너무나 행복했다. 선수들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봄과 여름에 그랬듯, 가을에도 멋진 경기를 기대한다”고 말을 맺었다.대전=김식 기자※ 이 인터뷰는 일간스포츠가 발간한 '한화이글스 포토북'에도 실려 있습니다. 네이버 플러스 스토어에서 '한화이글스 포토북'으로 검색하면 구입이 가능합니다. 2025.10.0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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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도전' LG, 최종전서 1990·1994 챔피언 유니폼 입고 뛴다

LG 트윈스가 '챔피언 유니폼'을 착용하고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우승에 도전한다. LG는 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리는 NC 다이노스와 홈경기에서 1990년·1994년 우승의 기운을 담은 '클래식 유니폼'을 착용한다. 클래식 유니폼은 1990년대 유니폼 스타일의 티셔츠형으로 제작됐다. 가슴에는 LG 트윈스 클래식 로고로, 소매에는 클래식 쌍둥이 앰블럼 패치를 넣었다. LG는 이날 경기에서 최소 무승부만 기록해도 2위 한화 이글스의 경기 결과에 관계 없이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LG는 이날 2026 신인 선수들의 기운도 받는다. 1라운드에 지명된 투수 양우진(경기항공고)이 시포자로, 2라운드에 지명된 박준성이 시구자로 나선다. 5회 말 종료 후 클리닝타임에는 2026년 입단 예정인 신인 선수 11명이 팬들에게 첫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또한 LG는 정규시즌 팬들의 응원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경기 전에는 1루 내야 및 외야 입장 게이트에서 KBO 리그 최다 관중 돌파 기념컵 2600개를 선착순으로 배포하고 경기 중 클리닝 타임에는 추첨을 통해 'LG 스탠바이미2' 4대를 증정한다.클래식 유니폼은 10월 1일 오후 2시부터 LG트윈스 어패럴과 프로스펙스 자사몰에서 온라인으로 판매되며 10월 1일 오후 4시부터는 잠실야구장 LG트윈스 어패럴샵에서도 판매할 예정이다.이형석 기자 2025.10.0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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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오승환] 56년 신문으로 돌아본 오승환의 21년 "저도 정말 오래 뛰었네요"

'끝판대장' 오승환(43·삼성 라이온즈)이 21년 간의 프로 생활을 마치고 30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리는 은퇴식을 통해 유니폼을 벗는다. 올해 창간 56주년을 맞은 본지는 최근 오승환과 만나 옛날 기사를 읽으며 지난 21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2004년 9월 17일: 단국대 6년 만에 추계리그 우승, 오승환 최우수선수상본지에 오승환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2004년 9월 17일이었다. 오승환이 몸담고 있던 단국대가 6년 만에 추계리그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과 함께, 오승환이 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오승환은 "처음으로 내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된 대회였다"라며 "(팔꿈치 수술 이후) 4학년 때부터 조금씩 던지면서 삼성까지 오게 됐다. 1·2학년 땐 정말 힘들게 재활 훈련을 했는데, 고생 끝에 우승도 했고, 최우수선수상(MVP)도 받아서 의미가 뜻깊었다"라고 돌아봤다. 오승환은 고등학교 시절 허리 부상, 대학교 시절 팔꿈치 수술 시련을 모두 이겨내고 최고의 투수 반열에 올랐다. ▶2005년 10월 22일: 한국시리즈(KS) MVP 오승환 "팬들의 가슴에 스트라이크 던지고 싶다."2005년 데뷔 해, 오승환은 그해 한국시리즈(KS)에서 팀의 우승을 매조짓는 세이브를 기록했다. KS 최우수선수(MVP)도 그의 몫이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팬들의 가슴에 스트라이크를 던지고 싶다"라며 "팬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선수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를 돌아본 오승환은 "은퇴를 선언한 지금 돌아보면, 팬들의 가슴에 더 많은 스트라이크를 던지고 싶었는데 아쉽다"며 "팬분들께서 좋게 봐주신 덕분에 많은 별명도 생기고 삼성 투수 최초로 영구 결번(21번)도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항상 감사드린다"라고 전했다. ▶2005년 11월 1일: 신인왕 오승환, 10년 만에 신인왕 배출그해 오승환은 신인상을 받았다. 삼성 선수로는 1995년 이동수 이후 10년 만의 신인왕이었다. 당시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10년, 15년 동안 흐트러짐 없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한 그는 21년 동안 마운드를 지키며 최고 마무리 자리에 올랐다. 오승환은 "삼성이라는 좋은 팀에 와서 이기는 경기도 많이 했고, 시즌 중반에 마무리까지 맡으면서 신인왕도 타고 KS MVP도 했다. 이런 팀에서 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사실 데뷔해부터 마무리 보직을 맡을 거란 상상을 하지 않았다는 그는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던져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선동열 감독님께서 좋게 봐주신 덕분이다"라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2006년 11월 18일: 강행군 오승환 무쇠 체력 비결2006년 오승환은 47세이브를 기록하며 단일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을 경신했다. 지난해 KS(10월)와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11월)부터 올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프로야구 일정(3~10월)-KS(10월)-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11월)-도하 아시안게임(12월)이라는 강행군을 모두 펼치면서도 굳건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태연했다. 오승환은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오면서 먹는 것도 달라지고 훈련도 체계적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력이 붙은 것 같다"라며 "그리고 그땐 워낙 운동량이 많았다. 원래 삼성이 운동량이 많은 걸로 유명했다. 이런 훈련을 통해 몸이 단련되고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8년 9월 24일: 3년 연속 40세이브 도전, 오승환 기록에 ML도 놀란다2008년 오승환은 '세계 신기록'에 도전했다. 3년 연속 40세이브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해 39세이브로 시즌을 마치면서 도전에 실패했다. 그러나 오승환은 "하나도 안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기록에 워낙 둔했다"라고 말한 그는 "일본의 이와세 히토키가 보유하고 있던 단일 시즌 아시아 최다 세이브 기록(종전 46개)에 다가설 때(2006년) 처음으로 '기록을 깨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본 야구가 역사가 긴데, 마무리 투수 기록은 내가 깨고 싶다고 생각했다"라며 "아시아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도 이와세(종전 407개)가 갖고 있어서 욕심이 있었다"라고 전했다. 해당 기록은 2006년 47세이브, 2024년 408번째 세이브로 모두 오승환이 갈아치웠다. ▶2011년 2월 21일: 다시 보는 '오승환표 돌직구'2009년과 2010년은 오승환에게 시련의 한 해였다. 2009년 7월 어깨 인대 부상으로 도중 낙마했고, 2010년엔 6월 팔꿈치 수술로 도중 하차했다. 하지만 오승환은 절치부심으로 이겨냈다. 당시 기사에서 그는 시즌 전 전지훈련에서 "예전에는 최고 마무리로 불렸을지 모르지만 지난 2년 동안 (타자들에게) 만만한 투수가 됐다"라며 "구속, 구위, 제구 모두 만족스럽다. 자신감을 찾아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해 그는 47세이브로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이에 오승환은 "그때 무너졌으면 난 선수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불펜 투수가 4~5년을 꾸준하게 한 선수가 별로 없었다. 그걸 깨고 싶었고,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라고 돌아봤다. 그는 "'오승환은 끝났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보란듯이 부활을 증명하고 싶었다"라며 부활의 원동력을 설명했다. ▶2011년 10월 3일: 47세이브 오승환, 4관왕 윤석민 추월?2011년 47세이브를 올린 그는 MVP 후보에도 올랐다. 하지만 경쟁자들이 쟁쟁했다. 선발 투수로서 4관왕(평균자책점. 다승, 탈삼진, 승률)을 확정한 윤석민(당시 KIA 타이거즈)과 팀 동료이자 타격 3관왕(홈런, 타점, 장타율)인 최형우가 경쟁자였다. 결국 윤석민이 MVP를 수상했고, 오승환은 득표 2위에 머물렀다. 오승환이 MVP를 수상했다면 그는 1999년 구대성(당시 한화 이글스)에 이은 두 번째 불펜 투수 출신 MVP가 될 수 있었다. 당시를 돌아본 오승환은 "아쉬운 건 없었다. 앞으로 후배들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라면서도 "사실 지금 상황(등판 트렌드)에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예전에는 4연투가 일반적이고 등판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지 않나. 몸 생각을 많이 한다. 한 시즌 50세이브도 마찬가지다. 기록을 세우긴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2013년 10월 29일: 기막힌 오승환, 연투에도 쌩생한 돌직구전성기 시절인 2012년과 2013년은 '돌부처' 표정 만큼이나 체격과 체력 모두 '돌덩이'와 같았던 시절이다. 2012년엔 불펜에서 공 8개만 던지고 등판한다는 기사가 있었고, 2013년 KS에선 2차전 4이닝 53구 뒤 이틀 뒤인 3차전에도 등판해 세이브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었다. 당시 코야마 진 삼성 트레이닝 코치는 "선천적으로 뛰어나고 후천적으로 다듬은 몸"이라며 오승환의 몸을 극찬했다. 오승환은 "내가 워낙 워밍업이 빨리 되는 스타일이다"라고 웃으면서 루틴에 대해선 "등판 예정 날엔 보강 훈련을 필수로 했다. 경기 후에 꼼꼼히 하면서 몸을 만들었다"라고 돌아봤다. 이후 미국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해서야 다른 외국 선수들이 하는 것을 보고 웨이트 훈련에 더 열을 올렸다고. 2013년 KS에 대해선 "그땐 공을 던지면서 힘들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우승이 눈앞이라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돌아봤다. ▶2013년 12월 5일: 한신 오승환의 첫 출발 "국민이 응원한다는 말, 울컥했습니다"▶2016년 1월 13일: 세인트루이스 3년 총액 1100만 달러 계약, 불펜 보스 오승환오승환은 2014년부터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 2년간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에서 뛰었고, 이후 2016년부턴 미국 MLB에서 활약하며 4시즌을 소화했다. 일본에서도 '돌부처' 끝판대장 이미지를 이어갔고, 미국에서도 42개의 세이브를 올리며 맹활약했다. 오승환은 당시의 해외 경험이 큰 자양분이 됐다며, 후배들에게도 해외 진출을 적극 권유했다. 그는 "해외 경험을 통해 스스로 더 발전할 수 있고, 팬분들에게도 '다양한 리그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릴 수 있다. 한국야구의 질도 덩달아 더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다"라며 도전을 바랐다. ▶2019년 8월 12일: 오, 돌아왔어? 올해 세 번째 2만 관중에 유니폼 매진까지▶2025년 8월 8일: 굿바이 끝판대장오승환은 2019년 8월 삼성과 계약을 맺고 한국 무대에 돌아왔다. 해외 원정도박 출전 정지 징계를 마치고 돌아온 2021년엔 44개의 세이브를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조금씩 구위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후배들에게 마무리 투수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2025년엔 시범경기 도중 모친상 아픔을 겪었고, 이후 잔부상이 겹치며 2025년 8월 은퇴를 선언했다. 2020년 컴백 당시를 돌아본 오승환은 "많은 팬이 잊지 않고 응원해 주신다는 생각에 정말 감사했다. 와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고 돌아봤다. 이후 부진에 대해서는 "나도 나이를 먹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어 구위가 떨어졌다는 걸) 부인할 필요는 없다"며 "나도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여러 시도도 해봤다. 투구 스타일도 많이 바꿨다. 하지만 결국 나이를 이기기는 힘들었다"라며 아쉬워했다. 21년간의 신문을 돌아본 오승환은 "당시가 새록새록 기억이 나서 재밌었고 조금 뭉클하기도 하다. 내가 '오래 뛰었구나'라는 생각도 든다"라며 "좋은 팀에서 뛰면서 팬들에게 많은 별명과 사랑을 얻었다. 정말 감사했고, 남은 시즌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선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겠다"라며 인사를 건넸다. 윤승재 기자 2025.09.30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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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가 묻고 오승환이 답한다④ 오승환 모의고사, "제 영광의 순간, 위기의 순간은요" [창간56]

신문에는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넘어 활자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56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일간스포츠는 21년 동안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오승환을 주목하고 '끝판대장'의 스토리를 활자에 꾹꾹 눌러 담아 독자들과 공유했습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오승환의 길고, 멋진 여정을 일간스포츠가 옛 신문 기사를 통해 돌아봤습니다. 신문이 묻고, 오승환이 답하는 형식입니다.①"팬들의 가슴에 더 많은 스트라이크 던지고 싶었는데.."②"2011년 오승환은 끝났다는 말, 보란 듯이 부활하고 싶었죠"③"마무리 투수, '내 손으로 끝낸다' 자부심 큰 보직"④오승환 모의고사, "제 영광의 순간, 위기의 순간은요" 1. 나는 1982년생 동갑내기 타자 중 _가 가장 두렵다.1) 김태균 2) 이대호 3) 정근우 4) 추신수 5) 기타오승환(이하 오) : 다들 너무 좋은 선수들이라 한 명을 꼽기가 어렵다. (김)태균이나 (이)대호는 '한 개의 실투가 장타로 연결된다'는 두려움을 주는 타자다. 정근우는 내보내기만 하면 언제든지 도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까다롭다. (추)신수는 타자로서의 모든 툴을 갖고 있는 선수다. 한 명을 고르기 어렵다.2.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록은 _다.1) KBO리그 28경기 연속 세이브2) KBO리그 최연소/최소경기 200세이브3) KBO리그 한 시즌 최다 47세이브4) NPB 클라이맥스 시리즈 6경기 전 경기 등판, 시리즈 MVP5) MLB 42세이브오 : 한 시즌 최다 47세이브가 소중하다. (50세이브를 못해서 아쉽지 않은가) 그런 건 없다. 그저 (한국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는 자부심이 있다. 3. 내 야구인생 최고의 순간은 _다.1)2005년 한국시리즈 우승2)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3)2011년 한국시리즈 우승4)미국 메이저리그 진출5)한미일 통산 500세이브 달성6)기타오 : 한국시리즈(KS) 우승이다. 연도와 상관없이 모든 KS 우승이 기억에 남는다. 모든 우승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던 기억이다. 4. 전성기 구위로 제대로 붙어보고 싶은 타자는?1)김도영2)안현민3)최형우4)추신수5)기타오 : 다 해보고 싶긴 한데, 안현민은 아직 못 붙어봐서 궁금하다. (추)신수도 전성기 구위로 맞붙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5. 강렬했거나 아쉬웠거나,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국제대회는_다1)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2)2006년 도하아시안게임3)2008년 베이징 올림픽4)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5)2021년 도쿄 올림픽오 : 첫 번째 WBC가 강렬했던 것 같다. 프로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큰 관심을 받았던 대회였고, 그렇게 큰 국제대회를 나간 것도 처음이었다. 6.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선배는 _다1)선동열 2)김용수 3)트레버 호프만 4)기타오 : 선동열 감독님이다. 어릴 때부터 워낙 좋아했던 투수라서 항상 닮고 싶은 선배이자 롤모델이었다. 7.나는 다시 태어나면 _를 해보고 싶다.1) 또 야구 2) 축구 3) 골프 4)다른 종목 혹은 다른 직업오 : 야구긴 한데, 다시 야구하면 이번엔 타자를 해보고 싶다. 아니면 선발 투수. 잘할 수 있지 않을까(웃음).8. 나는 1~2년 안에 _를 꼭 해보고 싶다.1) 해외 코치 연수2) 해설위원3) 야구 예능 출연4) 기타오 : 한 번 씩은 다 해보고 싶다. 욕심이 많다. 9. 나의 가장 큰 위기는 _였다.1) 대학 팔꿈치 수술2) 2010년 팔꿈치 수술3) 2010년 한국시리즈 실점4) 2024년 부진오 : 대학 시절 받았던 팔꿈치 수술이다. 야구를 계속할 수 있을지 기로에 서 있다. (13년 전 같은 질문에는 2010년 팔꿈치 수술이라고 답했는데) 프로에 와서 받은 첫 수술이고, 생애 두 번째 큰 수술이라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하지만 야구인생 전반적으로 돌아봤을 땐 대학교 때가 가장 큰 위기였던 것 같다. 10. 마무리 후배들의 닮고 싶은 강점은?1) 박영현의 _2) 조병현의 _3) 김택연의 _4) 김서현의 _오 : 네 선수 모두 은퇴 기자회견 때 언급했던 선수들이다. 사실 김원중, 정해영 두 후배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해 미안했다. 여섯 선수 모두 특징이 다 다른데, 닮고 싶은 강점이라면 모두 '나이'가 아닐까 생각한다(웃음). 다들 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잠재력'이 이들의 강점이고, 내가 닮고 싶은 점이기도 하다. 부럽다(웃음). 윤승재 기자 2025.09.2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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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가 묻고 오승환이 답한다③ "마무리 투수, '내 손으로 끝낸다' 자부심 큰 보직" [창간56]

신문에는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넘어 활자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56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일간스포츠는 21년 동안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오승환을 주목하고 '끝판대장'의 스토리를 활자에 꾹꾹 눌러 담아 독자들과 공유했습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오승환의 길고, 멋진 여정을 일간스포츠가 옛 신문 기사를 통해 돌아봤습니다. 신문이 묻고, 오승환이 답하는 형식입니다. ①"팬들의 가슴에 더 많은 스트라이크 던지고 싶었는데.."②"2011년 오승환은 끝났다는 말, 보란 듯이 부활하고 싶었죠"③"마무리 투수, '내 손으로 끝낸다' 자부심 큰 보직"④오승환 모의고사, "제 영광의 순간, 위기의 순간은요" ▶2013년 12월 5일: 한신 오승환의 첫 출발 "국민이 응원한다는 말, 울컥했습니다"기사 본문 : "한 팬으로부터 '지금까지는 삼성 팬들만 오승환을 응원했다고 들었는데, 이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오승환을 응원해 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뭔가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에서도 최고 마무리가 되고 한신 우승에 큰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다."오승환(이하 오): 대표팀에 나가면 소속팀을 막론하고 모든 한국팬들의 응원을 받지 않나. 삼성이 아닌 외국 리그에서 뛰기 때문에 한국에서 야구를 좋아해 주시는 팬분들의 응원을 다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듣는 순간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감사했다. ▶2016년 1월 13일: 세인트루이스 3년 총액 1100만 달러 계약, 불펜 보스 오승환"'끝판왕' 오승환이 세인트루이스 불펜 투수 최고 대우를 받는다"오: (일본리그와 메이저리그를) 단계별로 잘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많은 분이 '일본을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 바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는데, 반대로 일본에서 2년을 잘 뛰었기에 미국에서도 그렇게 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후배들에게도 해외 진출을 강력하게 권유하는 편인가) 선택은 선수들이 하는 거지만, 해외 경험은 해보면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스스로 발전할 수 있고, 팬분들에게도 '다양한 리그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릴 수 있다. 한국야구의 질도 덩달아 더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삼성에서도 원태인 등 해외 진출을 원하는 선수가 있는데) 해외 진출에 대한 이야기는 가볍게 주고받는다. 개인적으로는 원태인이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선수에게 얘기도 하고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많이 얘기한다. 가서 도전을 했으면 좋겠다고. ▶2019년 8월 12일: 오, 돌아왔어? 올해 세 번째 2만 관중에 유니폼 매진까지"구단 관계자는 "보통 하루 예매가 400~500장 정도라고 보면 되는데 오승환 선수의 야구장 방문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인 7일 오전 예매 확인이 1600장 이상이었다"고 했다. (중략) 삼성은 오승환의 야구장 방문에 맞춰 온·오프라인에서 유니폼 100장을 우선 판매했다. (중략) 총 판매 가격만 1000만원이 넘었다."오: 오자마자 놀랐다. 많은 팬이 잊지 않고 응원해 주신다는 생각에 정말 감사했다. 와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복귀 후 한동안 잘하다가 막판에 조금 아쉬웠는데) 결국 나이를 먹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부인할 필요는 없다. 나도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여러 시도도 해봤다. 예전 것만 고집할 순 없었고, 투구 스타일도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결국 나이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2021년 12월 9일: 최고구원투수상 오승환 "구원투수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올 시즌 44세이브를 기록한 오승환은 역대 최고령 40세이브를 달성, 개인 통산 여섯 번째 세이브왕에 올랐다. (중략) "요즘에는 불펜 투수의 위상이 많이 올라간 것 같다. 최고구원투수상이라는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하다." *본지는 조아제약과 함께 1994년부터(2008년까지는 제일화재) 매년 최고의 활약을 펼친 불펜 투수에게 ‘최고구원투수상’을 시상하고 있다. 오: 이 상 덕분에 불펜 투수들의 활약이 조명을 받는다. 불펜 투수의 가치가 높아지고, 목표 의식도 생기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힘이 많이 된다. 또 상을 받는 모습과 선수들의 수상 소감까지 더해지면서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목표를 심어주는 것 같다. 상 덕분에 불펜 투수의 위상이 전반적으로 높아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2025년 8월 8일: 굿바이 끝판대장"다시 태어나면 야구하고 싶은 생각은 무조건 있다. 다만 마무리 투수는 절대 하지 않을 거다."오: 마무리 투수라는 자부심은 있지만 참 가혹한 포지션이기도 하다. 결과에 따라 평가가 잔혹하다. 내 투구에 따라 승패가 바로 연결되다 보니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큰 것 같다. 그래서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마무리 투수를 꿈꾸는 젊은 선수들에게 조언해 준다면) 마무리 투수만의 매력이 분명 있다. 이 경기를 '내 손으로 끝낸다'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결과는 잔혹해도, 뿌듯함을 가장 많이 느끼는 포지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결과나 평가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뚝심 있게 던진다면 좋은 마무리 투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윤승재 기자 2025.09.2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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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가 묻고 오승환이 답한다② "2011년 오승환은 끝났다는 말, 보란 듯이 부활하고 싶었죠" [창간56]

신문에는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넘어 활자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56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일간스포츠는 21년 동안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오승환을 주목하고 '끝판대장'의 스토리를 활자에 꾹꾹 눌러 담아 독자들과 공유했습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오승환의 길고, 멋진 여정을 일간스포츠가 옛 신문 기사를 통해 돌아봤습니다. 신문이 묻고, 오승환이 답하는 형식입니다.①"팬들의 가슴에 더 많은 스트라이크 던지고 싶었는데.."②"2011년 오승환은 끝났다는 말, 보란 듯이 부활하고 싶었죠"③"마무리 투수, '내 손으로 끝낸다' 자부심 큰 보직"④오승환 모의고사, "제 영광의 순간, 위기의 순간은요" ▶2011년 2월 21일: 다시 보는 '오승환표 돌직구'기사 본문 : "지난 2년간 오승환은 잔부상에 시달렸고, 덩달아 특유의 '돌직구' 위력도 사라졌다. 하지만 지난해 오른손 팔꿈치 수술 뒤 착실한 재활과 전지훈련 소화로 예전 기량을 되찾아가고 있다. 오승환은 '예전에는 최고 마무리로 불렸을지 모르지만 지난 2년 동안 (타자들에게) 만만한 투수가 됐다'라며 '구속, 구위, 제구 모두 만족스럽다. 자신감을 찾아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승환(오): 이런 시간이 있어서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무너졌으면 난 선수 생활을 오래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불펜 투수가 4~5년을 꾸준하게 한 선수가 별로 없었다. 그걸 깨고 싶었고,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 '오승환은 끝났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는데, 보란듯이 부활을 증명하고 싶었다. ▶2011년 5월 24일: 오승환 "생각 없이 던지니 얻어맞죠""구원 1위 오승환 첫 블론세이브 자책, 그는 '타자가 잘 쳤고, 실투나 공 배합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가 생각 없이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경기에서 상대 마무리 투수가 블론 세이브를 하는 걸 보고 불펜에서 몸을 풀 때부터 '나도 그럴 수 있겠다. 주의하자'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마운드에 올라가서 깜빡했다'고 털어놨다."오: 어제도 출전하고 오늘도 출전하면서 (나이브하게) 생각 없이 경기에 나가게 된 걸 두고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마무리 투수로서 내 공 하나하나에 팀의 승패가 갈리는데, 그걸 생각 없이 던져 맞은 것 같다. 다시 보니까 이 세이브 하나가 얼마나 큰 건지 지금 다시 깨닫게 된다. ▶2011년 6월 15일: '돌부처' 오승환의 평범한 하루오승환이 일어나서 하는 일은 별다른 게 없었다. 주스 마시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봤다. 베란다 한편을 가득 채운 화분에 물도 줬다. 야구밖에 모를 것 같은 오승환의 취미는 의외로 화초 기르기다. 어머니 김형덕 씨는 "어렸을 때 용돈 주면 항상 꽃이나 물고기를 샀다"고 말했다. 오: 본가가 서울인데, 부모님이 대구 저희 집에 오시면 화초나 다육이를 가지고 오신다. 어머님이 엄청 좋아하셨다. 그래서 키우기 시작했다. (지금도 화초 기르기가 취미인가?) 지금은 못 기른다. 아이랑 놀아주느라 바쁘다(웃음).▶2011년 8월 10일: 정우람이 오승환에게, "탐난다, 알고도 못 치는 돌직구"(오승환의) 타고난 악력(손아귀로 무엇을 쥐는 힘)도 눈여겨봐야 한다. 오승환의 악력은 83㎏으로 레슬링이나 유도 국가대표보다 세다. 한화 류현진이나 KIA 윤석민과 비교하면 1.5배 이상이다. 오승환이 던지는 순간, 공이 받는 힘도 다른 투수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 오: 90㎏ 넘게까지 나온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80㎏만 넘어도 레슬링 선수보다 더 높다고 들었는데, (돌직구의 비결이 악력이라고 하던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중학교 시절부터 이렇게 잡고 던졌고, 악력의 장점은 잘 모르겠다(웃음). ▶2011년 10월 3일: 47세이브 오승환, 4관왕 윤석민 추월?오승환은 선발 투수가 가질 수 있는 4개 타이틀을 거의 손에 쥔 윤석민과 시즌 후 MVP 투표에서 대결하게 됐다. (중략) 2006년 47세이브를 따내고도 MVP 투표에서 3위에 그쳤다. (중략) 당시 오승환은 10표밖에 얻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당시의 결과에 대해 서운해하고 있다. 오: 내 기억으로는 아마 윤석민, 최형우 선수와 경쟁했던 걸로 안다. 내가 나중에 최형우의 MVP를 응원한다고 말해서 '밀어 주기' 논란이 있었는데, 사실 난 당연히 MVP가 안될 줄 알았다. 마무리가 성적에서 선발 투수와 야수들을 넘어서기 어렵다. (1999년 구대성 이후 불펜 MVP 아쉽진 않은지) 아쉬운 건 없었다. 앞으로 후배들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 지금 상황(등판 트렌드)에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예전에는 4연투가 일반적이고 등판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지 않나. 몸 생각을 많이 한다. 한 시즌 50세이브도 마찬가지다. 기록을 세우긴 어려운 상황이다. ▶2012년 4월 21일: 공 8개 던지면 등판, 타고난 마무리 오승환삼성 마무리 오승환은 짧은 시간에 '등판 준비'를 마친다. 코야마 진 삼성 트레이닝코치가 인정하는 "선천적으로 뛰어나고 후천적으로 다듬은 몸" 덕분이다. 오승환은 "몸을 푸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불펜에서 10개 미만, 7~8개만 던져도 등판이 가능하다"고 했다. 오: 몇 개를 정해놓고 던진 건 아니고, 워밍업이 빨리 되는 스타일이다. 아마 시절부터 그랬다. (별다른 루틴이 있었나) 등판 예정된 날에 보강 훈련을 필수로 해왔다. 그땐 웨이트 훈련도 경기 전에는 하지 않았다. 경기 후에 했다. 무거운 걸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 가보니, 선수들이 경기 전에 웨이트 훈련을 많이 하더라. 나도 해봤는데 괜찮아서 계속 하고 있다. 몸이 더 좋아졌다(웃음). ▶2012년 5월 23일: 돌부처도 마운드서 딴생각, 마운드서 왜 먼 산 보나 했더니오승환은 마운드에 서면 일부러 먼 곳을 바라본다고 했다. 그는 "마운드에서 투수와 포수의 거리가 더 가까워 보이는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중략) 마지막으로 '다른 생각을 해라'이다. "너무 긴장해 포수 미트만 보일 때도 있는데, 내 생각에는 차라리 다른 생각이라도 하면서 여유를 찾는 것이 낫다"라는 게 오승환의 의견이다. 오: 먼 곳을 본 건 타석이 더 가까워 보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서였다. 마운드에서 너무 긴장 될 때만 하는 방법이다. 대개 먼 곳 보다가 포수 미트에 집중하면 긴장감이 사라진다.▶2013년 10월 29일: 기막힌 오승환, 연투에도 쌩생한 돌직구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오승환은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9회 등판해 1이닝 무실점(투구수 17개)으로 팀의 3-2 승리를 지켜냈다. 이틀 전인 25일 대구 2차전에서 4이닝 동안 무려 53개의 공을 던진 후유증은 전혀 없었다. 오: 그때는 공을 던지면서 힘들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우승이 눈앞이고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해외 진출하기 전 마지막 KS라서 더 힘이 넘쳤나)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냥 그땐 힘이 넘쳤던 것 같다(웃음). 윤승재 기자 2025.09.26 10:21
프로축구

선수협 “K리그 일방적인 ‘연봉 삭감 관행’…선수 권익 심각하게 침해”

사단법인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가 최근 K리그 소속 A 선수가 겪고 있는 연봉 삭감과 권익 침해 사례를 공개했다.선수협은 “K리그에서 출전 시간 부족, 부상, 구단 경영상 이유 등을 명목으로 한 일방적 연봉 삭감이 구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방적인 연봉삭감이라는 프로축구연맹의 조정결과에 불복해 대한축구협회에 이의신청을 하지만, 협회가 수개월째 분쟁조정위원회를 구성조차 하지 않아 선수 권익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선수협이 공개한 A 선수의 사례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명확한 금지 규정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선수협에 따르면 A 선수는 2025년 시즌을 앞두고 소속 구단으로부터 전년도 대비 37.5%에 달하는 연봉 삭감을 통보받았다. 구단은 삭감 사유로 ‘출전 시간 부족’과 ‘팀 성적 부진’을 들었다. 하지만 해당 선수는 시즌 초반 연습경기 도중 부상을 입어 장기간 결장했다. 부상 복귀 뒤 절반 이상의 경기에서 선발 또는 교체로 출전했다. 출전 경기 평균 평점은 팀 내 평균과 유사했고, 장기 부상 후에도 경기력 저하가 없었다. 그럼에도 구단은 출전 시간과 성적을 근거로 삭감을 밀어붙였고, 연맹 조정위원회는 이를 인정했다.선수협에 따르면 K리그 구단들은 출전 시간, 부상, 경영상 이유 등 다양한 명목으로 소속 선수의 연봉을 줄인다. 선수들이 반발하면 경기 출전에서 배제되거나 이적을 강요받는다.가장 큰 문제는 이적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상당수 선수가 다년 계약을 체결하고 있어 이적 시 이적료가 발생하고, 이를 감당할 팀을 찾기 어려워 결국 선수는 부당한 삭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선수협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의 배경에는 프로축구선수 표준계약서의 허점도 자리 잡고 있다. 계약서에는 다년 계약을 명시하면서도 매년 연봉을 재협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최저연봉 규정도 없다. 결과적으로 구단은 사실상 무제한으로 연봉 감액이 가능하다”라고 꼬집었다.선수들이 연봉삭감에 대한 부당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공식 절차는 연맹에 분쟁조정을 신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맹은 각 구단이 회원인 단체다. 요직에 구단 관계자들이 포진해 있어 객관성이 떨어진다. “구조적으로 구단에 유리한 판정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선수협의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A 선수의 상황이 더욱 복잡하다. 연맹의 조정 결과에 불복할 경우, 다음 단계로 한국 축구 최상위 단체인 협회에 ‘분쟁조정 이의신청’을 제기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의신청이 접수된 이후로도 협회가 위원회 구성을 하지 않는 거로 알려졌다. 선수협은 “수개월이 지나도록 협회가 위원회 구성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는 협회의 명백한 직무 태만이다. 이렇게 시간이 허비되는 원인은 협회의 ‘분쟁조정규정’에 이의신청 처리 기간에 대한 제한이 없어, 사실상 무기한 지연이 가능하다는 구조적 허점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선수 A는 경기 출전과 생계가 위협받는 불안정한 상태에 장기간 방치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K리그의 관행은 국제 기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지적도 있다. 선수협은 “국제축구연맹(FIFA) 분쟁조정위원회(FIFA DRC)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명확히 해왔다. 선수의 경기 출전 기회는 구단의 재량에 속하므로, 출전 부족을 이유로 한 급여 삭감은 무효이며, 팀 성적 부진을 이유로 전 선수단 급여를 일괄 삭감하는 것 역시 불허했다. 또 계약서상 구단이 일방적으로 급여를 감액할 수 있는 조항은 효력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라고 소개했다. A 선수의 상황이 이 기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선수협은 “FIFA가 금지한 행위가 한국에서는 ‘관행’이라는 이유로 합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며 “이는 국제 기준과 국내 제도 간 괴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이어 “FIFA는 모든 회원국 협회가 독립적이고 공정한 분쟁조정위원회(NDRC)를 설치할 것을 의무화했다. 그러나 대한축구협회는 NDRC 설치 논의조차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선수들은 불공정한 절차, 장기 지연, 불필요한 비용 부담 등 피해를 감수하고 있다”라고 꼬집었다.김훈기 선수협 사무총장은 “현재 제도는 선수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선수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면 경기장에서 배제당하는 가슴 아픈 상황이 발생한다. 이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또한, 내년부터 K리그에 구단이 더 늘어나게 된다. 새로운 프로 구단이 생기는 건 당연히 환영할 일이지만, 프로팀의 이름에 맞는 운영이 돼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다”라고 말했다. 끝으로 “대한축구협회가 국제 기준에 맞는 공정한 제도를 조속히 도입하고, 연맹과 협회 모두 독립적인 분쟁 해결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김우중 기자 2025.09.23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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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만 잘해선 안돼, 포기하지마" 허구연 총재가 '노경은·김진성, 황영묵·박찬형' 언급한 이유 [2026 드래프트]

"드래프트에 참가한 선수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선수가 있습니다."한국야구위원회(KBO) 허구연 총재가 17일 서울 송파구 롯데호텔 월드에서 열린 2026시즌 KBO 신인 드래프트에 참석, 프로에 도전하는 야구판 미생들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했다. 이날 드래프트에는 총 1261명(고등학교 졸업 예정자 930명, 대학교 졸업 예정자 261명, 얼리드래프트 신청자 51명, 해외 아마추어·프로 출신 19명)이 참가해 110명이 프로팀의 지명을 받았다. 지명은 2024시즌 최종 순위 역순에 따라 키움, NC 다이노스, 한화 이글스, 롯데 자이언츠, SSG 랜더스, KT 위즈, 두산 베어스,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순으로 진행됐다. 드래프트에 앞서 단상에 선 허구연 총재는 "신인 드래프트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다. 선수들에게는 역사적인 날이 아닌가 생각한다. 프로야구 선수라는 또다른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여러분이 그동안 보여준 열정과 노력에 박수와 축하의 말씀을 보낸다"라고 말했다. 허 총재는 "프로야구에선 실력만큼이나 매사 성실한 태도로 임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라며 "팀의 일원으로서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로서 언제나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를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허 총재는 두 명의 선수를 언급했다. 그는 "TV 중계를 보면 제일 반갑고, 좋아하는 선수가 있다. 노경은(41·SSG 랜더스) 김진성(40·LG 트윈스)이다"라고 말했다. 두 선수는 40대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팀의 필승조로 여전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허구연 총재는 "노경은과는 예전에 호주리그에서도 만나 들었는데, 중간에 야구를 그만둔다고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 던지는 걸 보면 대단하다. 인간의 잠재력이 얼마나 무섭고, 자기가 개발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꽃을 피울 수 있구나. 노경은과 김진성 두 선수를 보면서 느낀다"라고 감탄했다. 그는 어린 선수들에게 "선배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프로에 입단하면 야구만 잘하는 선수가 돼선 안된다는 걸 가슴 깊이 새기고 선수 생활을 해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또 허 총재는 프로에 지명을 받지 않은 선수들에게도 격려의 한마디를 남겼다. 허 총재는 "꿈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야구를 향한 간절함과 끈기를 잃지 않는다면, 또 다른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또 다른 두 명의 선수를 호명했다. 황영묵(26·한화 이글스)과 박찬형(23·롯데 자이언츠)이었다. 두 선수는 모두 신인 드래프트에 지명을 받지 못하고 독립야구단에서 꿈을 이어오다 육성 선수로 입단, 올해 프로무대에서 꽃을 피운 선수들이다. 허구연 총재는 "두 선수가 독립리그에서 뛰는 모습을 봤다. 이들이 프로 1군 무대에 와서 좋은 활약을 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라며 "여러분도 이런 선수들이 어떻게 1군 무대에 오르고 각광을 받는 것인지, 프로 입단할 때부터 깊이 새겨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 총재는 "오늘 지명을 받지 못한 선수들도 KBO는 끝까지 그 도전을 응원하겠다. KBO에서도 이들을 위한 장(무대)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하며 선수들을 응원했다. 윤승재 기자 2025.09.18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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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담겼다” 부천, 구단 서포터 헤르메스 출범 30주년 기념 유니폼 출시

부천FC1995가 구단 서포터즈 ‘헤르메스’ 출범 30주년을 기념해 스페셜 유니폼 ‘REDS for REDS’를 출시한다.이번 스페셜 유니폼은 지난 1995년부터 30년간 구단과 서포터즈가 서로를 지지하며 그려온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 이에 기획 단계부터 서포터즈가 함께하며 의미를 더했다. 헤르메스 안영호 회장과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 양원석 초대 대표가 직접 자문에 참여했고, 화보 촬영에도 팬들이 함께했다.필드 유니폼은 검정색, 골키퍼 유니폼은 1995년 당시 헤르메스가 착용한 최초의 단체 티셔츠의 색상에서 영감을 얻은 푸른색으로 제작됐다. 왼쪽 가슴에는 ‘THE ORIGINAL SURPPORTER – MIGHTY REDS SUPER BLACKS’ 문구를 담은 기념 엠블럼을 새겨 우리나라 서포팅 문화의 출발점인 헤르메스의 정체성을 담아냈고, 전면에는 헤르메스의 응원 머플러와 걸개 등 응원도구에서 사용되는 패턴을 재구성해 긴 시간 쌓인 응원의 열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한편 후면 상단에는 헤르메스 출범 30주년을 뜻하는 30을 새겼다. 이어 좌측에는 PC통신 시절 픽셀폰트로 ‘1995’를, 우측에는 ‘2025’를 현재 구단 브랜딩 폰트로 새기면서 시간이 흘렀지만 변치 않은 팬들의 열정을 담았다.선수들과 팬이 함께 참여한 유니폼 화보 촬영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표현했다. 구단을 대표하는 바사니, 김형근, 박현빈, 카즈와 더불어 구단 최초 준프로 계약을 맺은 이충현이 참여했고, 사전 신청을 통해 선정된 팬 6명이 함께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며 더욱 풍성하게 담았다.특히 메인 컷은 30년간 늘 선수들에게 응원을 보내온 팬들에게 존경과 헌정의 의미를 담아 서로를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담아 연출했다. 화보 촬영 후 바사니는 “늘 골대 뒤에서 보내는 팬들의 응원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 화보 촬영을 통해 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이번 스페셜 유니폼 프로젝트에 함께한 양원석 초대 대표는 “내 인생의 절반이 이 유니폼에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어 기쁘고, 우리의 역사와 마음을 담은 이 유니폼을 입고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고 밝혔다.스페셜 유니폼 ‘REDS for REDS’는 오는 7일(토) 인천전부터 선수단이 착용한다. 예약 판매는 오늘 오후 2시부터 8일(월) 오전 9시까지 진행되며, 오프라인에서는 7일 인천전 현장에서 200장 한정으로 판매된다.스페셜 유니폼 관련 보다 자세한 내용은 구단 공식 SNS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김희웅 기자 2025.09.0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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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가슴 속으로 20홈런 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06년 호세 넘은 2025년 최형우 [IS 스타]

베테랑 슬러거 최형우(42·KIA 타이거즈)가 리그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최형우는 28일 열린 인천 SSG 랜더스전 9회 초 마지막 타석에서 짜릿한 손맛을 봤다. 8-6으로 앞선 1사 1루에서 오른손 불펜 전영준의 2구째 143㎞/h 직구를 받아 쳐 좌중간 펜스를 넘기는 쐐기 투런 홈런으로 연결했다. 이로써 만 41세 8개월 12일의 나이로 시즌 20홈런 고지를 밟아 2006년 외국인 타자 펠릭스 호세(당시 롯데 자이언츠, 만 41세 3개월 28일)가 세운 리그 최고령 시즌 20홈런 기록을 갈아치웠다.경기 뒤 취재진과 만난 최형우는 "몇 년 전부터 가슴 속으로 20홈런을 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다른 건 어떻게든 커버한다고 해도 20홈런은 힘들 거라고 생각한 만큼 더 뜻깊다"며 "20홈런이 다른 선수에겐 적을 수도 있는데, 내겐 의미가 있다. 감회가 새롭다"라고 말했다. 통산 홈런이 415개인 최형우는 지난 5월 리그 역대 두 번째로 18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홈런 대업을 달성했다. 30홈런 이상 시즌이 네 번(2011, 2014~16)이나 되는 자타공인 리그 최고의 슬러거지만 에이징 커브(일정 나이가 되면 운동능력이 저하되며 기량 하락으로 이어지는 현상)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다. 2021년부터 세 시즌 연평균 홈런이 14.3개. 지난 시즌 모처럼 20홈런 고지(22개)를 다시 밟았지만, 올해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는 "요즘 너무 안 좋았다. 타구에 힘도 없고 (팀 성적도 하락하면서) 위축도 많이 됐다"며 "(6연패에서 탈출한) 어제부터 (선수들이) 다들 힘내고 있는 거 같다"라고 반겼다.최형우는 '최고령 기록'이라는 표현에 손사래를 쳤다. 평상시에도 기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만큼 최고령 관련 발자취도 마찬가지다. 전날 6연패 사슬을 끊고 모처럼 연승에 성공한 경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게 더 뜻깊다. 최형우는 "좋아져야 한다. 지금은 진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 다른 팀이 지고 이기는 걸 떠나서 지금까지 많이 못 한 걸 만회해야 한다"며 "5강을 가든 안 가든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 잔여 경기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인천=배중현 기자 bjh1025@edaily.co.kr 2025.08.28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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