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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는 딱 2주...회복탄력성도 주전급, 황성빈이 마황으로 불리는 이유 [IS 피플]

타격 사이클은 한 주에도 몇 번씩 오르고 내린다. 상위 1%가 진입하는 프로야구에서도 주전과 백업, 스타와 슈퍼스타를 나누는 차이는 결국 위기관리 능력이다. 그런 면에서 올 시즌 롯데 자이언츠 활력소로 부상한 황성빈(27)은 이미 주전급 선수가 다 된 것 같다. 한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빠른 회복 탄력성을 보여줬다. 황성빈은 2024시즌 초반 백업 외야수였다. 소속팀 롯데가 치른 첫 20경기에서 선발로 나선 건 2경기뿐이었다. 하지만 롯데가 9연패 기로에 있었던 4월 18일 잠실 LG 트윈스전에서 선발로 나서, 상대 배터리 집중력을 흔드는 주루와 멀티 히트로 9-2 승리를 이끌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후 꾸준히 선발 출전했다. 햄스트링 부상으로 한 차례 이탈했지만, 4월 18일부터 5월 마지막 주 일요일(27일)까지 나선 17경기에서 타율 0.435를 기록하며 펄펄 날았다. 그런 황성빈은 이후 잠시 슬럼프를 겪었다.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9일까지 치른 2주 일정에서 11경기에 나서 타율 0.229에 그쳤다. 주로 1번 타자를 맡았지만, 9번 타자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부진은 오래 가지 않았다. 6월 둘째 주부터 지난주 일요일 일정까지 치른 12경기에선 다시 4할(0.404) 타율을 기록했다. 이 기간 3안타를 몰아친 경기만 세 번이었다. 롯데가 세 시리즈 만에 우세(3연전 2승 이상)를 노렸던 23일 고척 키움 히어로즈전에서도 우중간을 가르는 3루타를 포함, 3안타를 기록했다. 근성 넘치는 주루와 파이팅 넘치는 퍼포먼스로 '마·황(마성의 황성빈)'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가 다시 정상 궤도에 진입한 것. 황성빈은 3할(0.354)대 중반 타율로 고공비행 중이다. 황성빈은 타격에 대해 입버릇처럼 "김주찬·임훈 코치님께서 항상 내 타격을 확인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 지도해주시는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조언을 자주 하는 임훈 코치는 황성빈에게 상대 투수들이 그와의 승부에 애써 어렵게 승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고, 황성빈은 배터 박스 앞부분에 위치해 바깥쪽 공에는 스윙을 하지 않는 플랜을 짜고 타석에 임했다. 한동안 안타 생산이 줄었지만, 명확한 지향점을 갖고 상대 배터라와 승부하다 보니 다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롯데는 황성빈뿐 아니라 윤동희, 손호영, 나승엽 등 새 얼굴들을 주축으로 매끄러운 세대 교체를 해내고 있다. 5월 이후 팀 타율(0.291)은 10개 구단 중 1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신의 폼이 일시적이지 않다는 걸 증명한 황성빈이 있다. 안희수 기자 anheesoo@edaily.co.kr 2024.06.2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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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가 생길까 봐···올해도 많이 던진 안우진, 한 박자 쉬어간다

KBO리그 대표 토종 투수 안우진(키움 히어로즈)이 한 박자 쉬어간다. 키움은 지난 9일 안우진을 1군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특별히 몸 상태에 큰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수 보호 차원의 성격이 짙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안우진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엔트리 제외를 결정했다"면서도 "전체적으로 특정 부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고 설명했다. 5월 31일부터 6월 9일까지 1군 엔트리 제외와 마찬가지로 선수 보호 차원의 휴식이다. 안우진은 현재 리그 최고 투수다. 2018년 1차 지명 입단해 구위는 좋았지만 제구력이 흔들려 고전했다. 불펜 투수로 활약해 온 안우진은 2021년 선발 투수로 전향해 107과 3분의 2이닝을 던지며 8승 8패 평균자책점 3.26을 기록했다. 지난해엔 15승 8패를 올리며 평균자책점(2.11)과 탈삼진(224개) 1위를 차지했다. 데뷔 첫 골든글러브(투수)도 품에 안았다. 올 시즌 역시 국내 투수 중 평균자책점(2.33)이 가장 낮다. 구위가 좋은 만큼 어깨가 무겁다. 지난해 투수 가운데 이닝(196이닝)과 투구 수(3003개) 전체 1위였다. 올 시즌에는 팀 동료 아리엘 후라도(136이낭-2137개) 보다 조금 적은 2위(132와 3분의 2이닝-2088개)다. 지난해 같은 경기 수와 비교하면 엇비슷하다. 확실한 건 최근 3년 사이 투구 이닝과 투구 수가 많이 증가했다. 위험 신호가 감지됐다. 안우진은 지난 8일 롯데전 0-0으로 맞선 6회 초 2사 1루에서 교체됐다. 투구 수는 104개. 주 2회 등판이 예정돼 있었으나, 에이스의 자존심을 고려하면 예상 밖이었다. 8승 기회를 놓친 안우진도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최종 성적은 5와 3분의 2이닝 4피안타 1실점(0자책)이다. 홍원기 감독은 "안우진이 초반부터 볼넷(총 4개)을 내주는 등 유난히 힘들어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일요일 등판과 투구 수 등을 고려해 (6회 2사 1루 상황서) 교체했는데, (후속 투수가 실점해)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불편한 동작도 보였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공이 날리는 모습도 있었다. 그래서 우려스러웠다"고 진단했다. 전날(9일) 경기에서 키움은 지긋지긋한 구단 최다 타이기록인 9연패에서 탈출했다. 5년 연속 가을야구에 진출했으나 올 시즌엔 삼성 라이온즈와 꼴찌 싸움 중이다. 갈 길이 바쁘지만 '현재'보다 '다음'을 기약하는 분위기다. 최근 LG 트윈스에 최원태를 내주고, 유망주와 신인 지명권을 얻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홍원기 감독은 "아무리 급해도 (선수 몸 상태를 보고 이대로) 넘길 순 없었다"며 "더 큰 문제가 생길까봐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형석 기자 2023.08.10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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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고척] 9연패 키움 어쩌나, 에이스 안우진 1군 제외···"불편해 보였다"

"불편한 동작도 보였고 공이 날리더라. 좀 우려스러웠다."키움 히어로즈 투수 안우진이 보호 차원에서 잠시 휴식한다. 키움은 9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리는 롯데 자이언츠전을 앞두고 안우진을 1군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안우진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 이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안우진은 전날(8일) 열린 롯데전에 선발 등판해 5와 3분의 2이닝 동안 4피안타 4볼넷 1실점(0자책)을 기록했다. 0-0으로 맞선 6회 초 2사 1루, 투구 수 104개 상황에서 교체됐다. 시즌 8승 도전 기회를 놓친 안우진은 누상에 주자를 남겨놓고 내려오자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홍원기 감독은 "안우진이 초반부터 볼넷을 내주는 등 유난히 힘들어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그래서 우려스러운 부분도 있었다"며 "일요일 등판과 투구 수 등을 고려해 (6회 2사 1루 상황서) 교체했는데, (후속 투수가 실점해)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안우진은 올 시즌 리그에서 가장 많은 132와 3분의 2이닝을 책임졌다. 지난해 196이닝에 이어 올 시즌에도 투구 이닝이 많다. 올 시즌 성적은 7승 7패, 평균자책점은 2.37이다. 탈삼진 1위(157개)를 질주하는 등 국내 선발 투수 중 가장 위력적인 모습이다. 하위권에 처진 키움은 갈 길 바쁜 상황이나 안우진을 배려해 잠시 쉬어가도록 했다. 8일 경기서 롯데에 져 구단 역대 최다 9연패에 빠진 상태다. 2009년 5월 6일 KIA 타이거즈전부터 5월 17일 LG 트윈스와의 더블헤더 1차전까지 9연패를 당한 후 5196일 만이다.홍원기 감독은 "아무리 급해도 (선수 몸 상태를 보고 이대로) 넘길 순 없다. 전체적으로 특정 부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면서 "더 큰 문제가 생길까봐 결정했다"고 밝혔다. 고척=이형석 기자 2023.08.0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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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일요일 9연패 악몽' 결자해지

롯데가 지긋지긋한 일요일의 악몽에서 탈출했다. 연패가 출발한 곳에서 아픔을 털며 결자해지했다. 롯데는 6일 수원KT위즈파크에서 열린 KT와의 원정 경기에서 연장 10회 접전 끝에 8-7로 역전승했다. 8회까지 2-7로 뒤져 사실상 일요일 10연패가 점쳐졌다. 하지만 9회 선두 리드오프 딕슨 마차도부터 5번 강로한의 2점 홈런까지 5연속 안타로 극적인 동점에 성공했다. 이어 연장 10회 초 추재현의 2루타를 시작으로 전준우의 안타, 정훈의 결승 적시타로 이겼다. 비로소 일요일 9연패에서 벗어났다. 공교롭게도 일요일 연패의 출발점이 바로 KT 홈 구장에서였다. 롯데는 지난해 10월 25일 이곳에서 열린 KT와 경기에서 5-10으로 졌다. 이후 올 시즌 개막 후 5일까지 일요일 경기 8전 전패 중이었다. 4월 25일 수원 KT전에서 7회까지 5-4로 앞서다, 8회 동점 허용에 이어 9회 끝내기 패배까지 당했다. 유독 낮 경기에 약했다. 올 시즌 낮 경기 10패 1무의 성적표다. 일요일 패배는 경기가 없는 월요일을 지나 화요일까지 패배의 느낌이 이어져 더 타격이 크다. 6월이 시작되면서 일요일 경기의 플레이볼 선언 시간은 오후 5시로 옮겼다. 롯데는 일요일 악몽이 출발한 곳에서 아픈 기억과 작별했다. 또한 4월 25일 KT전에서 끝내기 패전 투수가 된 김원중은 6일 맞대결에서 올 시즌 최다 2이닝에 가장 많은 32개의 공을 던져 자존심 회복에 성공했다. 승리 투수가 됐다. 롯데의 6일 KT전 승리는 의미 있는 한 주의 마무리였다. 6월 1~3일 고척 키움전에서 5주 만에 위닝 시리즈를 달성했고, 이어진 주말 3연전에서도 위닝 시리즈를 거뒀다. 시즌 4~5번째 위닝시리즈였다. 래리 서튼 감독 체제 출범 후 처음으로 한 주 간의 승률을 플러스로 마무리했다. 롯데는 현재 이대호와 안치홍이 빠져 있다. 가장 먼저 복근 부상 중인 이대호가 곧 복귀할 전망이다. 서튼 감독은 6일 KT전을 앞두고 "이대호에게 '퓨처스리그에서 12~13타석을 소화한 뒤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다"고 소개했다. 이대호는 현재까지 4타석을 소화한 상태다. 무릎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빠진 안치홍도 몸 상태가 호전되면 돌아올 예정이다. 둘이 복귀하면 타선의 무게감이 더해질 전망이다. 롯데는 이번 주 두산과 KIA를 안방 사직으로 불러들여 홈 6연전을 갖는다. 이형석 기자 2021.06.0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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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IS] 42일 전 '글러브 패대기' 분노… 김원중 최다 2이닝 32구로 탈출

롯데 마무리 투수 김원중(28)은 "다시 마운드에 오르겠다"라고 자청했다. 6주 전, 같은 장소에서 KT에 당한 아픔을 만회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령탑은 마무리 투수의 그런 승부욕과 책임감을 높이 샀다. 롯데는 6일 수원KT위즈파크에서 열린 KT와 원정경기에서 연장 10회 접전 끝에 8-7로 역전승을 거뒀다. 이 경기의 승리 투수는 2이닝 무피안타 무실점을 한 김원중이었다. 하지만 6주 전으로 거슬로 올라가면 김원중은 같은 장소, 같은 팀을 상대로 뼈아픈 기억을 안았다. 롯데는 4월 25일 수원 KT전에서 9회 말 5-6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이때 패전 투수가 바로 김원중으로 기록됐다. 개막 후 7경기 만에 처음 실점했고, 더군다나 끝내기 안타여서 고개를 떨궈야만 했다. 실점까지의 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김원중은 4월 25일 KT전 5-5로 맞선 2사 2루에서 등판해 KT 조일로 알몬테를 처리하고 급한 불을 껐다. 9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그는 야수진의 아쉬운 수비 탓에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당시 지휘봉을 잡고 있던 허문회 롯데 감독은 9회 말 2사 2루 KT 이홍구 타석 1B-1S에서 자동고의4구를 지시했다. 김원중은 이후 송민섭마저 볼넷으로 출루시켜 만루에 몰린 뒤 김병희에게 통한의 끝내기 안타를 허용했다. 김원중은 마운드에 글러브를 패대기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팀 패배의 책임감과 승부욕, 또 구겨진 자존심 등의 영향으로 보였다. 상대 타자, 볼카운트를 고려하면 다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벤치의 작전이었다. 당시 허문회 감독은 "확률적으로 9번에서 1번으로 이어지는 뒷타자(송민섭, 김병희)보다 앞타자(이홍구)가 더 잘 친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고의4구를 고려했는데 데이터 등 확인이 늦어져 1B-1S에서 지시했다"라고 했다. 이어 "(2사 2루에서) 한 점을 주면 끝이니까 걸렀다. 김원중이 좀 더 편안한 상황에서 승부하도록 해주려고 했다"라고 덧붙였다. 이튿날 김원중은 허문회 감독에게 "(이홍구와) 승부에 자신이 있었다"고 아쉬움을 밝혔다. 롯데는 이 경기 패배로 일요일 4연패에 빠졌다. '일요일 악몽'은 사령탑이 래리 서튼 감독으로 바뀐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6월 6일, 김원중에게 명예 회복의 기회가 극적으로 다가왔다. 롯데가 2-7로 뒤진 9회 초 공격에서 7연속 안타로 5점을 뽑는 집중력을 발휘하자, 김원중도 불펜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는 9회 말 세 타자를 공 13개로 삼자범퇴 처리했다. KT 마무리 김재윤이 9회 4안타 2실점으로 동점을 허용한 반면, 롯데는 클로저의 깔끔한 투구를 등에 업어 분위기를 탈 수 있었다. 연장 10회 초 선두타자 추재현의 2루타에 이은 후속 전준우의 안타가 나왔고 4번타자 정훈이 1타점 적시타를 쳤다. 김원중은 8-7로 리드를 잡은 연장 10회 말에도 등판을 자처했다. 그리고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한 차례 아픔을 안겼던 김병희에게 볼넷을 내줘 동점 주자를 출루시켰다. 하지만 조용호를 내야 땅볼 처리하고, 황재균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팀 승리를 확정지었다. 롯데는 드디어 일요일 9연패에서 탈출했다. 서튼 감독은 "2이닝 등판을 자청해 완벽하게 막아준 김원중을 칭찬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김원중은 이날 시즌 개인 최다 타이인 2이닝을 책임졌고, 가장 많은 32개의 공을 던졌다. 5월 평균자책점 9.64로 흔들린 김원중은 이달 4경기에서 1승 2세이브로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총 4이닝을 던지는 동안 안타 없이, 볼넷 1개만 내줬다. 6주 전 아픔을 되돌려주는 동시에, 자신의 투구로 팀의 일요일 9연패 탈출을 확정짓는 의미 있는 '마무리'였다. 수원=이형석 기자 2021.06.07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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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IS] '2-7→8-7' 서튼 감독 "엄청난 역전승, 롯데 정체성 보여줘"

롯데가 KT를 상대로 짜릿한 연장전 승리를 거두며 일요일 9연패를 탈출했다. 롯데는 6일 수원에서 열린 KT와의 원정 경기에서 연장 10회 접전 끝에 8-7로 이겼다. 9회 5점, 10회 1점을 뽑는 막판 집중력이 돋보였다. 지난해 10월 25일 수원 KT전부터 시작된 지긋지긋한 일요일 9연패에서 벗어났다. 롯데는 2-7로 뒤진 9회 초 리드오프 마차도를 시작으로 7번타자 한동희까지 7타자 연속 안타를 터뜨렸다. 무사 1, 2루에서 전준우의 1타점 2루타가 나왔고, 정훈이 바뀐 투수 마무리 김재윤에게 2타점 적시타를 쳤다. 이어 강로한이 동점 2점 홈런을 터뜨렸다. 연장 10회에는 선두타자 추재현이 KT 이보근에게 2루타를 치고 나가 분위기를 끌고 왔다. 이어 전준우의 안타로 무사 1, 3루 찬스가 이어졌고, 4번타자 정훈이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로 추재현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이는 결승점이었다. 롯데는 추재현이 5타수 4안타 1타점을, 정훈이 결승타를 포함해 6타수 2안타 3타점을 뽑아냈다. 마차도와 전준우, 손아섭도 멀티 히트(한 경기 2안타 이상)를 때려냈다. 래리 서튼 롯데 감독은 "엄청난 역전승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우리 팀의 정체성을 보여준 경기였다"라며 "실점하지 않은 불펜진과 2이닝 등판을 자청해 완벽하게 막아준 김원중을 칭찬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수원=이형석 기자 2021.06.06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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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IS] '9회 5점, 10회 결승점' 롯데의 무서운 뒷심, 일요일 9연패 탈출

롯데가 9회 5점, 연장 10회 1점을 뽑아 일요일 9연패를 극적으로 탈출했다. 롯데는 6일 수원에서 열린 KT와의 원정 경기에서 경기 후반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며 연장 10회 접전 끝에 8-7로 이겼다. 9회 5점, 10회 1점을 뽑는 집중력이 돋보였다. 지난해 10월 25일 수원 KT전부터 시작된 지긋지긋한 일요일 9연패에서 벗어났다. 경기 중반까지 롯데는 패색이 짙었다. 데뷔 첫 선발 등판이던 5월 15일 사직 KT전에서 5이닝 4피안타 무실점 호투를 한 롯데 나균안은 3주 만에 KT와 다시 맞붙었다. 하지만 이날 초반부터 제구력 난조 속에 일찍 교체됐다. KT는 2회 말 선두타자 조일로 알몬테가 볼넷으로 출루하자, 후속 유한준이 1타점 2루타를 쳤다. 이어 장성우의 희생번트에 이은 1사 3루에서 배정대-박경수의 연속 1타점 적시타가 터졌다. 3-0으로 앞선 3회에는 황재균과 강백호가 2루타와 볼넷으로 찬스를 만들었고, 유한준이 1사 2·3루에서 2타점 적시타를 뽑았다. 롯데는 4회 말 나균안이 선두타자 배정대에게 2루타를 얻어맞자, 마운드를 최영환으로 교체했다. 나균안은 3이닝 6피안타 5실점으로 선발 전환 후 한 경기 최소 투구이닝, 최다 실점을 했다. 롯데는 5회 초 1사 후 지시완의 볼넷과 딕슨 마차도의 안타로 찬스를 잡았다. 이후 추재현이 KT 윌리엄 쿠에바스에게 1타점 적시타를, 2사 만루에서 민병헌이 1타점 적시타를 뽑았다. KT는 7회 황재균의 볼넷과 알몬테의 안타, 유한준의 사구로 얻은 찬스에서 장성우가 2타점 쐐기 적시타를 터뜨려 승기를 잡는 듯 했다. 하지만 9회 롯데의 추격은 무서웠다. 리드오프 마차도를 시작으로 7번타자 한동희까지 7타자 연속 안타를 터뜨렸다. 무사 1, 2루에서 전준우의 1타점 2루타가 나왔고, 정훈이 바뀐 투수 마무리 김재윤에게 2타점 적시타를 쳤다. 이어 강로한이 동점 2점 홈런을 터뜨렸다. 다만 이어진 무사 1, 2루에선 앞서가는 점수를 뽑는데 실패했다. 롯데는 연장 10회 선두타자 추재현이 KT 이보근에게 2루타를 치고 나가 분위기를 끌고 왔다. 이어 전준우의 안타로 무사 1, 3루 찬스가 이어졌다. 4번타자 정훈은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로 추재현을 홈으로 불러들였다. 이는 결승점이었다. 롯데는 추재현이 5타수 4안타 1타점을, 정훈이 결승타를 포함해 6타수 2안타 3타점을 뽑아냈다. 마차도와 전준우, 손아섭도 멀티 히트(한 경기 2안타 이상)를 때려냈다. KT는 9회 심재민이 흔들렸고, 전날 등판해 27개의 공을 던진 마무리 김재윤이 이날 갑작스럽게 등판해 팀의 리드를 지켜내지 못했다. 수원=이형석 기자 2021.06.06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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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인천 코멘트] 박경완 감독대행 "연패, 최저 승률, 꼴찌에 대한 부담 있다"

박경완 SK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팀을 다시 이끈다. SK 구단은 8일 오전 '올해 잔여 시즌을 박경완 감독대행 체제로 팀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SK는 지난 6월 25일 염경엽 SK 감독이 인천 두산전 중 의식을 잃고 쓰러져 한동안 박경완 수석코치가 팀을 이끌었다. 지난 1일 염 감독이 복귀해 원래 자리인 수석코치로 돌아갔지만 6일 경기를 앞두고 염 감독이 기력 저하로 응급실 신세를 지면서 감독대행으로 다시 팀을 이끌게 됐다. 한 시즌에 대행을 두 번이나 하는 흔치 않은 일을 경험하게 됐다. 박경완 감독대행은 8일 인천 키움전에 앞서 "감독님과 어제 잠시 통화했다. 일요일 경기를 앞두고 옆에 있었지만, 기력이 너무 떨어진 상황이었다"며 "힘든 상황에 복귀를 결정했지만, 책임감 때문에 오셨던 거라고 생각한다. 체력적으로 안 됐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나온 거 같다. 먼저 건강을 챙기는 게 우선이다"고 말했다. SK는 현재 9연패 중이다. 팀 역대 최다연패인 11연패에 근접했다. 박경완 감독대행은 "여러 가지 연패에 부담도 있고 최저 승률에 대한 부담도 있다. 꼴찌에 대한 부담도 있지만 남은 42경기에서 선수들과 돌파구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이어 "선수단 미팅에서 첫 번째는 본인을 위해서, 두 번째는 동료를 위해서, 세 번째는 SK팀과 전체 구성원을 위해서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선수단 가족과 팬들을 위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말을 했다"며 굳은 각오를 다졌다. 인천=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ongang.co.kr 2020.09.08 16:32
스포츠일반

[창간 50 특별기획]한국스포츠 50년, 슈퍼스타 50인, 환희의 50신

일간스포츠는 한국스포츠 반세기를 함께 했다.1969년 창간해부터 2019년까지 50년 동안 한국 스포츠에는 수많은 스타가 등장했다. 그중 시대를 풍미한 독보적인 슈퍼스타들이 존재했다. 일간스포츠와 스타들을 돌아보면 한국 스포츠의 역사가 보인다. 스타들이 만들어낸 환희의 장면들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일간스포츠는 중앙일보-일간스포츠의 스포츠 담당 기자들을 통해 50년의 기간을 10년 단위로 나눠 각 세대별 최고스타 10인을 선정했다. 이어 한국 스포츠전문가들의 자문 등을 두루 구해 총 50인을 확정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는 제외했다. 오직 당시 현역으로 뛴 선수로만 구성했으며 또 각 시대별 같은 종목 선수들은 최대한 배제했다.50년을 수놓은 영광의 슈퍼스타 50인을 소개한다. <1969~1979 : 배고팠던 시절 국민들을 위로한 영웅>1960년, 70년대 한국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 국민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했던 쉼터가 스포츠였다. -김일(프로레슬링)김일은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에서 박치기왕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박치기를 특기로 극동 헤비급 챔피언·올아시아 헤비급 챔피언·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활약을 펼쳤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프로레슬링 전설로 위용을 떨쳤다. 국민들은 김일의 경기가 열리는 날에 흑백 TV 앞에 모여 열렬히 응원했다. 김일의 움직임으로 인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은 배고팠던 시절 조국의 영웅이었다. -홍수환(복싱)4전5기의 신화. 두 체급에 걸쳐 세계 타이틀을 거머쥐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복싱 선수다.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WBA(세계복싱협회)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세계 정상에 섰다. 당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한 마디는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 또 1977년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결정전에서 헥토르 카라스키야를 상대로 2회 4번 다운당한 뒤 3회에 KO승을 거뒀다. 4전5기 신화. 국민들은 홍수환의 투혼을 보며 힘겨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양정모(레슬링)1976년 8월 1일.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주인공은 양정모였다.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양정모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은 첫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은 일요일. 신문이 발행되지 않는 휴일이어서 전국에 호외가 깔렸다. 양정모는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과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2회 연속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며 최고의 레슬링 영웅으로 군림했다. -조오련(수영)'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아버지다.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자유영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아시안게임 2관왕이 탄생했다. 무명의 18세 고교생이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이어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400m, 1500m 2관왕에 올랐다. 조오련은 한국신기록 33개, 대회신기록 17개를 갈아치웠다. 한국 수영은 그렇게 조오련으로부터 출발했다. -김진호(양궁)양궁 최강국 한국. 그 시작은 고교생 신궁 김진호였다. 1970년대 세계양궁은 김진호의 시대였다.그는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에서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18세 고교생이었던 김진호를 위해 카퍼레이드 행사까지 열며 국민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어 김진호는 1983년 LA세계선수권에서 또 다시 5관왕에 올랐다. 여자 신궁 계보의 시조. 한국 양국의 위대함을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전설이다. -이에리사(탁구)한국 탁구의 어머니라 불리는 이에리사다.그는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다. 정현숙과 박미라 그리고 이에리사가 팀을 이뤘고, 19세 막내 이에리사가 에이스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스매싱도 이에리사의 손에서 나왔다. 이 쾌거는 '사라예보의 기적'이라 불렸고, 한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전국의 탁구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백옥자(육상)1970년대 '아시아의 마녀'라 불리며 아시아 육상을 지배한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백옥자다.그는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포환던지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한국 여자 선수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16m28cm,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육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육상 불모지 한국에서 등장한 영웅이었다. -김응용(야구)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는 김응용이었다.1966년부터 1972년까지 한일은행 소속으로 한국 야구를 주도한 주인공이다. 김응용이 있기에 한일은행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그는 홈런황 3회를 차지하는 등 실업야구 최고의 거포였다. 통산 타율 3할7리를 기록했다. 또 김응용은 국가대표 4번 타자였다. 1971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다. 아시아선수권 2번째 우승. 김응용 이름 앞에 '영원한 국가대표 4번 타자'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유다. -신동파(농구)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농구를 이끌었던 슈퍼스타 신동파다.그는 1967년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해 1974년 은퇴할 때까지 3만 득점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라이벌이 없었다. 그의 위상은 해외까지 퍼졌다.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결승 필리핀과 경기에서 50점을 넣으며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신동파의 활약에 반한 필리핀에 신동파 신도롬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에서 평균 30득점을 넘기며 득점왕에 올랐고,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조혜정(배구)'작은 새'라 불린 한국 여자배구의 전설 조혜정이다.그는 165cm의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점프와 파워로 한국 배구의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조혜정이 이끄는 배구대표팀은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를 3-1로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탄생하는 명장면. 올림픽과 함께 조혜정은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여자배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9~1989 : 구기종목에서 등장한 불세출의 스타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시대에는 유독 구기종목에서 불세출의 스타들이 등장했다. 축구와 야구 그리고 농구와 배구까지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이 이름을 날렸다. 또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감동이 찾아왔다. -차범근(축구)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축구에는 불멸의 슈퍼스타가 등장한다. 바로 차범근이다.차범근은 한국 선수 최초로 유럽 무대를 밟았다.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로 꼽혔던 독일 분데스리가. 그는 다름슈타트를 시작으로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차붐은 UEFA(유럽축구연맹) 컵 우승을 2회를 이끌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골 신기록(98골)도 세웠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136경기 출장, 58골로 최다출전, 최다골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영웅이자,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선동렬(야구)야구에는 국보급 투수가 탄생했다. 한국야구는 선동렬 시대에 돌입했다.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선동렬. 이후 프로야구는 해태 왕조가 지배했다. 그 중심에 '무등산 폭격기' 선동렬이 있었다. 3년 연속 투수 3관왕(다승·승률·평균자책점) 정규리그 MVP 3회·골든글러브 6회·7년 연속 평균자책점 1위 등을 기록하는 등 해태를 6번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146승, 132세이브, 방어율 1.20이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에 이견이 없다. -최동원(야구)선동렬이 등장하기 전 프로야구의 유일한 전설, 최동원이다.그는 1984년 다승왕·탈삼진왕·골든글러브에 이어 MVP까지 수상하며 프로야구를 평정했다. 그해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홀로 4승을 따내며 롯데 자이언츠를 사상 첫 정상에 올려놨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장착한 무쇠팔 최동원이었다. 이후 1985년 20승·1986년 19승·1987년 14승까지 해마다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최고 투수로 명성을 이어갔다. 선동렬과 라이벌 구도는 프로야구 최대 빅이슈였다. -이충희(농구)신동파의 뒤를 이은 최고의 슈터, 이충희의 등장은 한국 농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농구대잔치 출범 후 3시즌 동안 두 차례 팀 우승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현대전자의 상징. 한 경기 69점을 기록하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최초로 4000득점 돌파 그리고 5시즌 연속 득점왕 등 슛도사를 막을 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대표팀까지 번졌고,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1986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홀로 45점을 성공시키며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강만수(배구)타고난 힘과 기술 그리고 센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최고의 공격수. 강만수를 정의하는 말이다.1970년대와 80년대를 풍미한, 배구 역사상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다. 1972년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한국은 강만수로 뜨거웠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기 때문이다. 이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우승과 1979년 멕시코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끌며 '아시아의 거포'로 불렸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기도 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현정화(탁구)한국에서 처음 개최된 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최고 스타는 현정화였다.한국 여자탁구의 상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을 시작으로 1987년 뉴델리세계선수권 복식 금메달을 차지했다. 조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메달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기대는 현실이 됐다. 서울올림픽 복식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로 최초로 2010년 국제탁구협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현정화라는 이름으로 한국 여자탁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그가 은퇴한 뒤 한국 여자탁구는 단 한 번도 세계 정상에 서지 못했다. -김수녕(양궁)한국 양궁 역사상 최고의 신궁, 단연 김수녕이다.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실력, 카리스마 그리고 냉정함까지, 김수녕 그 자체가 한국 양궁의 얼굴이었다. 1987년 16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관왕 탄생.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품었다. 한국 최초의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의 주인공도 김수녕이다. 세계신기록을 무려 35회나 달성했고, 한국 역대 올림픽 메달 횟수(6개) 공동 1위다. -손미나(핸드볼)우생순의 시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1984년 LA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대표팀은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조국에서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소련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21-19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구기 종목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은 그렇게 나왔다. 금메달 멤버는 총 15명. 그중 골키퍼로 한국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대표로 선서를 한 손미나가 국민들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이만기(씨름)예능에 나오는 친근한 옆집 아저씨가 아니다. 이만기는 한국 씨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다.이만기는 1980년대 씨름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1983년 첫 천하장사를 차지한 뒤 총 10회 정상에 올랐다. 역대 1위. 또 백두장사 19회, 한라장사 7회를 차지했다. 기술씨름을 도입한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압도적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만기의 경기를 보기 위해 대통령이 경기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이만기가 수놓은 씨름은 한국 최고 인기스포츠였다. -장재근(육상)한국 육상의 전설이 등장했다. 한국 육상 역대 최고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등장이다.그는 20세의 나이로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에 출전해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안게임 최초 육상 트랙 금메달이었다. 육상 천재 장재근에 한국은 열광했다. 그는 이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200m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2연패에 성공한다. 1985년 자카르타아시아선수권에서 장재근은 20초41이라는 한국신기록을 작성했다. 이 기록은 이후 33년 동안 한국신기록으로 남아있었다. <1989~1999 : IMF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 희망을 안긴 영웅>1997년 한국에 불어닥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실의와 고통에 빠진 국민들에게 용기를 안긴 스포츠 스타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가 곧 희망이자 위로였다. -박찬호(야구)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그는 IMF 위기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며 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긴 영웅이었다.1994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1997년 14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1998년 15승을 수확하며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2000년 18승을 달성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아시아 최다승이다. 또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동메달 등을 이끌며 야구대표팀에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세리(골프)IMF 위기의 시절 국민들을 위로했던 또 한 명의 슈퍼스타, 박세리다.미국 LPGA 개척자. 1998년 LPGA 무대에 뛰어들었고, 데뷔 4개월 만에 맥도널드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US오픈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했다. 특히 US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샷을 한 장면은 한국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박세리의 모습에 국민들은 힘을 얻었다. LPGA 25승으로 한국인 최다 우승자 역시 박세리다. -황영조(마라톤)'몬주익의 영웅'의 등장으로 한국 육상은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쳤다.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린 뒤 홀로 몬주익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그리고 두 팔을 힘차게 들고 골인했다.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육상 첫 올림픽 금메달.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의 금메달 이후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이후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며 다시 한 번 포효했고, 1994년 미국 보스턴마라톤에서는 당시 한국 최고 기록인 2분8초09를 기록했다. -심권호(레슬링)심권호라는 이름은 세계 최고라는 의미다.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48kg급 금메달을 목에 건 뒤 1995년 프라하세계선수권,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까지 정상을 차지했다. 48kg급이 폐지되자 54kg급으로 체중을 늘려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를 밟았다. 1998년 예블레세계선수권·1998년 방콕아시안게임·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금메달을 일궈냈다. 하계올림픽 최초 올림픽 2연패, 한국 올림픽 사상 첫 두 체급 석권 그리고 세계 레승링 최초 두 체급 그랜드슬램 달성.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전기영(유도)한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는 유도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전기영이다.유도 천재, 업어치기의 달인으로 불린 그는 20세의 나이로 참가한 1993년 해밀턴세계선수권 78kg급에서 우승했다. 한국 역대 최연소로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5년 지바세계선수권에서는 86kg급에 도전해 금메달을 차지, 두 체급을 석권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에서는 1회전을 제외하고 모두 한판승으로 이기며 정상에 섰다. 1997년 파리세계선수권에서도 1위에 오르며 세계선수권 3연패를 달성했다. -박주봉(배드민턴)배드민턴의 교과서 박주봉. 그는 한국을 넘어 세계 배드민턴의 전설이었다.1980년 17세의 나이에 대표팀에 발탁됐고, 1982년 덴마크오픈에서 이근구와 한 조로 역대 최연소로 국제대회 우승을 일궈냈다. 1985년 캘거리세계선수권 우승·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1989년 자카르타세계선수권 금메달·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1991년 코펜하겐세계선수권 1위 등 승승장구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했다. 1996년 '배드민턴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허버트 스칠 상을 수상했다. -전이경(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라 불리는 유일한 선수, 전이경이다. 그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1988년 12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올림픽 1000m와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석권, 2관왕에 올랐다. 이어 1995년 요빅세계선수권을 시작으로 1996년 헤이그, 1997년 나가노까지 개인종합 3연패를 일궈냈다. 1998년 나가노올림픽에서도 1000m와 3000m 계주를 석권하며 한국 여자 최초로 올림픽 2회 연속 2관왕에 오르는 영광을 품었다. -허재(농구)농구대통령이 당선됐다. 농구 9단이라 불리며 한국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선수, 허재다.중앙대 1학년 시절 농구대잔치에 나서 평균 24득점을 올리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어 기아자동차에 입단하자 기아 왕조가 구축됐다. 기아의 에이스로 농구대잔치 5연패 등 7회 우승을 일궈냈다. 3번 MVP를 수상했고, 베스트 5에 6회 포함됐다.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스타. 국가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1990년 아르헨티나세계선수권 이집트전에서 62점을 넣으며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홍명보(축구)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다.그는 1992년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해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 최초로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품었다. 이후 일본 J리그에서 진출하며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한국 대표팀 전설이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1994년 미국월드컵,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아시아 최초로 4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다. 홍명보는 A매치 136경기 출전으로 한국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씨름)이만기를 1인자에서 내려앉히고 새로운 1인자로 등극한 괴물, 강호동이다.이만기의 은퇴는 곧 강호동이라는 새로운 황제의 등극과 연결된다. 1989년 일양약품에 입단한 20세 강호동은 첫 백두장사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4강에서 이만기와 첫 공식전에서 맞붙어 2-0으로 승리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1990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천하장사에 올라섰다. 이후 백두장사 7회, 천하장사 5회를 차지했다. 최단기간 천하장하 5회라는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강호동이 은퇴하자 씨름의 황금기도 끝났다. <1999~2009 : 불모지에서 태어난 올림픽 스타 그리고 붉은물결 2002년>불모지 한국. 그동안 한국에서 약했던 종목에서 슈퍼스타들이 등장해 행복했던 시기다. 또 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탄생했다. -박태환(수영)박태환의 등장. 한국스포츠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했다.수영 불모지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15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참가했던 그는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2007년 멜버른세계선수권 남자 자유형 400m 금메달을 따더니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로 400m 정상에 섰다. 200m에서도 은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3관왕, 2011년 상하이세계선수권 금메달 등 세계 정상급 기량을 이어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400m, 200m에서 은메달을 땄다. -장미란(역도)한국 역도 역사의 새로운 신화, 장미란이 썼다.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5년 카타르세계선수권부터 2006년 산토도밍고·2007년 치앙마이·2009년 고양까지 4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역도계에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압권이었다. 여자 +75kg급 경기에서 인상 140 kg·용상 186 kg·합계 326kg을 기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경신했고, 2위와 격차가 무려 49kg이나 났다. 압도적인 우승, 압도적인 선수였다. -진종오(사격)한국은 세계최고의 권총 사수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진종오가 있다.2008년 베이징올림픽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딴 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2연패를 달성하더니,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세계 사격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일궈냈다. 2010년 뮌헨·2014년 그라나다·2018년 창원 등 세계선수권에서도 연이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로 김수녕과 함께 역대 한국인 올림픽 최다 메달 공동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승민(탁구)한국 탁구의 마지막 자존심, 유승민이다.2000년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유승민은 2004년 이집트오픈에서 우승하며 기대를 받았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탁구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이 나왔다. 이 금메달은 21세기 올림픽에서 유일한 비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 이후 2012년 런던올림픽 단체전 은메달, 2018년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등을 목에 걸며 한국 탁구의 간판 역할을 했다. 유승민 이후 한국은 단 한 번도 올림픽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승엽(야구)국민타자. 이승엽이 아니면 붙을 수 없는 이름이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홈런왕. 1999년 54홈런을 기록하며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돌파했다. 2003년에는 한국 역대 최다인 56홈런을 때렸다. KBO 통산 465개의 홈런으로 역대 1위에 오른 이도 이승엽이다. 타점(1495점) 득점(1351점) 등도 1위다. 홈런왕 5회·MVP 5회·타점왕 4회·골든글러브 10회 등 기록이 이승엽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주역이기도 하다. -안현수(쇼트트랙)쇼트트랙 여제가 전이경이라면 황제는 안현수다.많은 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선 경험이 있지만 안현수보다 압도적인 선수는 없었다. 쇼트트랙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선수. 16세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2003년 바르샤바부터 2004년 예테보리·2005년 베이징·2006년 미니애폴리스·2007년 밀라노까지 세계 최초로 세계선수권 5연패를 달성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1000m·1500m·5000m 계주까지 3관왕을 차지했다. 500m 동메달도 추가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메달 신기록이다. -김세진(배구)한국 배구에 등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스타, 김세진이다.1995년 실업배구 삼성화재의 창단멤버로 합류해 삼성화재 왕조를 이끈 스타였다. 김세진이 활약하던 시기 배구는 폭발적 인기를 받았다. 김세진을 앞세운 삼성화재는 리그 9연패를 일궈냈다. 배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였다. 2001년 창원아시아배구선수권과 2003년 톈진아시아배구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특히 1994년 월드리그에서 베스트 6에 오르며 월드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서장훈(농구)한국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빅맨, 단연 서장훈이다.1994년 연세대를 대학 최초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끌 때부터 그는 국보급 센터였다. 공격과 수비 외곽능력까지 갖춘 전천후 선수. 1998년 청주SK 입단 후 서울 삼성·전주 KCC·인천 전자랜드 등에서 활약했다. 1999년 리바운드 상 수상. 프로농구 사상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왕을 차지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프로통산 1만3231득점·5235리바운드 기록, 역대 1위.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야오밍이 이끄는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최경주(골프)한국 남자 골프의 세계화를 이끈 선구자, 최경주다.1999년 한국 남자 선수 최초로 PGA투어 자격을 획득했다. 2001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2002년 5월 뉴올리언즈 콤팩 클래식에서 한국 첫 PGA 투어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탬파베이 클래식에서 2승을 챙겼다. 이후 AT&T 내셔널 등 PGA에서 6회 우승을 더 차지하며 통산 8회 우승을 기록했다. 한국 남자 선수로는 최고의 기록이다. 잡초 골퍼라 불리며 열악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한국 골프의 자존심을 높인 영웅이다. -박지성(축구)한국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환희,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그 중심에는 두개의 심장을 가진 박지성이 있었다.한국은 포르투갈·이탈리아·스페인 등을 꺾고 아시아 역대 최고의 성적인 4강에 진출했다. 거리는 붉은물결르 뒤덮혔고, 선수들은 국민영웅으로 등극했다. 그중 핵심은 박지성. 그는 2005년 잉글랜드 최고 명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 최초의 잉글랜드 진출. 이때부터 맨유는 국민클럽이 됐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리그 우승 4회 등 총 13개의 우승트로피를 수집했다. <2009~2019 : 동계스포츠의 비상 그리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과거 한국의 동계스포츠는 쇼트트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달랐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다른 종목에서 세계 1등이 탄생했다. 프로스포츠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연아(피겨)한국 동계스포츠의 역사는 김연아가 있을 때와 없을 때로 나눌 수 있다.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 김연아가 나온 건 기적이다.김연아는 한국을 넘어 세계 피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하이라이트는 2010년 밴쿠버올림픽. 김연아는 쇼트 78.50점, 프리 150.06점 총합 228.56점으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올림픽·세계선수권·4대륙 선수권·그랑프리 파이널 등을 모두 제패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로 역사에 기록됐다. 11번 세계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이상화(스피드스케이팅)'빙속여제' 이상화를 빼놓고 한국 동계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2010년 밴쿠버올림픽 여자 500m에서 76초09로 우승, 한국 여자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74초70, 올림픽 신기록으로 2연패에 성공한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3개 대회 연속 메달을 딴 선수로 남았다. 2013년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나온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고 있다. -윤성빈(스켈레톤)한국을 넘어 아시아 최초로 올림픽 썰매 종목 금메달을 딴 주인공, 윤성빈이다.한국 스켈레톤의 간판인 그는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압도적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평창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1∼4차 레이스에서 무려 3차례나 트랙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1∼4차 합계 3분20초55로 정상을 차지했다. 한국과 아시아 동계스포츠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스켈레톤 불모지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윤성빈. 그의 헬멧에 그려진 아이언맨처럼 그는 한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다. -양학선(체조)한국 체조의 새로운 역사, 도마의 신이 창조했다. 양학선이다.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2011년 도쿄세계선수권 우승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양학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신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구에서 단 한 명만 할 수 있는 최고난위도 기술 '양학선'을 앞세워 도마 금메달을 차지했다. 16.533점. 압도적 우승이었다. 한국 체조 역사상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2013년 앤트워프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다. -황경선(태권도)태권도 종주국 한국. 수많은 선수가 세계 정상에 섰다. 그중 가장 많은 최초의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이는 '태권여제' 황경선이다.18세 나이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67kg에 나서 동메달을 차지한 그는 2005년 마드리드세계선수권과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 그리고 2007년 베이징세계선수권까지 재패한다. 남은 건 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멈추지 않고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태권도 최초의 올림픽 2연패. 최초의 올림픽 3회 연속 진출을 일궈냈다. -박인비(골프)미국 LPGA에는 한국 여성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 최선봉에 자리를 잡은 스타, 박인비다.골프 여제의 2008년 US오픈 우승. 박세리의 최연소 우승 기록을 깨면서 정상을 차지했다. US오픈 총 2회 우승 등 메이저대회에서 7회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최고 기록이다. LPGA 통산 19승으로 박세리에 이은 2위다. 56주 연속 세계랭킹 1위를 유지했고, 4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는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아시아 최초로 달성하기도 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 역시 박인비 품에 안겼다. -정현(테니스)2018년 1월, 한국에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그 바람은 정현이 일으켰다.정현은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대회 4강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2018년 호주오픈 1~3라운드에서 미샤 즈베레프·다닐 메드베데프·알렉산더 즈베레프를 연이어 꺾으며 기대를 받았다. 16강 상대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노박 조코비치.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현이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진출한 것. 한국에 정현 신드롬이 일어났다. 8강에서 테니스 샌드그렌마저 넘으며 4강에 올라섰다. 4강에서 로저 페더러를 만나 부상으로 기권했다. -김연경(배구)한국 여자배구에 이렇게 독보적인 선수는 없었다. 김연경이다.흥국생명에 입단한 2005년. 득점상·공격상·서브상·신인왕·정규리그 MVP·챔피언결정전 MVP까지 싹쓸이한다.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인 지 알 수 있는 기록. 이후 3년 연속 정규리그 MVP에 올랐다. 2009년 일본 JT마베라스 유니폼을 입은 뒤 2011년 터키 페네르바체로 이적했고,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다. 가는 팀마다 우승으로 이끌면서 가치는 올라갔다. 2012년 런던올림픽 4강,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배구대표팀에서도 기둥이었다. -류현진(야구)21세기 한국야구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그의 이름은 류현진이다.2006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자마자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석권한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가 됐다. 2013년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로 이적한 첫해 14승 올리며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후 꾸준함을 보이다 2019년 평균자책점 전체 1위를 기록, 올스타전 선발로 나서는 등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야구대표팀 역사와도 함께 했다. -손흥민(축구)지금 한국 축구는 '손흥민의 시대'다.2010년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레버쿠젠을 지나 2015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세계 톱클래스 공격수로 거듭났다. 특히 2018~2019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 우승후보 맨체스터 시티를 침몰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손흥민을 앞세운 토트넘은 최초로 결승에 올랐다. 축구대표팀에서도 에이스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주인공.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품었다. 최용재·김지한 기자 2019.09.23 06:00
야구

NC의 지긋지긋한 일요일 부진…어느덧 11연패까지 연결

어느덧 11연패다. NC의 '일요일 악몽'은 계속됐다.NC는 10일 잠실 두산전을 3-6으로 패하면서 원정 3연전을 전패로 마무리했다. 김경문 감독을 경질한 뒤 유영준 감독대행 체제로 치른 첫 6경기에서 단 1승 밖에 거두지 못했다. 2연패 뒤 1승 그리고 3연패다. 들쭉날쭉한 경기력 때문에 팀이 안정되지 않고 있다. 시즌 승률은 0.323(21승44패)까지 떨어졌다.타선이 문제였다. 유영준 감독대행은 경기 전 "타격이 살아나면 좋을 텐데…계속 격려 중이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NC는 6월에 치른 8경기 팀 타율이 0.246에 불과했다. KT(0.236)에 겨우 앞선 리그 9위. 득점권 팀 타율은 0.149로 더 떨어졌다. 빈타에 허덕이면서 자멸하는 경기가 늘었다.10일 두산전이 딱 그랬다. 선발 외국인 투수 왕웨이중이 7이닝 4피안타 2실점하며 호투했지만 승리와 인연이 없었다. 타선이 두산 선발 투수 이용찬에게 꽁꽁 묶였다. 1회 2사 1,2루 찬스를 놓치더니 6회까지 단 1개의 안타로 때려내지 못했다. 9회엔 상대 실책을 묶어 가까스로 3-2로 경기를 뒤집었지만 마무리 이민호의 부진과 재비어 스크럭스의 결정적인 수비 실책이 겹치면서 3-6으로 패했다. 3-3 동점 상황에서 나온 오재원의 끝내기 3점 홈런은 NC의 더그아웃 분위기를 일순간에 침묵시킨 한 방이었다.잃은 게 많다. NC는 이날 경기를 패하면서 잠실 원정 9연패 늪에 빠졌다. 지난해 8월 23일 잠실 LG전 이후 잠실구장에서 단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했다. 올 시즌엔 8전 전패. 아울러 지난 4월 1일 사직 롯데전부터 일요일 경기 11연패 행진도 계속됐다. 올해 열린 12번의 일요일 경기 중 개막 2연전 중 두 번째 경기였던 3월25일 마산 LG전 이후 승리와 인연이 없다. 그만큼 NC의 부진이 두드러지는 2018년이다.잠실=배중현 기자 bae.junghyune@joins.com 2018.06.1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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