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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 리버풀이 일본 기업과 손잡은 이유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유럽프로축구 셔츠 스폰서십의 본격적인 시작은 독일의 분데스리가에서 시작했다. 1973년 약용주로도 알려진 예거마이스터가 우여곡절 끝에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의 셔츠 스폰서가 된 후, 다른 분데스리가 팀들도 잇달아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셔츠 스폰서십은 현대 축구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다. 기업이 오로지 상업적 이득을 위해 축구 클럽을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독일에서 정착에 성공한 셔츠 스폰서십은 바다 건너 영국에 상륙했다. 잉글랜드에서 이를 처음 시도한 클럽은 서던 리그(Southern League, 세미프로와 아마추어 클럽이 소속되어 있는 7~8부 리그)에 속한 케터링 타운(Kettering Town)이었다. 케터링 타운은 로컬 타이어 제조사인 케터링 타이어(Kettering Tyres)와 셔츠 스폰서십 계약을 맺은 것이다.1976년 1월 잉글랜드 축구 사상 최초로 케터링 타운은 가슴에 타이어 회사의 이름을 새긴 채 바쓰 시티를 상대로 셔츠 스폰서십 데뷔 경기를 가졌다. 하지만 독일에 이어 잉글랜드에서도 셔츠 스폰서십은 논란을 일으켰다. 잉글랜드축구협회(FA)는 케터링의 셔츠에 새겨진 스폰서 이름을 지우라는 명령을 내렸다.FA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케터링 타운은 꼼수를 생각해 냈다. 셔츠에 새겨진 “Kettering Tyres”의 Tyres(Tires의 영국식 스펠링)를 이니셜 T로 바꾼 것이다. 그리고 여기의 T는 Tyres가 아닌 Town을 의미한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꼼수가 통할 리 없었다. FA는 당장 셔츠의 모든 글자를 지우지 않으면 1000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통보했다. 케터링 타운의 첫 번째 시도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당시 케터링의 최고경영자는 유명 축구 선수였던 데릭 도간이었다. 도간은 자신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다른 클럽들에게 셔츠 스폰서십의 정당성을 전파했고, 볼튼 원더러스와 더비 카운티의 지지를 끌어냈다. 세력을 키운 도간은 FA에 셔츠 스폰서십을 허용하라고 계속 요구했다. 결국 FA는 이미 유럽 대륙 클럽을 통해 대세가 돼가는 스폰서십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FA는 1977~78시즌을 앞두고 셔츠 스폰서십을 허용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케터링 타운이 스폰서를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영국에서 최초로 셔츠 스폰서십을 도입한 1부 리그 클럽은 잉글랜드가 아닌 스코틀랜드에서 나왔다. 주인공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기반을 둔 하이버니안(Hibernian)이었다. 힙스(Hibs)라는 애칭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 클럽은 1977년 의류업체인 벅타(Bukta)와 셔츠 스폰서십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TV 방송국들은 힙스가 스폰서가 새겨진 셔츠를 입으면 경기를 중계하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고, 클럽은 스폰서 로고가 없는 제2의 셔츠를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에서 최초로 셔츠 스폰서십을 도입한 프로 축구팀은 리버풀이다. 1979년 여름 새로운 시즌의 시작을 앞두고 리버풀은 일본의 가전기업 히타치와 10만 파운드에 3년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리그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이었던 리버풀이 셔츠에 광고를 하겠다고 결정하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의 상업적 지형을 바꾸어 놓은 리버풀의 선구자적인 행보에는 충격적인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존 스미스 당시 클럽 회장은 히타치와의 계약을 발표하면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We are fighting for our existence(우리는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계속해서 스미스는 “리버풀은 유럽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이지만, 지난해 클럽이 기록한 240만 파운드의 매출액 중 수익은 7만 1000파운드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잉글랜드 축구의 심각한 ‘돈 부족’을 지적한 스미스는 “더 이상 리버풀 같은 빅 클럽이 관중 입장료에 운명을 좌우할 시대는 지났다. 다른 곳에서 수입을 창출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클럽의 재정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히타치와의 계약에 동의했다”고 주장했다.하지만 리버풀의 간절함과 FA의 셔츠 스폰서십 승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BBC와 ITV는 스폰서의 로고가 새겨진 셔츠를 입은 경기를 라이브와 녹화 중계할 수 없다며 팽팽히 맞섰다. 결국 리버풀은 TV 중계가 있는 경우 히타치 로고가 들어간 셔츠를 입을 수 없었다. 그 후 1983년 TV 중계에서도 셔츠 스폰서십에 관한 규제가 풀렸으나, 이미 그때는 히타치와 리버풀의 계약이 종료된 시점이었다. 따라서 리버풀 선수들이 히타치 셔츠를 입고 뛰는 모습을 본 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그럼에도 히타치가 클럽을 후원하는 3시즌 동안 리버풀은 역사에 길이 남을 성적을 거뒀다. 클럽은 1부 리그 우승 2회, 유러피언컵 우승 1회, 리그컵 우승 2회를 기록한 것이다. 리버풀의 성공은 다른 클럽에도 자극을 주었고, 아스널이 1981년 역시 일본의 가전기업인 JVC와 손잡게 된다. 이후 JVC는 무려 18년 동안 아스널의 얼굴을 담당하며, 클럽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9.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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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의 문장보다 큰 스폰서 로고, 이렇게 시작됐다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독자 여러분은 프로축구 선수의 셔츠(Shirt) 중앙에 자리 잡은 커다란 스폰서 로고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클럽의 정체성은 분명 그들의 크레스트(Crest, 오랜 역사를 가진 조직의 문장)에 담겨있다. 하지만 셔츠에 새겨진 스폰서에 비해 클럽을 상징하는 크레스트의 크기는 너무나 작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스폰서가 없던 시절의 옛 셔츠를 그리워하는 축구팬들도 있다. 유럽 축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셔츠 스폰서십은 전 세계 거의 모든 스포츠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아울러 스폰서 없는 저지(Jersey, 경기용 셔츠)를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미국의 빅4 프로리그도 최근 들어 더 이상 저지 스폰서십에서 자유롭지 않다. 관심에 비해 국내에는 덜 알려진 셔츠 스폰서십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셔츠 스폰서십을 최초로 시도한 축구 클럽은 우루과이의 페냐롤(Peñarol)이다. 우루과이 1부 리그 최다(51번) 우승 팀인 페냐롤은 1950년대 중반 스폰서십을 도입했다. 아쉽게도 클럽이 셔츠 스폰서를 이용해 어떻게 수입을 증대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1960년대 중반쯤에 유럽 축구의 변방인 덴마크, 오스트리아는 셔츠 스폰서십을 도입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럽 리그는 이러한 형태의 스폰서십을 격렬하게 반대하며 금지했다.1972년 5월 서독(West Germany)의 한 야외 파티에서 셔츠 스폰서십의 서막이 열린다. 알코올 도수는 35%에 이르지만, 약으로 쓰는 술로도 유명한 예거마이스터(Jägermeister)의 CEO인 귄터 마스트(Günter Mast)는 당시 사업 동료를 위한 파티를 주최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서독과 잉글랜드의 1972 유럽축구선수권대회 8강전을 보기 위해 실내로 들어갔고, 테라스에 마스트는 홀로 남겨졌다. 이 순간 마스트는 축구를 통해 광고를 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한다.예거마이스터의 본사에서 불과 12㎞ 떨어진 곳에는 브라운슈바이크라는 인구 25만 명의 소도시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라고 불리는 분데스리가 팀이 있었다. 아인트라흐트는 독일어로 ‘화합’이란 뜻인데, 이 단어가 스포츠 팀에 붙으면 영어 ‘유나이티드(United)’와 같은 의미가 된다. 당시 브라운슈바이크는 수백만 마르크의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규모가 큰 다른 클럽들과 경쟁하기 힘든 상태였다. 따라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클럽과 예거마이스터사는 의기투합했다.하지만 셔츠 스폰서십을 반대하는 서독축구협회(DFB)는 1972년 8월 이들의 마케팅 전략을 불허한다. DFB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묘약이 필요했다. 숙고 끝에 마스트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1973년 1월 마스트는 변호사를 고용해 클럽의 규정을 재정비하면서, 기존의 사자 대신 사슴을 클럽의 상징으로 지정했다. DFB가 클럽의 크레스트에 들어간 예거마이스터의 사슴까지 규제하기 힘든 것을 노린 것이다.그럼에도 DFB는 여전히 거부권을 행사했고, 양측은 두 달 간의 지루한 법적 공방에 들어갔다. 결국 사슴 로고의 크기가 지름 14㎝를 넘으면 안 되고, 클럽 이름의 이니셜인 E와 B가 새겨져야 한다는 조건하에 DFB가 한발 물러섰다. 1973년 시즌 막바지에 DFB는 로고 밑에 예거마이스터라고 적힌 레터링까지 허용했다. 이렇게 되자 프랑크푸르트, 뒤셀도르프 등 다른 분데스리가 팀들도 수익성 높은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게 된다.클럽의 셔츠 스폰서가 된 후 예거마이스터의 매출은 증가했다. 이에 마스트는 마케팅 도구로서 축구의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또한 수입 증가에 힘입어 브라운슈바이크는 당시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인 파울 브라이트너를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160만 유로라는 거액에 영입했다. 비록 브라이트너는 클럽에서 한 시즌만 소화하고 뮌헨으로 이적했지만, 그의 영입만으로도 브라운슈바이크의 인지도는 높아졌다.야심이 많았던 마스트는 1983년 클럽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의 공약은 자신이 당선되면 클럽의 빚을 모두 갚아주는 대신 클럽 이름을 ‘예거마이스터 브라운슈바이크’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결국 마스트는 회장으로 당선됐고, 클럽명을 바꾸겠다는 그의 계획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DFB는 “광고 목적으로 클럽명을 바꿀 수는 없다”고 이를 반대했고,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으로 넘어갔다.최종 판결은 놀랍게도 마스트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지방 정부가 반대했다. 클럽명을 변경할 경우 브라운슈바이크는 유소년 팀을 운영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유스 선수들이 술 광고를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런 와중에 마스트는 클럽 회장 재선에 실패했고, 결국 클럽명 변경은 무산됐다.그럼에도 예거마이스터의 브라운슈바이크 스폰서십은 현대 축구계에 새로운 비즈니스 방식을 도입했다. 기업이 오로지 상업적 이익을 위해 클럽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8.2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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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스펜서 AIA그룹 최고마케팅책임자가 말하는 '더 건강하게, 더 오랫동안, 더 나은 삶'

토트넘 유니폼 스폰서로 한국 축구팬에게 친숙한 AIA아시아인들의 건강 관련 편견 바꾸고자 노력 "건강하고 활력있는 삶 떠올리게, 생명보험 관한 인식 바꾸고자""손흥민은 우리의 정신 부합하는 슈퍼 스타이자 파트너, 롤모델" AIA는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글로벌 보험사다. 로고를 본 순간, 한국의 축구팬이라면 대부분 손흥민의 토트넘 셔츠가 바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AIA는 토트넘 홋스퍼 구단의 유니폼 스폰서다. AIA는 어떤 목적으로 토트넘과 손흥민을 후원하고 있으며, ‘Rethink Healthy(건강을 다시 생각하자)’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을까. 아시아 최대 생명보험사이자 한국인에게 친숙한 AIA의 그룹 최고마케팅책임자(GCMO) 스튜어트 스펜서가 토트넘 방한 친선경기에 맞춰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지난 5일 스펜서 GCMO를 직접 만나 AIA그룹의 마케팅 이야기를 들어봤다. 2013년 처음으로 토트넘과 스폰서 계약한 AIA는 2019년에는 8년 추가 계약을 성사시켰다. 스펜서 GCMO는 토트넘과의 후원 계약이 AIA에 성공적인 성과를 가져왔다고 확신했다. 스펜서 GCMO는 “축구는 아시아인들이 가장 즐겨 보는 스포츠다. 2013년은 우리가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스폰서 대상을 찾던 중 토트넘과 계약을 하게 됐다.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성공적이지 않나. 우린 토트넘 스폰서십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어릴 때부터 응원했던 팀이 있는지 물었더니 주저하지 않고 토트넘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라고 강조하면서 자신이 북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가족, 친척들이 모두 어릴 때부터 토트넘을 응원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가족은 ‘블루&화이트(토트넘을 상징하는 색)’”라며 웃었다. 스펜서 GCMO가 마케팅에서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우린 생명보험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 한다”고 말했다. 스펜서 GCMO는 “생명보험이라고 하면 보통 죽음, 질병을 떠올린다. 어떤 보험사는 고객을 두렵게 만들어서 보험을 팔려고 하는데, 우린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우린 긍정주의, 낙천적인 삶, 바이털리티(활력)를 강조한다. AIA는 건강한 삶을 먼저 생각하게 만들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시아인들 다수가 부유해지는 것에는 더욱 신경을 쓰고 있고, 실제로 부를 일구기도 했다. 그러나 건강은 잃고 있다고 진단했다. 연구에 따르면, 아시아인 대부분이 자신이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도 높은 운동을 해야 한다는 잘못된 전통적 편견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펜서 GCMO는 “소셜미디어(SNS)가 특히나 악영향을 미친다. 식스팩 몸매를 가진 이들의 소셜미디어 사진을 보면 운동을 차마 시작하지 못하고 지레 포기하곤 한다. 우린 이처럼 잘못된 미의 기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모두가 각자 다른 과정을 통해 건강해질 수 있다. 신체적인 건강과 더불어 정신적인 건강, 재정적인 건강, 환경적인 건강도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아시아의 다른 어떤 보험사도 이런 접근을 하지 않는다. 보험사가 올바른 행동을 통한 건강과 웰니스를 장려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우린 이 산업을 선도하는 선두주자로서 특별한 책임감을 갖고 이 캠페인을 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토트넘이 올 여름 쿠팡플레이 시리즈 경기를 위해 내한했던 기간 중에 AIA가 주최한 이벤트는 소아암 환자들과 토트넘 선수들이 함께 한 팬아트 전시회였다. 토트넘 팬들, 소아암 어린이 환자와 가족, AIA생명 임직원 가족들의 작품 총 150여 점을 전시하면서 토트넘 선수들과 어린이팬들이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든 특별한 행사였다. 스펜서 GCMO는 “지역사회에 참여하고 환원하고 싶어서 이 행사를 열었다”라고 말했다. 스펜서 GCMO는 인터뷰 내내 AIA의 캠페인 ‘HLBL(Healthier, Longer, Better Lives·더 건강하게, 더 오랫동안, 더 나은 삶)’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리고 이 모토와 가장 잘 부합하는 선수야말로 AIA가 개인 후원을 함께 하고 있는 손흥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손흥민은 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이자 슈퍼 스타다.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도덕적이다. 인성도 훌륭하다. 더 나은 삶을 모토로 하는 우리의 정신과 잘 부합한다. 손흥민은 우리의 파트너이자 롤 모델”이라고 칭찬했다. ▶스튜어트 스펜서(Stuart A. Spencer) GCMO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졸업-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트래블 마케팅 담당자- 1996 ~ 2009년까지 미국 AIG와 AIA (미국,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근무)- AIG 생명 글로벌 사장직 역임- 취리히보험 아시아태평양 지역 CEO(일반보험) 역임- 2017년 AIA 재입사 후 AIA 그룹 CMO로 활동- 마케팅 디지털화, 커뮤니케이션, 스폰서십, 이벤트 등 고객 참여 총괄이은경 기자 2024.08.12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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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A, 스탠다드차타드, 쉐보레의 공통점은?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AIA 보험,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쉐보레 자동차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프리미어리그(EPL) 축구팬이라면 아마도 “EPL 클럽의 셔츠 스폰서”라고 답할 것 같다. 맞는 말이다. AIA는 2014년부터 현재까지 토트넘 홋스퍼의 셔츠 스폰서다. 쉐보레는 2014년부터 7년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셔츠 스폰서였다. 1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계 은행 스탠다드차타드의 본사는 영국의 수도 런던에 있다. 하지만 영국 내 어느 도시에도 이 은행의 지점은 없다. 스탠다드차타드는 영국에서 ‘소매은행업무(retail banking, 개인, 소기업 대상)’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탠다드차타드의 주 고객은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다. 수익의 90%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나온다.AIA는 미국의 최대 보험사였던 AIG로부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분리되어 생긴 회사다. 홍콩에 본사가 있는 AIA의 타깃 마켓은 동남북 아시아, 인도와 호주다. 제너럴 모터스(GM) 소유의 미국 자동차 브랜드 쉐보레도 영국이나 미국 시장을 겨냥해 맨유의 셔츠 스폰서가 된 것은 아니다. 쉐보레는 아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클럽인 맨유와의 스폰서십 계약을 통해 중국과 아시아 시장을 노렸다.사실 필자가 질문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현재 EPL 클럽을 후원하는 대부분의 셔츠 스폰서들은 영국 시장이나 소비자에 관심이 없다. 이들의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리그인 EPL을 통해 광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 시장이 타깃 마켓이다. EPL은 1992~93시즌 22개의 팀으로 출범했다. 국제적인 리그와는 거리가 멀었던 EPL 원년에 활약했던 외국인 선수는 13명에 불과했다. 이 중 단 2명만이 비유럽권 선수였다. 입스위치 타운의 캐나다 골키퍼 크레이그 포레스트와 리버풀의 이스라엘 공격수 로니 로젠탈이 바로 그들이다.이후 ‘보스만 판결(Bosman Ruling, 계약이 만료된 선수는 자유롭게 팀을 옮길 수 있는 권리)’등의 영향을 받아 EPL에서 뛰는 외국인 선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1999년 잉글랜드 클럽 최초로 첼시는 필드에서 뛰는 11명의 선수를 모두 외국인 선수로 채웠다. 2017년 UEFA(유럽축구연맹)의 보고서에 따르면 EPL은 유럽에서 외국인 선수 비율(69.2%)이 가장 높은 리그다. 이들은 무려 65개국의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다.EPL 출범 당시 영국(UK) 출신이 아닌 외국인 감독은 아일랜드 국적의 조 키니언이 유일했다. 하지만 2018~19시즌 EPL의 20팀 중 14팀의 감독이 외국인이다. 21세기에 처음 등장한 외국인 구단주도 꾸준히 증가했다. 2023~24시즌 현재 15개 클럽이 외국인 대주주를 보유하고 있다.출범 당시만 해도 거의 없던 외국인 선수, 감독, 구단주의 폭발적인 증가는 EPL의 세계화를 보여준다. 그에 반해 스폰서십 분야는 달랐다. EPL 원년 외국 기업과 셔츠 스폰서십 계약을 맺은 클럽의 숫자는 이미 11개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11개 외국 스폰서의 목표 시장은 영국과 근처 유럽 국가였다. 21세기 들어 이러한 기조가 바뀐다. 물꼬를 튼 이는 2002년 에버튼과 2년의 셔츠 스폰서십을 맺은 중국의 핸드폰 제조업체 크젠(Kejian)이었다. 이 계약이 특히 눈길을 끈 이유가 있다. 크젠은 매출의 100%를 중국 시장에 의존하는 내수기업이기 때문이다. 해외시장에는 진출조차 안 한 크젠이 에버튼의 셔츠 스폰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은 오랜 기간 그들만의 세계에 갇힌 나라였으나, 2000년대 들어 여행, 유학 등의 목적으로 중국인들은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대다수의 소비자는 당시 세계 핸드폰 시장의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 제품을 선호했다. 특히 젊은 소비자들에게 글로벌 브랜드와는 거리가 먼 크젠의 핸드폰은 인기가 없었다. 따라서 이미지 개선이 필요했던 크젠은 EPL의 유서 깊은 클럽인 에버튼과 손잡은 것이다. 크젠 셔츠를 입은 에버튼의 경기가 국영 스포츠채널인 CCTV5에서 중계되자, 중국인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에는 동아시아 선수 최초로 EPL에서 골을 기록한 쑨지하이가 있었다. 2003년 새해 첫날 열린 에버튼과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는 중국 내에서 3억 6000만 명이 시청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EPL에서 사상 최초의 ‘차이니스 더비’가 성사됐기 때문이다.크젠과의 계약 전 중국에서 에버튼의 인지도는 미미했다. 하지만 중국어로 쓰인 크젠 셔츠를 입은 리티에가 좋은 활약을 보이자, 중국에서 클럽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에버튼은 리버풀과 맨유를 제치고 중국 내 최고 인기팀이 되었다. 또한 중국 기업인들은 에버튼의 홈구장인 구디슨 파크의 호스피탈리티 티켓을 앞다투어 사들였다.크젠도 스폰서십의 효과를 누렸다. 2002년 크젠은 중국 시장에서 전년도에 비해 두 배가 넘는 217만 대의 핸드폰을 판매한 것이다. 2003년에는 현지 에버튼 팬들을 상대로 핸드폰을 팔고자 영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이 회사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크젠은 상승한 이미지와 인지도를 뒷받침할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소비자들은 곧 크젠 핸드폰의 성능에 실망했고, 기술 혁신 없이 마케팅으로 잠깐 빛을 본 이 회사는 시장에서 사라졌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1.1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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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시선] KBO리그 흥행 회복 호기, 제2의 '그런 날' 티셔츠 나와야

최근 KIA 타이거즈 '2년 차' 내야수 김도영이 개인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한 문구가 야구팬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그는 7월 중순, 장맛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은 모습의 셀피와 함께 '그런 날 있잖아. 손에 우산은 있지만 비를 맞으며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고 싶은...그런 날'이라는 글을 올렸다. 스무 살 젊은 선수의 '새벽' 감성은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이내 밈(meme·인터넷 유행 콘텐츠)으로 번졌다. 다른 프로 야구단과 운영 기구(KBO)까지 소속 선수나 이벤트 관련 사진을 SNS에 게재하며 '그런 날 있잖아'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을 올렸다. 심지어 기업·방송사까지 활용했다. KIA 구단은 이를 마케팅 도구로 활용했다. 팀 전용 온라인 스토어를 통해 해당 포스팅의 사진과 문구가 새겨진 '그런 날' 티셔츠를 제작, 사흘(18~20일) 동안 판매했다. 이 기간 약 1400장이 팔렸다고 한다.티셔츠가 제작돼 신드롬을 일으킨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20년, 롯데 자이언츠 외국인 투수였던 댄 스트레일리가 팀 포수 김준태(현 KT 위즈)가 방송 중계 화면에 잡힌 장면을 새긴 티셔츠를 직접 제작해 선수단에 선물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백네트 부근 광고판에 새겨진 '충분하다'라는 문구 중 뒤에 세 글자만 프레임에 잡힌 채 김준태 뒤에 노출돼, 일명 '분하다 티셔츠'로 통했다. 롯데팬 요청에 공식 판매되기도 했다. B급 감성을 자극하는 상품 출시로 야구팬은 콘텐츠를 즐기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찾았다. 스포츠단과 기업 사이 스폰서십 체결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스포츠단은 선수 유니폼과 장비, 전광판과 광고판이라는 매체를 제공하고, 기업은 이를 통해 상품이나 서비스 브랜드를 노출한다. 그게 일반적인 스포츠 마케팅이다.인기가 많은 스포츠단, 성적이 좋은 스포츠단이 매체로서의 가치가 높다. 정작 과거 스포츠단은 그저 경기력과 스타에 기대 팀 가치가 오르길 기다렸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한 뒤엔 달라졌다. 자체적으로 스포츠단을 알릴 경로가 많아졌다. KBO리그 소속 10개 구단도 모두 자체 동영상·SNS 채널을 두고 선수단의 작은 소식까지 알린다. '그런날 티셔츠' 상품화는 의미 있다. 야구단이 팬들 사이 관심사와 화제를 주시하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뒤 발 빠르게 움직이는 ‘쌍방형’ 소통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야구의 매력이 잠재 고객(팬)에게 소구 하려면, 경기 외적인 화제성도 중요하다. KIA는 밈으로 퍼진 젊은 선수의 감성 문구를 놓치지 않고 재기 있는 이벤트로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스타 마케팅으로 연결됐다. 김도영은 '그런 날' 밈의 창시자로 스포츠팬이 아닌 이들에게도 이름을 알렸다. 티셔츠 판매도 이를 지원했다. 지난 21일 KIA 홈구장(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2층에 자리잡은 포토카드 자판기에는 김도영의 카드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팬들로 인산인해였다. KBO리그는 전반기 441만 관중을 동원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시대를 회복, 다시 한번 800만 관중에 도전하고 있다. 이런 재도약 호기에 구단들이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마케팅 활동에 힘을 써야 한다. 선수와 구단을 향한 팬의 바람을 항상 주시해야 한다. 안희수 기자 anheesoo@edaily.co.kr 2023.07.2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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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1부리그에서 강등된 적이 없는 클럽은?

축구를 포함해 유럽 대부분의 팀 스포츠는 승격과 강등이 있는 오픈 리그로 운영된다. 유럽에는 100년이 훌쩍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축구 클럽이 많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꾸준한 성적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의 클럽은 강등과 승격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 번도 1부리그에서 강등되지 않은 특별한 클럽도 있다. 그들은 누구일까? 지면 관계상 유럽의 많은 축구 리그를 얘기할 수 없다. 따라서 본 칼럼은 2023년 UEFA(유럽축구연맹) 랭킹 1~3위인 프리미어리그(EPL), 라리가, 분데스리가만 다루겠다. 59년의 역사를 가진 독일의 분데스리가는 1963년 16개 팀으로 창설됐다. 손흥민 선수의 프로 데뷔 팀이었던 함부르크 SV는 분데스리가의 원년 멤버이자, 1919년 창단된 이후 1부리그에서 강등된 적이 없는 유일한 독일 클럽이었다. 하지만 함부르크는 분데스리가에서 보낸 55시즌을 끝으로 2018년에 강등되었다. 시즌 마지막 날 17위로 강등이 확정되자, 분노한 함부르크 팬들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는 등 한바탕 소란이 나기도 했다. 함부르크의 퇴장으로 인해 분데스리가에서 개근한 클럽은 자취를 감췄다. 참고로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바이에른 뮌헨은 1965~66시즌에서야 분데스리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스페인의 라리가는 1929년 10개 팀으로 출범했다. 94년간 이어지는 역사 동안 라리가의 원년 멤버 중 한 번도 강등되지 않은 클럽은 3개다. 스페인 축구의 양대 산맥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아틀레틱 빌바오가 바로 그들이다. 이중 특히 빌바오에 눈길이 간다. 빌바오가 위치한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인 피레네 산맥 근처다. 바스크인은 인종적, 관습적으로 프랑스, 스페인과 다르다. 이들은 스페인어와 완전히 다른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스페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이들은 무장 조직까지 만들어 저항한 역사를 갖고 있다. 독립을 갈망했던 바스크인들의 열망을 담아 빌바오는 칸테라(Cantera)라고 불리는 독특한 정책도 가지고 있다.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이 정책에 따라 클럽에는 바스크 민족 선수들만 뛸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며 규정이 점차 완화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빌바오는 제한된 선수 풀만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등 없이 라리가에서 8번 우승을 한 클럽의 성적이 인상적이다. 빌바오는 레알 마드리드(35번 우승), 바르셀로나(26번 우승),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1번 우승)에 이어 네 번째로 트로피를 많이 들어 올렸다. 바르셀로나와 비슷하게 빌바오도 축구 상업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셔츠 스폰서십을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재정적 지원이 절실했던 빌바오는 결국 2004~05시즌 바스크 지방정부의 후원으로 ‘Euskadi’(바스크어로 바스크지역을 뜻함)라는 글귀를 셔츠에 새기게 된다. 이후빌바오가 스폰서 계약을 체결한 기업은 바스크에 기반을 둔 석유회사와 은행이었다. 셔츠 스폰서마저도 로컬 기업을 선택한 그들의 선택이 흥미롭다. 잉글랜드의 풋볼 리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EPL은 22개 팀으로 1992~93시즌에 출범했다. 31년이라는 다소 짧은 역사 덕분에 EPL 원년 멤버 중에서 한 번도 강등된 적이 없는 클럽은 6개나 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널, 첼시, 리버풀, 토트넘, 에버튼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범위를 넓혀 잉글랜드 프로축구 1부리그 전체 역사를 살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1888년 세계 최초의 프로 축구리그인 ‘풋볼 리그’가 잉글랜드에서 탄생했다. 1,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된 기간을 제외하면 잉글랜드 1부리그는 현재까지 124시즌을 소화했다. 표에서 보이듯이 잉글랜드 1부리그를 개근한 팀은 없다. 124년의 역사 동안 1부리그에서 가장 오래 버틴 팀은 120시즌의 에버튼이다. 3위는 리버풀 FC가 차지, 잉글랜드에서 가장 성공적인 축구 도시 중 하나가 리버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1부리그에서 연속적으로 가장 오랜 버틴 클럽은 누구일까? 아스널이다. 아스널은 1919~20시즌 이후 현재까지 97년 연속으로 1부리그에 속해 있다. 2위는 에버튼(69년 연속), 3위는 리버풀(61년 연속)이 차지했다. 에버튼은 1부리그 우승도 9번 차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20번), 리버풀(19번), 아스널(13번)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이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렇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잉글랜드 최고 팀 중의 하나인 에버튼이 현재 18위로 강등권에 있다. 이들이 작년에 이어 다시 한번 극적으로 강등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2.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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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유니폼 판매용' 선수는 정말 존재하는가

유럽 축구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많은 기업이 마케팅 활동의 목적으로 스폰서십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빅5 리그(프리미어리그, 라리가, 분데스리가, 세리에A, 리그앙)’에 속한 클럽들은 수익성 강화를 위해 글로벌 브랜드와 속속 손잡고 있다. 축구 스폰서십 산업의 선두주자는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EPL)다. 2020년 EPL은 스폰서십 계약으로 8억 3200만 유로를 벌어, 2위에 그친 라리가(4억 3600만 유로)를 압도했다. 그해 EPL 전체 수익의 28%가 스폰서십에서 나왔다. 축구 스폰서십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셔츠 스폰서, 킷 스폰서, 커머셜 파트너가 바로 그들이다. 셔츠 스폰서는 메인 스폰서라고도 불린다. 이 스폰서십의 가장 큰 매력은 기업의 브랜드나 로고를 후원하는 클럽 셔츠 앞면에 새기는 것이다. 2017~18시즌부터 EPL이 셔츠 소매에도 광고 부착을 허용한 이후, 슬리브(sleeve, 소매) 스폰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킷 스폰서는 킷 공급자(supplier)라고도 불린다. 영국에서는 스포츠팀이 입는 특정한 옷을 킷(kit)이라 칭한다. 킷 스폰서십 계약은 보통 셔츠 스폰서보다 오랫동안 지속된다. 또한 2022년을 기준으로 EPL의 빅6 클럽 중 토트넘을 제외한 5개 클럽의 킷 스폰서십 계약 규모가 셔츠 스폰서십보다 컸다. 커머셜 파트너는 셔츠나 킷 스폰서보다 클럽에 훨씬 적은 비용을 지불하기 때문에, 그들이 갖는 권한도 작다. 이들은 보통 후원의 대가로 축구장안의 광고보드권, 언론 인터뷰 시 배경막 로고 노출권, 홈페이지 로고 사용권 등을 보유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지역, 글로벌, 파이낸셜, 미디어 파트너를 갖고 있으며, 2021년 이들이 보유한 커머셜 파트너만 51개사에 달했다. 다양한 산업군에서 많은 기업들이 셔츠 스폰서와 커머셜 파트너에 참여한 것과는 달리, 킷 스폰서에 참여할 수 있는 기업은 한정적이다. 유니폼 혹은 스포츠용품 제조사만이 킷 스폰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서 셔츠를 가장 많이 판매한 클럽과 이를 만든 제조사는 누구일까? 2021년도 기준으로 가장 많은 셔츠를 판매한 클럽은 독일 분데스리가 최다 우승(31회)에 빛나는 바이에른 뮌헨이다. 뮌헨은 325만 장의 셔츠를 팔았고, 제조사는 아디다스였다. 표에서 보이듯이 스포츠용품 업계의 양대 산맥인 아디다스와 나이키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 셔츠를 만들고 있다. 범위를 넓혀 2022~23시즌 빅5 리그에 속한 모든 클럽의 킷 스폰서를 살펴봐도, 아디다스와 나이키가 선두 주자다. 이 두 회사는 각각 17개 클럽을 후원해 공동 1위에 올랐다. 다시 말해 빅5 리그 셔츠의 34.7%를 아디다스와 나이키가 만든 것이다. 막대한 이적료를 지불해 슈퍼스타를 영입한 클럽의 셔츠는 불티나게 팔릴 때도 있다. 따라서 팬들과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마저 스타를 영입하기 위해 거액의 연봉과 이적료를 지불해도, 클럽 셔츠가 그만큼 많이 팔려 이득이 날 것이라는 환상을 꿈꾼다. 하지만 셔츠가 한 장 판매될 때마다 클럽이 얻는 수익은 그리 많지 않다. 셔츠 판매로 벌어들이는 구단의 수익은 제조사들과 합의한 수수료에 따라 결정된다. 세계적인 클럽들도 보통 셔츠 판매 수익의 7.5~15%밖에 받지 못한다. 2020~21시즌을 앞두고 리버풀은 나이키와 킷 스폰서십 계약을 맺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리버풀이 나이키로부터 받기로 한 연간 액수 3000만 파운드는, 이전 킷 스폰서였던 뉴 발란스보다 1000만 파운드가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계약에서 리버풀은 셔츠 매출의 수수료를 20%까지 끌어 올렸다. 리버풀의 셔츠 가격은 70파운드다. 따라서 셔츠 한 장이 판매될 때마다 20%인 14파운드가 리버풀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위의 표와 같이 리버풀 셔츠가 연간 250만장 정도 팔리면 클럽은 수수료로 3500만 파운드를 벌 수 있다. 수수료 20%에 연간 계약 액수 3000만 파운드를 합하면 리버풀이 킷 스폰서십으로부터 얻는 액수는 총 연간 6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것이다. 또한 뉴 발란스와는 달리 나이키는 농구 스타 르브론 제임스나 뮤지션 드레이크 같은 세계적인 셀럽을 모델로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리버풀은 이러한 스타를 이용한 셔츠 판매 전략도 세울 수 있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1.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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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월드컵에 나서는 바이킹의 후예들

8세기 후반부터 300여년 동안 약탈을 저지른 북유럽의 게르만족을 바이킹이라고 부른다. 바이킹은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발판으로 전 유럽을 휩쓴 데 이어 북아프리카, 흑해, 페르시아, 그린란드, 북미지역에도 진출했다. 당시 유럽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이킹은 이교도이자 야만족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와 다르게 바이킹은 훌륭한 탐험가이자 상인이기도 했다. 또한 바이킹은 분쟁이 생기면 싸우지 않고, 회의와 표결을 걸쳐 의사를 결정하는 문화도 있었다.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시초인 영국의 의회제도도 이러한 바이킹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마초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바이킹 사회는 남녀평등을 중시하는 문화도 가졌다. 남성과 동등하게 전투에 참여한 쉴드 메이든(Shield-maiden, 방패의 처녀라는 뜻으로 바이킹 여전사를 의미)이 대표적인 예다. 아울러 바이킹 여성은 얼마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저분했을 것 같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바이킹은 상당한 수준의 위생적인 문화도 가졌다고 한다. 이들은 정리정돈에도 능했고 현대의 사우나 같은 목욕 문화도 가지고 있었다. 면도도 했던 바이킹들은 현재의 투블럭과 같은 헤어스타일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바이킹은 오늘날의 노르웨이, 스웨덴과 덴마크 지역 출신으로 이루어졌다. 바이킹의 후손 중 축구를 가장 잘한 나라는 단연코 스웨덴이다. 스웨덴은 지금까지 12번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무려 4번이나 4강에 들었다. 최고 성적은 자국에서 개최한 1958 월드컵에서 기록한 준우승이다. 4년 전인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도 스웨덴은 8강에 들었지만,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2022~23시즌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압도적으로 골을 많이 넣고 있는 엘링 홀란드를 보유한 노르웨이도 2022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사실 노르웨이는 역대 월드컵 진출이 3번에 불과할 정도로 전통적인 축구 강국은 아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세계 최강 브라질과 4번 맞붙어 2승 2무를 기록해, 축구에서 브라질에 패배한 적이 없는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다. 본토 기준으로 현재의 덴마크는 바이킹 국가 중 영토가 가장 작다. 하지만 과거의 덴마크 왕국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아이슬란드를 통치했을 정도로 북유럽의 맹주였다. 북유럽 국가들 국기에서 볼 수 있는 치우친 십자기인 노르딕 십자도 덴마크가 원조다. 덴마크는 이웃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날씨가 온화하다. 고지대도 없고 1월 평균 온도가 1.5°C에 불과해 눈도 별로 안 내린다. 따라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덴마크는 동계스포츠에서 별 성적을 낸 적이 없다. 이들이 현재까지 동계올림픽에서 획득한 메달은 컬링에서 기록한 은메달 1개가 전부다. 하계스포츠 중 덴마크는 핸드볼에서 강세를 보인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압도적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는 단연 축구다. 2013년 자료에 의하면 덴마크는 전국에 1600개가 넘는 클럽이 있고 이곳에 등록된 축구 선수만 3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덴마크의 인구가 59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축구 인재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는 5번 본선에 진출했던 월드컵보다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에서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들은 9번 유로 본선에 진출해 4번이나 4강에 들었다. 특히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92에서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은 신들린 선방을 보여주었고, 결승에서 독일을 2-0으로 꺾고 우승했다. 덴마크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나라이자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다. 더불어 덴마크는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블록 장난감인 ‘레고’의 나라이기도 하다. 낙농업도 발달해 있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품은 “Probably the best lager in the world(아마도 세계 최고의 라거일 것)”라는 슬로건으로도 유명한 칼스버그 맥주다.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등 세계적인 맥주 회사들은 축구를 포함해 다양한 스포츠에 스폰서로 참여해 왔다. 하지만 칼스버그는 축구에 진심인 회사다. 칼스버그의 전통적인 목표 고객(target audience)은 축구 팬인 관계로, 그들의 스폰서십 투자는 대부분 축구에 집중됐다. 이 덴마크 맥주회사는 월드컵과 유로 대회를 비롯해 여러 축구 클럽을 후원했다. 특히 칼스버그는 1992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리버풀의 셔츠 스폰서였다. EPL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셔츠 스폰서였던 칼스버그는 단순히 후원자가 아니라, 리버풀의 성공과 좌절을 함께 보낸 상징적인 존재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덴마크 축구대표팀의 서포터들은 롤리건(Roligan)이란 애칭으로 불린다. ‘Rolig’는 덴마크 언어로 평온(calm)을 뜻한다. 훌리건과 반대되는 개념의 이들은 스포츠맨 답지 않은 행동이나 폭력에 반대하고 차분하고 경쾌하게 대표팀을 응원한다. 롤리건은 최고의 국가대표팀 팬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덴마크는 2022 월드컵에서 프랑스, 호주, 튀니지와 함께 D조에 속해 있다. 16강 진출이 유력하게 점쳐지는 덴마크가 이번 월드컵에서는 어떤 스토리를 전해줄지 기대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11.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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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한국의 대척점에 있는 축구 강국은?

지구는 둥글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 수직으로 1만2000km를 파고 내려가면 지구의 정반대편이 나온다. 이러한 곳을 대척점(antipodes)이라고 한다. 대척점에 위치한 두 지역은 계절과 낮밤이 반대다. 대한민국의 대척점은 어디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지구 표면의 70%가 바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자. 즉 대척점이 서로 육지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다. 육지로 이어진 대표적인 대척점은 북극과 남극, 그리고 동아시아와 남미 대륙이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대척점은 우루과이 앞바다다. 육지로 이어진 우루과이와의 대척점은 전라남도 진도군과 신안군뿐이다. 제주도의 육지 대척점은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국경지대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우루과이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연을 가진 우루과이와 한국이 2022 카타르 축구 월드컵 첫 경기에서 맞붙는다. 16강 진출을 위해서 한국대표팀은 우루과이를 꼭 넘어야 한다. 국내 축구 팬들은 루이스 수아레스로 대표되는 2010년대 이후의 우루과이대표팀에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우루과이나 그들의 축구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도는 떨어진다. 우루과이는 한국보다 국토가 1.8배 크다. 인구는 단 350만 명에 불과하다. 이 나라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지만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아르헨티나와 훨씬 가깝다. 인구 구성도 아르헨티나와 비슷하다. 우루과이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인구의 88%)이 주류인 나라다. 오랜 우방인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관계를 미국과 캐나다에 비유할 때도 있다. 캐나다가 미국을 큰 형 같이 여기며 경제적, 문화적으로 의존하듯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의 옆집 형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국기(國旗)도 비슷하게 생겼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5월의 태양(Sun of May)은 위치만 다를 뿐 두 나라 국기에 등장한다. 하늘색은 두 나라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우루과이가 더 진한 색을 쓸 뿐이다. 형제국가 같은 두 나라도 축구에서는 라이벌이다. 아르헨티나보다는 우루과이에게 더 중요한 라이벌전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2014년 수아레스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고, 리오넬 메시와 팀 동료로 좋은 관계를 보여주면서 라이벌 관계가 많이 희석됐다는 견해도 있다. 아울러 두 나라 팬들은 한 나라가 제3국과 경기를 하면 서로를 응원한다. 예를 들어 우루과이가 독일과 경기하면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 편을 드는 식이다. 특히 과거에 전쟁을 벌이기도 했던 앙숙 브라질과 붙을 경우, 두 나라는 똘똘 뭉친다. 우루과이에 축구를 처음 전파한 이는 19세기 중·후반의 영국인 이민자들이었다. 1891년 창단된 알비언(Albion FC)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인데, 클럽명만 봐도 영국의 흔적이 드러난다. 알비언은 잉글랜드 혹은 브리튼 섬을 가리키는 옛 명칭이다. 20세기 초반에는 사우스햄튼을 시작으로 여러 영국 클럽이 이곳을 방문하여 우루과이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우루과이는 축구에 관해 선구자 같은 역할도 했다. 1902년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경기를 갖는다. 영국(UK)을 구성하는 홈 네이션스(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가 서로 맞붙은 경기를 제외한 최초의 국제 경기였다. 이후 두 나라는 지금까지 무려 197번 경기를 벌였다. 축구 역사상 이들보다 더 많이 맞붙은 국가는 없다. 1930년 첫 대회가 열린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도 우루과이가 개최했다. 초대 챔피언도 결승에서 아르헨티나를 4-2로 이긴 우루과이였다. 이들은 1950년 개최된 4회 월드컵에서도 결승에서 개최국 브라질을 2-1로 이겨 두 번째 우승을 거둔다. 우루과이 대표팀 셔츠 엠블럼에 새겨진 4개의 별에 의문을 갖는 팬들도 있다. 월드컵에서 2번 우승한 나라가 2개가 아닌 4개의 별을 붙였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우루과이는 1회 월드컵이 열리기 전인 1924 파리 올림픽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했다. 1924년 이전의 올림픽에는 아마추어 선수들이 나왔고, 1928년 이후에는 올림픽 축구에 나이 제한이 생긴다. 따라서 FIFA는 그들이 주관한 1924, 1928 올림픽 축구 챔피언만 세계 챔피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시작해 지금은 각 종목으로 퍼진 셔츠 스폰서십도 우루과이의 최고 명문 팀 페냐롤(Penarol)이 원조다. 비록 이 스폰서십의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50년대 페냐롤에서 시작된 셔츠 스폰서십은 1960년대에 유럽으로 건너간다. 2000~2010년 사이 우루과이는 무려 1414명의 선수를 해외에 수출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선수의 해외진출 숫자와 비슷하다. 아르헨티나(4700만 명), 브라질(2억 1000만 명)과 우루과이의 인구 차이를 고려하면 이 나라가 엄청난 축구 인재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30년은 월드컵 축구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회 월드컵이 자국에서 개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와 2030 월드컵 공동 개최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보단 스페인-포르투갈 연합이 100주년 월드컵 유치에 유리할 것 같다. 우루과이 축구는 1970년대 이후로 침체기를 겪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을 계기로 다시 한번 정상급 팀으로 거듭난다. 이들 축구의 황금세대가 뛸 마지막 2022 월드컵에서 우루과이가 어떠한 성적을 거둘지 관심이 모아진다. 한국과 우루과이가 나란히 조 1, 2위로 예선을 통과해 16강에서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오랜 라이벌전이 벌어지길 필자는 기대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9.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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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인종차별? 손흥민은 이미 편견과 싸워 이겼다

우연히 만난 흑인 시드니(웨슬리 스나입스)와 백인 빌리(우디 해럴슨)가 길거리 내기 농구를 하며 우정을 쌓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있다. 국내에는 ‘덩크 슛’으로 알려진 이 영화의 원제는 ‘White Men Can't Jump(백인은 점프를 못한다)’이다. 시드니는 빌리의 농구 실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백인은 점프를 잘할 수 없기 때문에, 시드니는 빌리가 덩크 슛을 못한다고 계속 놀린다. 스포츠 세계에는 “백인은 점프를 못한다”와 함께 “Black men can't swim(흑인은 수영을 못한다)"이라는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 고정관념·편견)이 널리 퍼져 있다. 아울러 서양인들은 아시안이 수학에 능하고 공부를 잘해서 회계사, 의사, 엔지니어 같은 직종에서 두각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반면 아시아인은 스포츠를 못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영국에는 “Asians can’t play football(아시안은 축구를 못한다)”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안은 남아시아(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출신을 의미한다. 영국 인구의 7%인 약 350만명이 남아시안 혈통이다. 하지만 2022년 이들이 1~4부 프로축구리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45%에 불과하다. 프리미어리그(EPL) 선수로 범위를 좁히면 남아시아인은 4명뿐이다. 많은 남아시안 어린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지만, 극소수만이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이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영국 프로축구 스카우트들은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한다. 동북아시아 출신 선수들은 남아시아와는 달리 EPL에 꾸준히 진출하고 있다. 중국의 쑨지하이는 맨체스터 시티 소속으로 2002년 EPL에서 최초로 골을 기록한 동북아시아 선수였다. 현재까지 14명을 EPL에 보낸 한국을 선두로 일본(10명)과 중국(7명)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몇몇 선수는 EPL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영국축구계는 이들의 ‘축구 실력’보다 동북아 선수를 보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수익 증대’에 더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이용해 클럽은 더 많은 셔츠를 판매할 수 있고, 새로운 스폰서십과 더 비싼 TV 중계권 계약 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서 7시즌을 보낸 박지성은 맨유가 리그 정상을 4번 차지하는 데 기여했고,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아시아 선수였다. 맨유 시절 박지성은 ‘Three-Lung Park(3개의 폐를 가진 박지성)’이라는 닉 네임을 얻었다. 엄청난 체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그라운드를 누볐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기술적으로도 훌륭한 선수였지만, 그조차도 미묘한 편견에 시달렸다. 잉글랜드 축구계가 가진 동북아시아 선수들을 향한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가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긍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들은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출전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체력을 바탕으로 열심히 뛸 수밖에 없다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창의력과 재능이 부족하다는 아시아 선수들은 기술로 칭찬받은 적이 없다. 돋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이들의 미덕으로 포장될 때도 있었다. 2021~22시즌 손흥민은 EPL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페널티킥 없이 필드골로만 23골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공동)득점왕에 올랐고, 소속팀 토트넘을 4위로 이끌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흥민은 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회(PFA)가 주관하는 ‘올해의 선수(Player of the Year)’ 최종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올해의 팀(Team of the Year)’에도 선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손흥민이 외면받자 팬들의 성토와 언론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객관적인 자료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PFA 상은 동료 선수의 투표로 결정된다. 문제는 선수들이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심사숙고하여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친분이 있거나 유명 선수에게 투표한다는 것이다. 또한 낮은 투표율과 시즌이 종료되기도 한참 전에 시작하는 투표 시기도 논란의 대상이다. 이번 시즌의 손흥민과 같이 리그 종반에 특히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손흥민이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주장도 널리 퍼져 있다. 과거 기록을 통해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이를 살펴보자. 1992~93시즌 출범한 EPL에서 득점왕이 PFA 올해의 팀에 오르지 못한 적은 11번 있었다. 이들의 국적은 잉글랜드(테디 셰링엄, 앤디 콜, 크리스 서튼, 디온 더블린, 마이클 오언), 네덜란드(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 뤼트 판 니스텔로이), 아르헨티나(세르히오 아구에로), 가봉(피에르 에메릭오바메양)과 이집트(모하메드 살라)다. 특히 하셀바잉크는 득점왕에 2번(공동, 단독 각각 1번)이나 올랐는데도 올해의 팀에 선정되지 못했다. 2010~11시즌 이후로 EPL 득점왕이 PFA 올해의 선수상 후보에 못 올라간 적도 5번 있었다. 이들의 국적은 불가리아(디미타르 베르바토프), 아르헨티나(아구에로), 가봉(오바메양), 이집트(살라), 잉글랜드(제이미 바디)다. 이렇듯 득점왕이 PFA 시상식에서 소외된 경우는 꽤 많았다. 이들의 국적과 인종도 다양한 편이다. 따라서 손흥민이 인종차별 때문에 PFA 시상식에서 제외됐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손흥민은 잉글랜드 축구계가 가지고 있는 아시아 선수에 대한 선입견에 상반되는 새로운 캐릭터다. 그는 매력적이고 언제나 웃고 있다. 폭발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극적인 골로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내성적인 다른 아시아 선수들과 달리 손흥민은 동료뿐만 아니라 상대 팀 선수, 감독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뛸 때는 독일어로, 지금은 영어로 인터뷰도 수월하게 소화한다. 지난겨울 영국 도시 곳곳에는 손흥민을 모델로 프리미어리그를 현지 팬들에게 홍보하는 광고판까지 등장했다. 그는 아시아 출신으로는 최초로 세계 최고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존재해온 편견을 바꾸기는 정말 어렵다. 잉글랜드 혹은 유럽축구계는 아직 아시아 출신을 최고의 선수로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어있다. 손흥민 같은 스타일의 선수가 다시 등장하지 않으면, 서구인들은 “그는 이례적인 케이스였어”라고 치부할 게 뻔하다. 그리고 “아시안은 축구를 못한다”는 선입견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손흥민은 지금 외로이 서구인이 가진 스테레오 타입에 맞서고 있다. 그를 롤 모델 삼아 제2, 제3의 손흥민이 계속 나오길 희망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6.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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