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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의 파이트 클럽] 끊임없는 UFC 판정 논란, 도대체 시스템이 어떻기에...

한국시간으로 지난달 30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델타센터에서 열린 미국 종합격투기 UFC 291 대회. 코메인이벤트로 열린 라이트헤비급 경기에서 알렉스 페레이라(브라질)는 얀 블라호비치(폴란드)를 접전 끝에 2-1 판정승으로 제압했다.전 미들급 챔피언인 페레이라는 현 미들급 챔피언 이스라엘 아데산야(나이지리아/뉴질랜드)와 리매치에서 패해 타이틀을 잃었다. 체급을 올린 페레이라는 전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블라호비치의 레슬링에 초반 고전했다. 1라운드를 확실히 내준 페레이라는 2라운드부터 장기인 타격이 살아나면서 힘겹게 역전승을 거뒀다.판정이 내려진 뒤 블라호비치는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1라운드는 확실히 이겼고 2, 3라운드도 그라운드 싸움에선 페레이라보다 우위였다. 냉정하게 보자면 2라운드는 페레이라가 타격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 맞았다. 하지만 3라운드는 누구도 확실하게 우위를 점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부심 2명은 페레이라의 손을 들어줬고 1명은 블라호비치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줬다. 경기가 끝난 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판정에 대한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페레이라를 응원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판정이 잘못됐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은 현재 해설자로 활동 중인 전 UFC 파이터 차엘 소넨이었다.평소 거침없는 입담으로 인기가 높은 소넨은 “블라호비치가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페레이라가 그 경기에서 이겼다는 것은 잘못된 판정이다”고 말했다. 블라호비치 역시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도둑놈들아, 너희는 내 승리를 훔쳐 갔어. 어쨌든 다시 돌아오겠다”면서 심판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사실 UFC만큼이나 판정 논란이 많은 스포츠도 없다. UFC 해설자들은 종종 최근 부심의 성향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구체적이고 뚜렷한 채점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그날 경기에 배정된 부심 3명의 성향에 따라 선수의 운명이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UFC에서 활동하는 부심들은 얼마나 객관적이고 전문적일까. 일단 UFC 채점 방식부터 알아본다. UFC는 ‘10점 만점 시스템’을 사용한다. 이는 프로복싱에서 가져온 것이다. 매 라운드 승자가 있어야 하고 우세하게 경기를 치른 선수는 10점, 상대 선수는 9점을 받는다. 우열이 명확하게 차이가 날 경우는 10-8을 매기기도 한다.라운드 채점은 상대에게 얼마나 임팩트 있는 공격을 적중시키는가, 상대를 그라운드에서 얼마나 압도하는가로 가려진다. 최근에는 승패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팽팽한 승부라면 더 공격적인 선수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경향이 뚜렷하다.최근에는 무의미한 테이크다운 보다는 밑에 깔려있더라도 타격으로 데미지를 주는 것이 무게를 두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래서 최근에는 레슬러들이 타격가에 비해 판정에서 손해를 본다는 지적이 있다.하지만 이같은 기준도 어디까지나 최근 흐름이 그렇다는 것이다. 채점 기준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경우가 지금도 워낙 많다. 경기를 재밌게 보고 나서 채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10점 만점 시스템에는 허점이 많다. 복싱 타이틀전처럼 12라운드를 치르는 경우 라운드 채점 방식으로도 어느 정도 우열을 가릴 수 있다. 반면 UFC는 메인이벤트가 5라운드로 치러지는 반면 일반 경기는 3라운드로 벌어진다. 두 라운드를 아주 미세하게 이기면 한 라운드에서 크게 밀려도 판정승을 거둘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 보니 경기가 끝나고 승자가 얼굴의 엉망인 반면, 패한 선수 얼굴은 말끔한 경우가 종종 나온다.채점을 담당하는 부심의 자격은 늘 도마 위에 있다. 미국에서 종합격투기 심판이 되기 위해선 주체육위원회에 등록하고 면허를 취득해야 한다. 종합격투기 선수생활을 했거나, 수련을 한 경험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백그라운드가 없어도 심판이 될 수 있다. 이 역시 주마다 규정이 서로 달라 명확한 기준이 없다. 대략적으로 주체육위원회에 등록하고 일정한 교육을 받고 이수하면 종합격투기는 물론 복싱, 킥복싱 등도 채점할 수 있다.간혹 데이나 화이트 UFC 대표가 경기 후 ‘심판판정이 잘못됐다’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는 판정이 주최사의 입김을 받지 않고 주체육위원회에 의해 중립적으로 이뤄진다는 의미다. 스포츠의 핵심인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함이다.하지만 때로는 이런 시스템이 팬들의 생각과 동떨어진 이상판 판정으로 이어지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일부에선 부심 수를 더 늘리자고 주장하지만, 이는 아직 실행되지 않고 있다. 2023.08.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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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무의 파이트 클럽] 프랑스에서 열리는 첫 UFC 대회가 더 특별한 이유

세계 최대 종합격투기 단체 UFC가 한국시간으로 오는 4일 새벽 ‘UFC 파이트 나이트(FIGHT NIGHT) 가네 대투이바사’ 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대회 메인이벤트는 헤비급 랭킹 1위 시릴 가네(32·프랑스)와 랭킹 3위 타이 투이바사(29·호주)의 헤비급 매치다. 거의 매주 대회를 개최하는 UFC이지만 이 대회는 특별하다. 바로 프랑스에서 열리는 첫 UFC 대회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열리는 장소는 파리에 위치한 아코르 아레나다. 파리에서 가장 큰 실내 경기장이자 콘서트홀이다. 파리에서 열리는 대형 스포츠 이벤트나 공연 등이 이곳에서 개최된다. ‘피겨여왕’ 김연아가 피겨 그랑프리 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곳도, 최근 BTS가 대규모 콘서트를 연 곳도 바로 이곳이다.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농구, 레슬링, 유도 경기장으로 사용된다. 파리를 대표하는 아코르 아레나에서 UFC가 열린다는 것은 2~3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는 불과 얼마 전까지 종합격투기 대회를 법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체육부는 2016년 ‘공공 투기 스포츠 이벤트의 기술적인 규제와 안전에 관한 법령’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규제안을 발표했다. 종합격투기 경기 금지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프랑스에 UFC는 도저히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법령의 핵심은 이랬다. ‘투기 대결은 카펫 또는 3~4개 로프가 달린 링에서만 할 수 있다. 링 코너는 안전장치가 부착돼야 한다’. 이 내용대로라면 ‘옥타곤’으로 불리는 철창 안에서 열리는 UFC 대회는 원천적으로 개최할 수 없다. 과거 일본 격투기 대회 프라이드FC처럼 복싱 경기가 열리는 링에서만 경기가 가능했다. 아울러 프랑스 체육부는 ▶쓰러진 파이터에게 펀치, 킥 또는 무릎을 사용해 가격하는 것 ▶팔꿈치를 이용한 가격 ▶박치기와 사타구니, 척추, 뒤통수, 목젖을 가격하는 것 ▶눈이나 입 또는 코를 찌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이 가운데 쓰러진 파이터에게 펀치나 팔꿈치를 이용해 공격하는 ‘파운딩’ 기술은 UFC 경기의 핵심적인 기술이다. UFC가 아닌 다른 종합격투기 단체에서도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파운딩은 허용되는 게 일반적이다. 프랑스 MMA협회(CFMMA)는 “체육부가 우리를 바보 취급하고 있다”며 즉각 반발했다. 하지만 정부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종합격투기를 금지하는 법은 곧바로 효력을 발휘했고, 2020년까지 5년간 지속했다. 그랬던 프랑스가 달라졌다. 2020년 프랑스는 종합격투기의 합법화를 선언했다. 프랑스 복싱 연맹의 주도 관리하에 1년 가까이 준비 과정을 거친 뒤 그해 10월 프랑스에서 규모 있는 종합격투기 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종합격투기에 배타적이었던 프랑스가 뒤늦게 문을 연 것은 스타 파워 덕분이었다. 카메룬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에서 생활하며 세계적인 파이터로 성장한 현 UFC 헤비급 챔피언 프란시스 은가누(37)가 결정적이었다. 불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은가누가 UFC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자 프랑스인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프랑스 출신 시릴 가네마저 UFC에서 맹활약하자 국민적인 관심은 더 높아졌다. 정부도 끓어오르는 관심과 열기를 무작정 막을 수만은 없었다. 프랑스에서 처음 열리는 UFC 대회의 주인공이 프랑스 선수인 것은 당연하다. 이번 대회 메인이벤트를 장식하는 가네는 처음부터 종합격투기를 시작한 게 아니었다. 무에타이를 시작해서 세계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함 뒤 2018년 종합격투기로 전향, 캐나다 등 해외 대회에서 이름을 쌓았다. 이후 2019년 UFC에 입성해 현재 헤비급 최강자로 인정받고 있다. 올해 1월에는 현 챔피언 은가누와 타이틀전을 벌여 판정패했지만 팽팽한 접전을 벌이기도 했다. 가네가 고국인 프랑스에서 종합격투기 경기를 치르는 것은 처음이다. 가네는 최근 현지언론과 인터뷰에서 “그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내 경기를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던 가족과 친구들이 주변에서 볼 예정이다. 하지만 이를 이겨낼 것이고 경기 끝난 뒤 그들과 파티를 즐길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프랑스가 빗장을 풀었지만, 아직도 종합격투기 대회 개최를 금지하는 나라가 있다. 노르웨이는 사실상 세계에서 유일하게 종합격투기가 불법인 나라다. 심지어 프로복싱마저도 합법적으로 열 수 없다. 그렇다고 노르웨이에서 종합격투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일본 프라이드FC 등에서 이름을 날렸던 요아킴 한센 등이 바로 노르웨이 출신이었다. 현재 UFC 미들급 8위에 랭크돼 있는 잭 헤르만손 역시 노르웨이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미 주변의 스웨덴이나 핀란드 등에서 종합격투기 인기가 뜨거운 점을 고려할 때 노르웨이도 변화의 바람이 불 가능성은 충분하다. 2022.09.0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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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로'의 시대…파이터보다 100배 더 버는 유튜버

지난 7일(한국시간) 50전 무패(27KO)의 프로복싱 전설 플로이드 메이웨더(44·미국)와 유튜버 로건 폴(26·미국)의 복싱 시범경기의 후폭풍이 거세다. 폴은 메이웨더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하드록스타디움에서 열린 복싱 이벤트 매치(3분 8라운드)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 대결이 공식 경기로 인정받지 못한 건 둘의 체급 차 때문이다. 메이웨더(173㎝·70㎏)보다 폴(188㎝·86㎏)이 훨씬 무거워서 플로리다주 체육위원회가 경기를 승인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메이웨더는 폴을 KO로 쓰러뜨리지 못했다. 공식경기가 아니기에 메이웨더의 '완벽한 전적'에 흠집이 난 건 아니다. 다만 자존심을 구겼을 뿐이다. 메이웨더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걸 얻었다. 그는 최근 도박으로 5000만 달러(580억원) 이상의 빚을 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폴과의 경기로 메이웨더는 1억 달러(1110억원) 정도를 번 것으로 예상된다. 폴도 승리자다. 그는 이벤트 매치 후 대략 2000만 달러(233억원)를 벌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복싱 전적은 한 경기(1패)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폴은 복싱 챔피언 이상의 돈을 벌었다. 스포츠팬들에게 낯설지 몰라도, 폴은 구독자 2300만 명 이상을 확보한 유튜브 스타다. 엔터테이너라고 볼 수 있는 그는 멋진 체격과 운동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끊임없는 도발 끝에 메이웨더와의 복싱 대결을 성사했다. '어그로(자극적인 말과 행동으로 관심을 모은다는 뜻의 인터넷 용어)'를 끌어 당대 최고의 복싱 스타와 함께 링에 선 것이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성사될 수 없는 이 복싱 경기에 팬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게 곧 광고 수익과 페이퍼 뷰(PPV·유료 시청)로 이어졌다. 메이웨더는 복싱 5체급 챔피언을 지낸 명예를 집어던지고, 돈이 되는 폴과의 싸움을 마다치 않았다. 미국 CBS스포츠는 7일 '2021년 복싱의 장소는 이제 유튜브인 걸까? 유튜버가 스포츠의 미래인가? 메이웨더의 경기는 가까운 미래에 펼쳐질 복싱의 모습일까?'라는 기사를 썼다. 이 매체는 '이 경기는 복싱이 결코 아니었다. 그저 대중의 시선을 자극하는 예능에 불과했다'고 혹평했다. 뉴욕타임스도 '이건 스포츠가 아닌 엔터테인먼트'라고 평가했다. 체급과 경력, 기량 등이 무시된 메이웨더와 폴의 대결에는 오락적 요소만 있었다. 스포츠의 시각에서 보면 이 경기는 졸전이었고, 두 주인공이 돈만 벌어간 '서커스 매치'였다. 유튜버가 스포츠의 주인공이 된 것은 폴의 사례만이 아니다. 그의 동생 제이크 폴(24·미국)도 구독자 2000만 명을 가진 유튜버다. 지난해 복싱에 데뷔한 그는 지난 4월 종합격투기 스타 벤 아스크렌과 링에서 만나 1라운드 KO승을 거뒀다. 하반기에는 종합격투기 UFC 웰터급 전 챔피언 타이론 우들리와 붙는다. 아스크렌과 우들리는 종합격투기 챔피언을 지낸 스타다. 이들의 전성기가 지났다고 해도 유튜버와 싸우는 건 역시 돈이 되기 때문이다. '어그로 싸움'에서 아스크렌은 UFC에서 받던 대전료의 두 배가 넘는 50만 달러(5억6000만원)를 벌었다. 여기에 각종 스폰서 수입까지 챙겼다. 유튜버들의 쇼 비즈니스는 파이터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초래했다. 메이웨더와 폴의 경기가 끝나자, UFC 선수 파울로 코스타(30·브라질)는 오는 8월 예정된 경기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 UFC 파이터의 수입이 유튜버의 복싱 시범경기 대전료보다 현저히 적다는 게 이유였다. 코스타는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UFC는 메인 이벤트에서 싸우는 선수에게 합당한 파이트 머니를 지불해야 한다. 유튜버들이 이 바닥의 문제점을 보여 주고 있다"고 썼다. 미들급 타이틀전까지 치른 그의 대전료는 35만 달러(3억7500만원) 정도로 알려졌다. 코스타뿐만 아니다. 현 UFC 챔피언으로 세계 최고의 파이터라는 프란시스 은가누(35·카메룬)는 SNS에 "우리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라고 썼다.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며, 목숨을 건 위험한 스포츠를 하는 파이터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UFC가 버는 수익에 비해 파이터에게 지급되는 돈이 적다는 건 오래전부터 지적된 문제다. UFC 파이터의 비교 대상이 오랜 역사와 큰 시장 규모를 자랑하는 프로복싱일 때도 불만이 컸는데, 유튜버들과 비교하니 소외감이 더 폭발했다. 폴 형제가 복싱으로 번 돈은 웬만한 파이터의 100배 이상이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데이나 화이트 UFC 회장은 파이터들에게 공개적으로 경고장을 날렸다. 그는 지난 9일 TMZ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UFC 선수들이 돈 문제를 들먹이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 킴 카다시안과 (UFC 여성 밴텀급·페더급 챔피언) 아만다 누네스가 싸우면 어떨까? 엄청난 돈이 쏟아질 것이다. 다른 사람이 받는 돈에 관해 말하지 말라. 폴 형제는 12살부터 유튜버로 활동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유명세를 만들었다. 하룻밤에 이뤄낸 일이 아니다"라고 소리쳤다. 화이트 회장은 경기를 거부한 코스타를 두고 "넌 유튜버가 아니다. 넌 파이터다. 싫으면 그만둬라"고 압박했다. 서로 다른 무술을 겨루는 UFC는 1993년 창설 후 2000년 초반까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UFC는 꾸준히 사업을 확장했다. 그 핵심 콘텐트가 화끈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트래시 토크 등 '어그로'였다. 2016년 스포츠·엔터테인먼트 회사 WME·IMG가 UFC를 40억 달러(4조5000억원)에 인수했다. 화이트 대표 등 UFC 대주주는 15년 만에 2000배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파이터들은 UFC의 브랜드 가치에 걸맞은 처우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더 큰 플랫폼인 유튜브, 더 강력한 '어그로'에 밀리고 있다. 서지수 인턴기자 2021.06.1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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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도 피했던' 마빈 헤글러, 66세 나이에 별세

프로복싱 미들급 사상 최강의 챔피언으로 꼽혔던 마빈 헤글러(미국)가 14일(한국시간) 숨을 거뒀다. 향년 66세. AP통신은 이날 헤글러의 아내인 케이 G 헤글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인용해 이 사실을 보도했다. 헤글러의 아내는 "무척 슬픈 발표를 하게 돼 유감이다. 오늘 불행히도 사랑하는 남편이 집에서 예기치 못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1954년 5월 태어난 헤글러는 80년대 프로복싱 미들급에서 8년 동안 세계 최강자로 군림했다. 1983년 '돌주먹' 로베르토 듀란에게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뒀고, 1985년 토머스 헌즈를 3라운드 KO로 물리쳤다. 그는 '마블러스(Marvelous, 경이로운) 복서로 불렸다. 당대 최강의 도전자를 모두 꺾었던 헤글러는 1987년 4월 슈거레이 레너드와 '세기의 대결'을 펼쳤다. 레너드는 현란한 아웃복싱으로 도망 다니다가 화려한 연타 공격을 퍼부었다. 헤글러는 그를 줄기차게 쫓아다녔지만, 레너드의 빠른 발과 펀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해 판정패했다. 헤글러와 레너드의 경기를 두고 뒷말도 많았다. 레너드는 눈 수술을 이유로 잠정 은퇴, 헤글러가 노쇠하길 기다렸다가 그와 싸웠다. 맞대결에서 레너드는 현란한 움직임을 보여줬지만, 정작 강한 유효타는 별로 없었다. 이 경기 패배 후 헤글러는 미련없이 은퇴를 결정했다. 통산 전적 67전 62승(52KO) 2무 3패, 미들급 12차 방어의 기록을 남기는 동안 KO패는 한 번도 없었다. 은퇴 후 헤글러는 영화계로 뛰어들었으나, 성공하진 못했다. 김식 기자 2021.03.1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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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위의 도살자' 마빈 해글러, 향년 66세로 별세

전설적인 복서 마빈 해글러(미국)가 타계했다. 향년 66세. 슈거 레이 레너드(55·미국), 로베르토 두란(60·파나마), 토마스 헌즈(53·미국)와 함께 1980년대 중(中)량급 전성기를 이끈 F4(패뷸러스 4)의 일원 해글러가 14일(현지시간) 뉴햄프셔 자택에서 사망했다. 해글러의 아내 케이 G. 해글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불행히도 내 사랑하는 남편 마빈이 세상을 떠났다"고 알렸다. 미국 뉴저지주 뉴아크 빈민가 출신에서 어머니 손에 자란 해글러는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남들과 싸우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길거리 싸움 대신 복싱을 배웠다. 해글러는 만 18세였던 1973년 전미 아마추어 선수권 정상에 오른 뒤, 곧이어 프로복싱에 뛰어들었다. 1980년에는 알란 민터를 꺾고 세계복싱평의회(WBC), 세계복싱협회(WBA) 미들급 통합 챔피언에 올랐다. 해글러가 더욱 유명해진 건 라이벌들과 대결 덕분이다. 승승장구하던 해글러는 1983년 국제복싱연맹(IBF) 챔피언벨트까지 거머쥔 데 이어,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린 두란에 15회 판정승을 거두며, 두란의 세 체급 석권을 막았다. 그리고 1985년엔 역시 체급을 올린 헌즈마저 3라운드 TKO로 꺾었다. 이 경기 해설가는 레너드였다. 해글러는 1987년 그 레너드와 대결한다. 레너드는 은퇴 이후 복귀를 선언했고, 해글러도 레너드와 대결하기 위해 챔피언 벨트 3개 중 2개를 포기했다. 해글러는 판정 논란 속에 졌고, 레너드가 자신의 재대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그대로 은퇴했다. 67전 62승(52KO) 2무 3패. 해글러는 화려하진 않아도 성실함을 바탕으로 다져진 탄탄한 복싱 덕분에 '마블러스(경이로운) 마빈'으로 칭송받았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2021.03.14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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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레스, 골로프킨에게 '첫 패배' 안기며 미들급 최강자 우뚝

1년 만에 다시 성사된 맞대결의 승자는 사울 카넬로 알바레스(28·멕시코)였다.알바레스가 1년 만에 다시 만난 겐나디 골로프킨(36·카자흐스탄)에게 생애 첫 패배를 안기고 세계 프로복싱 미들급 최강자로 우뚝 섰다. 그는 지난 16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T-모바일아레나에서 열린 세계복싱평의회(WBC)·세계복싱협회(WBA) 미들급(72.57㎏) 통합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골로프킨과 12라운드 혈투 끝에 2-0 판정승(115-113, 115-113, 114-114)을 거뒀다. 이날 승리로 알바레스의 전적은 50승(34KO)2무1패가 됐다. 반면 골로프킨은 40전 만에 첫 패배를 안으며 38승(34KO)1무1패가 됐다. 골로프킨은 복싱의 전설 버나드 홉킨스(53·미국)를 넘어 미들급 역대 최다인 21차 방어를 달성하려던 계획도 무산됐다.알바레스는 지난해 9월 17일 이후 정확히 1년 만의 재격돌에서 골로프킨의 무패 행진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미들급 통합 챔피언이 됐다. 1년 전 맞대결에선 골로프킨이 우세하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1-1 무승부로 끝나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북미 지역에서 인기가 많은 알바레스의 상품성이 떨어질까 봐 나온 편파 판정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러나 1년 만에 다시 골로프킨과 맞선 알바레스는 달라져 있었다. 외조부(세르게이 박)가 고려인인 골로프킨은 저돌적인 압박과 치명적인 '돌주먹'이 특징이다. 왼손 잽으로 상대를 서서히 무너뜨린 뒤 오른손 펀치로 한 방을 노리는 스타일이다. 골로프킨을 철저히 분석한 알바레스는 그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경기에 나섰다. 이미 1차전 대결로 서로의 스타일을 모두 꿰뚫은 상황이었기에, 다양한 테크닉을 가진 알바레스가 유리한 상황이기도 했다.알바레스는 골로프킨의 왼손 잽을 막아 낸 뒤 왼손 어퍼컷으로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전략으로 1∼3라운드를 자신의 라운드로 만들었다. 경기 초반에 뒷걸음질을 치던 골로프킨은 4라운드부터 오른손 어퍼컷으로 패턴을 바꾸며 조금씩 주도권을 되찾아 왔다. 5라운드부터는 용호상박의 대결이 펼쳐졌다. 클린치(껴안기)도 하지 않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수없이 펀치를 주고받은 두 선수의 승부는 결국 체력 싸움에서 결정났다.알바레스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골로프킨은 노련하게 경기를 풀어 갔으나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지쳐 보였다. 10라운드에서 오른손 훅이 알바레스의 안면에 그대로 적중하며 경기를 끝낼 기회를 얻기는 했으나 비틀거리던 알바레스를 끝내 무너뜨리진 못했다. 11라운드에서도 골로프킨의 속사포 펀치에 알바레스의 턱이 여러 차례 흔들리는 장면이 포착됐다. 그러나 골로프킨은 마지막까지 투혼을 발휘하고도 경기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알바레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김희선 기자 2018.09.17 06:00
스포츠일반

[박수성 How are you] 박종팔, 이효필에 3패 ‘일생의 천적’

1975년. 유채꽃을 판 아버지 돈 1만6000원을 슬쩍한 17살 박종팔이 상경해 정착한 곳이 서울 흑석동이었다. 사촌형 집에서 신세를 지던 그는 아버지가 부쳐주는 쌀을 찾으러 영등포역에 자주 갔는데 노량진역 근처에 있던 동아체육관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 때부터 레슬링·씨름 등을 조금씩 해봤고 학교도 심드렁했던 그의 눈이 번쩍 띄었다. 77년 신인왕전에서 우승한 후 탄탄대로를 달렸다. 중량급이면서도 유연한 허리를 무기로 승승장구했다. IBF 슈퍼미들급,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하며 &#39링 위의 호랑이&#39로 이름을 날렸다. 한국 프로복싱의 전성기였다. 그에게 일생의 천적이 있다. 바로 이효필이다. 무안과 해남으로 고향이 지척이고 동갑내기 친구이지만 그 친구에게만 3패를 당했다. 프로 입문 전 77년 두 차례 대회 결승에서 2패 뒤 2003년 장충체육관에서 &#39이벤트&#39로 열린 이종격투기 경기에서 또다시 패배를 기록한 것. 경기 전 약속한 규정이 지켜지지 않은 탓도 있었다. "이젠 지나간 일 아닙니까. 요즘도 자주 보는 친구이지만 그 때 일을 떠올리면 조금 어색해 지기는 합니다." 박종팔은 "지금 생각해도 권투는 딱 적성이었습니다. 뭔 일을 오래 못하는 성격인데 권투는 날짜가 잡히고 반짝 하면 되잖아요. 다시 태어나도 권투를 할 것 같습니다"라며 회한에 젖어들었다.  박수성 기자 ▷ ‘미들급 강자’ 박종팔 “인생 3라운드 역전 노린다”▷ 박종팔, 이효필에 3패 ‘일생의 천적’ 2009.06.25 09:18
경제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2>

이제 방향을 돌려 야쿠자 얘기보다는 스승 역도산과 나와도 인연을 맺었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얘기다. 스승이 1961년 동경 시부야에 리키스포츠팰리스를 오픈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스승은 리키스포츠팰리스를 개관하면서 프로복싱 도장까지 만들었다. 복싱도 레슬링과 마찬가지로 사각의 링에서 경기를 펼치는 것이라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승은 리키복싱회장도 역임했다. 그때 3명의 재일 한국인이 스승의 제자로 들어왔다. 또 종목이 다른 한 명의 재일 한국인도 회원으로 가입했다. 첫 번째는 코트네다. 스승은 코트네를 복싱 선수로 키우기 위해 스카웃했다. 일본 교토 출신인 코트네는 딱 벌어진 어깨, 호쾌한 성격, 그리고 두둑한 배짱까지 갖춰 사실 복싱보다 레슬링 선수가 더 어울렸다.  지금도 안토니오 이노키와는 둘도 없는 친한 사이로 지내는 코트네는 1974년 중반 영화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영화 제목은 로저 무어 주연의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로 일본인 스모 선수 역을 맡았는데 스모 선수 출신은 아니다.  코트네는 덩치가 좋아 사실은 헤비급 선수였지만 당시 일본에서 복싱을 했던 선수 중 헤비급에 걸맞은 체중을 지닌 선수가 거의 없었던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체급을 낮췄다. 뼈를 깎는 훈련을 거듭한 끝에 미들급 체중으로 낮춰 1962년 미들급 신인왕을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코트네는 몇 년전 한국서 개봉됐던 영화 감수까지 했는데 올 3월 초 일본에 갔더니 입에 거품을 물고 "내가 감수했던 내용과 다르게 영화가 제작됐다"며 흥분을 가리앉히지 못했다. 코트네는 지금도 한국 레슬링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후배들 육성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80년대 일본서 활동했던 한국인 레슬러들은 대부분 코트네의 손을 거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 명은 여건부다. 여건부 하면 떠오르는 것이 알밤까기다. 원래 복싱을 하기 위해 도장에 입문했다가 레슬링 선수로 전환했다. 몸집이 크지 않았지만 순발력과 민첩성만은 당대 최고였다. 늘 파이팅이 넘쳤다.   여건부는 요즘 젊은 층에서 말하는 뺀질이였다. 난 스승을 대신해 그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의 귀도 내 귀처럼 구부러져 있다. 내가 만든 것이다. 여건부는 나와 함께 다른 사람을 만나면 "김일 선배님이 내 귀를 이렇게 오므라들게 했다&#39면서 불평을 쏟곤 했다. 내가 워낙 강한 훈련을 시켜서인지 나 때문에 레슬링을 그만두겠다는 말도 했다.   스승의 도장에 또 한 명의 복싱 선수가 입문했다. 정식 제자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1962년 가을까지 스승 도장에서 운동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1966년 6월 25일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한국 프로복싱 첫 세계 챔피언이 된 김기수가 바로 그다.   56년 중반 여수에서 씨름을 하면서 처음 만났던 김기수는 58년 5월 동경에서 한 번 조우했다. 당시 동경에선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 웰터급 한국 대표로 출전, 금메달을 땄다. 그때 내가 나를 찾아온 김기수를 스승에게 소개시켜 줬다. 스승과 같은 함경도가 고향인 김기수는 스승의 특별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스승뿐만 아니라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코트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코트네는 김기수의 스파링 파트너가 돼 주었다. 만약 코트네가 복싱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역시 세계 챔피언이 됐을지도 모른다.   스승 도장에 온 네 번째 한국인은 일본 프로야구 영웅 장훈이었다. 2006.07.26 13:41
스포츠일반

[나의 삶, 나의 도전] `박치기왕` 김일 <6>

내가 일본에 가기 전인 1954~1955년쯤으로 기억된다. 여수 오동도 씨름대회에서였다. 키는 나보다 작지만 어깨가 떡 벌어진 몸매가 범상치 않게 보이는 한 사내가 눈에 띄였다. 그는 관중의 함성과 씨름꾼들의 투지에 넋을 빼앗긴 듯 보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대회에서 우승한 내게 달려와 심한 함경도 사투리로 씨름 좀 배우고 싶다고 했다. 당돌하고 저돌적인 그가 왠지 밉삽스럽지 않아 씨름 기술 몇 가지를 가르쳐 줬다. 그는 함경도 북청에서 피란 왔다는 김기수였다. 그는 운동이라면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승부 근성이 대단했다. `악바리`라고 불렸던 그는 나를 친형 이상으로 따랐다. 될 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안다고나 할까. 나는 그런 그가 언젠가 운동 선수로 대성할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1956년 10월 말 여수에서 사라지면서 그와 한동안 만나지 못했고 머릿속에서 점차 그의 얼굴도 사라져 갔다. 하지만 사람 인연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김기수를 일본에서 수 차례 만났다. 1957년 말이었다. 내가 역도산 제자로 막 입문한 후였다. 그때 역도산체육관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형님, 나 기수예요." 기수란 소리에 여수에서 씨름 잘했던 기수인지 누구인지 긴가민가했다. 그는 만사를 제쳐 놓고 역도산체육관으로 달려왔다. 내가 역도산 제자가 됐다는 소식을 한국에서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후 찾아온 것이었다. 한국서 김기수가 씨름은 물론이고 권투도 곧잘 한 것으로 알았던 나는 그때 그가 씨름이 아닌 권투 선수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스승 역도산에게 김기수를 소개시켜 줬다. 스승은 김기수를 상당히 호의적으로 맞아 줬다. 왜냐하면 스승과 김기수의 고향이 같은 함경도였다. 늘 고향을 그리워했던 스승은 일본 땅에서 함경도 출신 후배를 만났으니 그 기쁨이 오죽했을까. 스승은 김기수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아마 스승은 용돈을 두둑하게 주면서 격려를 해 줬던 것으로 기억된다. 스승은 일본에서 한국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기수를 만났을 때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본다. 일본어를 몰랐던 김기수가 스승의 말을 다 알아 듣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스승을 칭찬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렇다는 얘기다. 김기수와 1958년 5월 동경에서 한 번 더 만났다. 당시 동경에선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이 대회에 웰터급 한국 대표로 출전, 금메달을 땄다. 스승은 김기수가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모른다. 김기수는 그후에도 일본에서 경기가 있을 때마다 나를 찾곤 했다. 그때는 나도 프로레슬링 선수로서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었을 때다. 돈도 좀 벌었다. 그래서 김기수에게 격려금도 줬다. 1966년 6월 25일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한국의 첫 프로복싱 세계 챔피언이 된 그는 1997년 6월 운명을 달리했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그가 그렇게 일찍 작고할 줄은 몰랐다.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쯤 나는 서로 과거의 추억을 얘기하면서 또 다른 노년의 우정을 나눴을지 모른다. 만약 내가 씨름을 하지 않았다면 김기수를 만날 수 있었을까. 씨름은 내 인생을 모두 바꿨다. 특히 간 크게도 내가 역도산 제자가 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넌 것도 씨름을 한 가닥 했기 때문이었다. 씨름은 나의 인생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운동이었다. 나는 태어나면서 씨름과 함께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본 경기가 씨름이었다. 사실 나의 프로레슬링 기술 밑거름은 씨름이었다. 나는 프로레슬링을 할 때면 상대에게 다리 걸기 기술을 곧잘 시도했는데 이 기술에 걸린 상대는 십중팔구 나자빠졌다. 타고난 내 씨름 실력은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아버지는 힘이 세어서 다들 장사라 불렀다. 그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힘이 셌다. 어른들도 나를 당하지 못했다. 학교 운동회 릴레이 때도 항상 선두였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씨름과 운동을 잘하는 것에 대해 집안 내력이라고 추켜세우곤 했다. 넉넉한 인심을 지닌 아버지는 내가 씨름 대회에서 우승, 상금으로 소를 타면 동네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잔치를 베풀었다. 소를 끌고 거금도에 도착하면 농악대가 앞에서 흥을 돋웠다. 동네 입구에는 `김일 씨름 우승`이라고 쓰여진 종이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그때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를 씨름의 추억에서 깨운 것은 새벽녘 눈부신 햇살이었다. 선원들은 30여 분 뒤면 일본 시모노세키 항구에 도착한다고 알려 줬다. 시모노세키 항구가 눈앞에 펼쳐졌다. 선원들도 바삐 움직였다. 나는 큰 가방을 둘러멨다. 그리고 선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선원들은 "꼭 역도산 만나게"라고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줬다. 배에서 내렸다. 정병철 기자 사진=이호형 기자 2006.04.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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