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일반
[부조리와 전쟁]①한국스포츠, '그라운드 제로'… 피폭 현장의 중심에서 다시 시작
"2016년 대한민국 스포츠는 망했다."한 노장 스포츠학자는 지난해 한국 스포츠를 이렇게 통탄했다. 또 다른 젊은 학자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핵무기가 폭발한 지점 또는 대재앙의 현장)'라는 용어로 피폐한 한국 스포츠의 현장을 정의했다. 국정농단의 '최순실 게이트'와 그 권력에 기생한 일부 인사에 의해 한국 스포츠계가 뿌리째 뽑혔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설명했다.이제 한국 스포츠계는 과거의 부조리한 '그라운드 제로'의 시작점에서 어떻게든 다시 새싹을 틔워야 하는 대명제를 안고 있다. 위기는 곧 기회이기 때문이다.일간스포츠는 신년을 맞아 2017년 한국 스포츠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몇몇 스포츠 학자에게 조언을 구했다. 전문가들은 최순실 게이트로 무너진 체육계가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썩은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정효 서울대 강의 교수(체육철학)는 "그라운드 제로에 섰다. 이럴 때일수록 선언적인 문구에 현혹되선 안 된다. 보다 구체적인 시스템과 규정을 만들어 체육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며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학체육회, 국민체육진흥공단 등 여러 곳에 흩어진 체육 분야를 교육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것을 제안했다. 김 교수는 거듭해서 "폐허가 된 한국 스포츠계에 장기적인 관점의 '넥스트 패러다임(Next Paradigm)'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정희준 동아대 교수(생활체육학과)는 "'김영란법'이 한국 정치와 사회 전반에 변화를 가져왔다"며 "이번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체육계, 특히 아마 및 프로스포츠계의 사각지대를 없애야 한다. '제2의 스포츠 김영란 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와 함께 이강헌 창원대 교수(체육학과)는 '철저히 준비된 스포츠 개혁'을 주문했다. 이 교수는 "충분한 시스템 정비 없이 무조건적으로 개혁만 치중해서는 안 된다"며 "완전히 망가진 한국 스포츠의 현실을 통합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그 개혁이 실효성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선동적인 구호가 아닌 '넥스트 패러다임(Next Paradigm)'이 필요하다."최순실 게이트라는 핵폭탄을 맞고 불타버린 한국 체육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개혁', 다시 말해 '넥스트 패러다임(한 시대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개념)'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게 국내 스포츠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넥스트 패러다임'…차원이 다른 개혁이 필요하다서울대에서 체육철학을 강의하는 김정효 교수는 2016년 한국 스포츠를 '밀실'로 요약했다. 김 교수는 "문화이자 공공재인 스포츠가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특정 개인과 단체에 의해 컨트롤된 시대착오적 상황이 발생했다. 스포츠가 광장이 아닌 밀실에서 파벌과 권력에 의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간의 문제들이 지난해 한꺼번에 터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한국 스포츠의 민낯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충분한 반성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평가도 함께 내놨다. 김 교수는 "한국 체육계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물론 '그라운드 제로'에서 만신창이가 되면서 치유의 시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건설적이고 항구적인 장기적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새롭게 시작하자'는 원론적인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이가 없다"고 일갈했다.김 교수는 체육을 문화의 영역에서 분리해 교육에 이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촉구했다. 그래야만 수십여 년 이상 반복된 체육계의 고질적 부패와 관행을 제거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를 따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체육계는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 국민체육진흥공단 등 수많은 산하 단체가 각기 활동하고 있다. 정유라의 부정입학에서 시작된 이번 사태를 보듯 대한민국에서 체육은 학원에서 시작된다는 점도 고려됐다.김 교수는 "지금까지는 체육계에 문제가 생기면 이리저리 떠넘기기에 바빴다"며 책임질 사람 없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서 스포츠는 문화적 측면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교 현장 교육에서 시작한다. 교육부에 하나의 독립된 국을 내주고, 체육계가 자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자율권과 자치권을 내어줘야 한다"며 "교육부가 관장을 해 '빼도 박도 못하도록' 책임을 묻는 것이다. 주변에서 이권 개입이나 술수가 들어올 때도 스스로 방어 기제 시스템을 만들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 '체육계의 김영란법'…'소악' 발본 색원그동안 한국 체육계를 향해 비판적 의견을 개진해 온 정희준 교수는 2016년을 돌아보면서 "체육인으로서 자괴감이 들 정도로 처참하다"고 심정을 토로했다.정 교수는 "'최순실 게이트'는 정치와 사회, 문화 체육계는 물론이고 재벌의 부패까지 온갖 한국 사회 문제가 다 엮여 있다. 심지어 평창겨울올림픽마저 소수 권력의 부정 축재 사업으로 전락했다"고 탄식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제2의 김영란법'의 개혁 바람이 아마 및 프로스포츠계에도 불어야 한다고 했다.정 교수는 "'최순실 게이트'를 발판으로 사회를 바로 세우고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며 현장에 불어닥친 각 기관의 감사 열풍을 전했다. 최근 교육부 등은 체육 특기생 제도를 운영하는 각 대학을 상대로 대대적인 감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는 "마치 김영란법이 그랬듯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런 감사를 통해서라도 잡힐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라며 '제2의 스포츠 김영란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다만 계획성 없는 개혁은 안하느니만 못하다. 자칫 '거악(巨惡)'을 제거하려고 달려들었다가 '소악(小惡)'만 득세하는 상황이 올 수 있어서다.정 교수는 "지금 각 스포츠 단체들이 성명을 내고 있다. 그러나 잘 보면 과거 김종 전 차관에게 줄을 대거나 (불의 앞에서) 침묵했던 이들이 많다. 개혁의 대상이 개혁을 외치는 꼴이다. 거악인 최순실과 김종 전 차관의 실체가 드러나자 기존 소악들이 희생자인양 코스프레를 한다. 더 오래된 구악의 그런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다"고 잘라말했다.그는 박근혜 정부의 '스포츠 대통령'으로 3년간 군림해 온 김종 전 차관이 심어 놓은 체육계 인물들에 대해서도 "청산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함께 내놓았다.한국체육과학연구원(KISS)에서 스포츠심리학실장을 역임한 이강헌 교수는 "한국 스포츠가 정말 망했다. 희망이 없다"며 큰 틀에서 앞선 두 교수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교수는 "김종 전 차관은 자금줄을 틀어쥐고 '관이 힘쓰면 뭐든 다 한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이 교수 또한 설익은 개혁이 미칠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최순실 게이트'가 아직 진행중이고, 체육계도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며 "그렇지만 마땅히 이뤄져야 할 개혁이 엉뚱한 곳을 향해선 안 된다. 특히 김 전 차관 등과 연결돼 있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의 개혁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서지영 기자
2017.01.03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