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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가 나타난 식당에 몰려든 아르헨티나 팬들...새벽 즉석 팬미팅까지

지난해 말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한 후 아르헨티나에서 잠시 휴식기를 보냈던 리오넬 메시(파리 생제르맹)가 월드컵 이후 처음으로 아르헨티나를 다시 찾았다. 대표팀 A매치 소집 때문이다. 월드컵 우승 여운이 남아있는 아르헨티나의 팬들은 메시를 격하게 반기고 있다. 지난 21일(한국시간) 메시는 가족 및 친구들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명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메시가 식당에 나타났다는 게 알려지자 밤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수백 명의 팬들이 순식간에 식당 앞에 몰려들었다. 현지 매체 보도에 따르면, 메시는 이날 새벽 2시까지 저녁 식사를 즐겼다. 식당 측에서는 정문 앞에 몰려든 인파를 의식해 메시 일행에게 뒷문으로 나갈 수 있도록 안내했지만, 메시는 정문으로 나가 자신을 오래 기다린 팬들과 인사하고 사진을 찍는 등 '즉석 팬미팅'을 했다. 이날 몰려든 팬들은 아르헨티나 대표팀 응원가를 부르면서 메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월드컵 우승 직후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카퍼레이드 때는 6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우승을 자축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23일 리버플레이트 경기장에서 파나마와 A매치 평가전을 치른다. 이은경 기자 2023.03.2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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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만명 몰린 아르헨 우승 카퍼레이드...사망자도 나와

36년 만에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에서 우승한 아르헨티나가 광란의 축제 분위기다. 2022 카타르 월드컵의 우승컵을 안고 금의환향한 선수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자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열렸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현지시간으로 20일 오전 전용기를 타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선수단의 귀국 장면, 그리고 주장 리오넬 메시(35·파리 생제르맹)가 월드컵 우승트로피를 들고 리오넬 스칼로니 감독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는 장면이 모두 생중계됐다. 선수단이 도착한 후 도심 한복판에서 우승 축하 카퍼레이드가 열렸다. 수백만 명의 인파가 버스를 둘러싸고 춤추고 노래했다. 메시와 마라도나의 얼굴이 담긴 대형 깃발이 여러 군데에서 펄럭였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응원가 ‘무차초스’가 울려 퍼졌다. 아르헨티나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고(故) 디에고 마라도나가 우승을 끌어낸 이후 36년 만에 월드컵 우승을 다시 이뤘다. 아르헨티나 매체 ‘TYC스포츠’는 21일(한국시간) 보도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최소 400만 명의 인파가 몰려 36년 만의 월드컵 우승을 자축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현지 매체 보도에 따르면 시내 곳곳의 낮은 전선 때문에 카퍼레이드를 위해 버스에 탄 일부 선수들의 목에 전선이 감길 뻔한 아찔한 장면이 나왔다. 이 탓에 카퍼레이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선수단은 버스에서 내려 대신 헬리콥터에 탑승했고, 헬리콥터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을 비행하며 축제를 함께 했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21일 현지 매체를 인용해 "지붕 위에 올라가 선수단을 환영하던 20대 남성이 지붕이 무너지면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어린이 한 명은 머리를 다쳐 의식불명 중태에 빠졌다. 아르헨티나는 유례없는 경제난에 빠져 있지만, 월드컵 우승으로 국민은 잠시 현실의 걱정을 잊었다. 과열된 분위기에 사상자까지 나왔다. 한편 메시가 4년 후 2026 북중미 월드컵에도 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솔솔 나오고 있다. 메시는 카타르 월드컵 기간 인터뷰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 월드컵”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승 직후 “월드컵 우승팀 선수로서 몇 경기 더 뛰고 싶다”고 말해 2년 후 코파 아메리카(남미 축구선수권대회)까지는 뛰지 않겠냐는 전망이 나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국 ‘데일리메일’은 21일 기사에서 “메시가 대표팀에서 은퇴할 거로 보였지만,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가능성이 사라졌다. 전 아르헨티나 대표팀 호르헤 발다노는 메시의 북중미 월드컵 출전을 확신했다”고 보도했다. 아르헨티나의 스칼로니 감독은 “메시가 뛰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2026 월드컵에서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메시는 20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침대에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안고 침대에서 일어난 사진과 함께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덧붙여 놓았다. 집에 돌아간 첫날 우승컵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는 기분 좋은 인사였다. 메시는 곧 소속팀에 복귀할 예정이다. 파리 생제르맹은 29일 스트라스부르와 프랑스 리그1 16라운드를 치른다. 이은경 기자 2022.12.21 15:10
프로야구

[IS 부산]"치킨&맥주 들고 올께요"...팬으로 관중석 이동한 이대호 '아듀'

"조선의 4번 타자는 이제 관중석으로 이동합니다." 부친 기일에 공교롭게도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은퇴식을 치렀다. 이대호(40)는 슬펐고, 또 기뻤다. 이대호는 8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전에서 현역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1회 말 적시 2루타로 녹슬지 않은 타격감을 뽐냈고, 7회는 고교 시절 주로 나섰던 마운드에 다시 올라 아웃카운트 1개를 잡고 홀드를 올렸다. 롯데팬, 야구팬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했다. 경기 뒤 열린 은퇴식에서 이대호는 동료와 팬을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을 전했다. 이대호는 지난 21년을 돌아보는 오프닝 영상이 흘러나올 때부터 눈시울이 불거졌다. 이어 동료·지인·스포츠로 인연을 맺은 이들의 영상 편지가 이어졌다. 추신수(SSG 랜더스) 오승환(삼성 라이온즈) 정근우·최준석·이우민(이상 은퇴) 등 1982년생 동갑내기 친구의 메시지에 이어, 강민호(삼성) 황재균(KT 위즈) 손아섭(NC 다이노스) 등 오랜 시간 롯데 소속으로 함께 뛴 전 팀 메이트도 속내를 전했다. 영상 메시지를 보낸 이들의 면면은 점점 화려해졌다. 메에저리그(MLB)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으로 뛰었던 2016년 인연이 닿은 스캇 서비스 감독, MLB 대표 스타 플레이어 로빈 카노(은퇴)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구도 키미야스 감독, 오카다 다카히로, 마쓰다 노부히로 등 시애틀보다 더 긴 시간 뛰었던 일본 리그 전 소속팀(오릭스 버펄로스·소프크뱅크 호크스) 동료들도 빠지지 않았다. 2008년부터 롯데의 제2의 전성기를 끌고 밀었던 카림 가르시아와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도 등장했다. 다른 9개 구단은 은퇴 투어를 통해 이대호를 상징하고 그의 은퇴를 기념하는 뜻깊은 선물을 보냈다. 소속팀 롯데의 선물도 특별했다. 신동빈 구단주가 직접 그라운드에 나섰고, 이대호의 야구 인생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는 영구결번(10번) 기념 커플 반지를 선사했다. 타격 7관왕·타격 자세·롯데에서 보낸 시간·등 번호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대호도 화답으로 자신이 쓰던 글러브를 신 구단주에게 선물했다. 이대호는 결국 울었다. 첫 은퇴 투어가 시작된 지난 7월 올스타전처럼 아내와 자녀들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신동빈 구단주가 직접 전한 기념 선물 증정식이 끝난 뒤 가족들의 영상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딸 예서 양은 "그동안 응원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너무 고생하셨고, 사랑해요"라고 했다. 아들 예승 군은 "앞으로 캐치볼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자"며 애교 섞인 바람을 전했다. 아내 신혜정씨는 남편의 '제2의 인생'을 응원했다. 그는 "무조건 같은 편이 되어서 함께 걸어가겠다. 기대된다. 그동안 고생했다"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전했다. 이내 다시 잡힌 전광판 속 이대호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호는 그동안 사랑과 응원, 채찍질과 가르침을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날(8일)은 그가 3살 때 하늘로 떠난 부친의 기일이라고 한다. 이대호는 "감회가 남다르고 또 슬프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어 "더그아웃에서 보는 사직구장 관중석 응원 광경만큼 아름다운 장면이 없었고, 타석에서 들리는 함성만큼 아름다운 소리가 없었다"며 "20년 넘게 그 장면과 함성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만들어 준 롯데팬에 감사하다. 나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대호는 이날 경기 전 열린 공식 인터뷰에서 "내 야구 인생은 50점이다. 롯데팬에 우승을 안겨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은퇴사를 통해서도 "절대적인 믿음 속에 20년을 보냈지만, 팬들과 제가 함께 꿈꾸던 우승을 이루지 못했다. 돌아보면 너무 아쉬운 순간, 안타까운 일들도 많았지만, 팀을 이끌어가야 할 내가 가장 부족했다. 후배들이 흔들릴 때 잡아주지 못하고, 흥분할 때 진정시키지 못했다. 모두 기대하는 순간 (타석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도 떠올라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기회가 주어지고, 경험이 쌓인다면, 나보다 더 활약할 수 있는 젊은 후배들이 있다. 팬분들이 변치 않는 믿음과 응원을 보내주신다면, 내가 그랬듯이, 남아 있는 선수들도 성장할 것이다. 그들이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롯데의 세 번째 우승이 곧 다가올 것이다"는 바람 섞인 당부를 남겼다. 동료애도 드러냈다. 자신이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추신수, 함께 고생한 동기 이우민과 최준석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강민호·정훈·손아섭·전준우 등 롯데에서 한솥밥을 먹은 후배들도 언급했다. 故 최동원을 향해서는 "푸른 유니폼의 자부심을 알려주셨다"며, 박정태에겐 "악바리 근성과 끈기를 일깨워줬고, 우용득·강병철·양상문 전 롯데 감독들에겐 '조선의 4번 타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로이스터·조원우·허문회 감독의 이름도 잊지 않고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가족을 향해 고마운 마음과 다짐도 전했다. 부산에 살면서도 지역 대표 관광지인 해운대조차 데려가지 못했다며, 딸·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독박' 육아에 고생한 아내를 향해서도 이 자리를 빌려 속내를 전했다. 이대호는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성장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그가 야구 선수 길을 걷는 데 가장 큰 힘을 준 건 할머니였다. 이대호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걱정을 많이 끼쳤던 제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응원받으며 현역 생활을 마무리하는 선수가 됐다. 오늘 가장 많이 생각나고, 보고 싶습니다"라고 하늘에 있는 할머니를 향해 외쳤다. 야구 예능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대호를 향한 러브콜도 쏟아지고 있다. 그는 영원한 야구인이며, 지도자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래도 당분간 그라운드 밖에 있을 것 같다. 이대호는 "이제는 배트 대신 맥주와 치킨을 들고 (딸과 아들) 예서와 예승이와 야구장에 오겠다. 롯데 '선수' 이대호에서 롯데 '팬' 이대호가 되겠다. '조선의 4번 타자'로 불러주셨던 이대호가 이제 관중석으로 이동합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팬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를 마쳤다. 이후 이대호의 영구결번식(10번)이 진행됐다. 최동원(11번)에 이어 구단 역사상 두 번째다. 그라운드에 도열한 동료, 지도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그는 그라운드 카퍼레이드를 끝으로 완전히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모든 행사가 끝난 뒤에도 그를 향한 시그니처 응원 '대~호'는 계속 울려퍼졌다. 부산=안희수 기자 2022.10.0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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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이대호, 멋진 고별 카퍼레이드

8일 오후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자이언츠와 LG트윈스의 경기 후 이대호의 은퇴식이 열렸다.이대호가 차량에 올라타 그라운드를 돌며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부산=김민규 기자 mgkim1@edaily.co.kr /2022.10.08/ 2022.10.0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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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리그 40년 The moment] 국보 탄생…해태 버스 불탔던 1986년

한국 프로야구가 올해로 출범 40주년을 맞이했다. 1969년 창간한 일간스포츠는 1982년 프로야구 태동을 현장에서 지켜본 국내 유일의 스포츠 전문지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프로야구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기록했다. 이 기간 여러 구단의 희비가 엇갈렸고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일간스포츠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지난 시즌까지 KBO리그 역사를 사진으로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1. 0점대 평균자책점 선동열 1986년 해태 선동열은 ‘괴물’ 그 자체였다. 39경기에 등판, 24승 6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0.99라는 경이로운 성적으로 개인 통산 첫 최우수선수(MVP)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프로야구 역사상 '규정이닝 0점대 평균자책점' 시대를 활짝 열며 '무등산 폭격기'의 출격을 알렸다. 이해 최동원(당시 롯데·19승 평균자책점 1.55)과 최일언(당시 OB·19승 평균자책점 1.58)의 성적도 인상적이었지만 선동열의 성적은 '넘사벽'이었다. 2. 한국시리즈 MVP '까치' 김정수 해태와 삼성이 만난 한국시리즈(KS)의 주인공은 '까치' 김정수였다. 프로 첫 시즌 9승 6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2.65를 기록한 신인 김정수는 KS 무대에서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알렸다. 시리즈 향방을 좌우한 1차전 구원승을 비롯해 3차전과 5차전에서도 승리를 따냈다. 특히 5차전에선 삼성에 에이스 김시진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판정승을 거뒀다. 김시진이 시리즈 3패를 당한 것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3. MBC 마운드 책임진 신인왕 김건우 선린상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김건우는 1986년 강렬한 데뷔 시즌을 보냈다. 37경기에서 신인 기록인 18승을 따내며 팀 선배 오영일(12승 8패) 유종겸(10승 7패)과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했다. 투수로는 1984년 OB 윤석환 이후 2년 만이자 MBC 선수로는 처음으로 신인왕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비운의 천재'였다. 이듬해 뺑소니 사고로 선수 생명에 위기를 맞았다. 긴 재활 치료 끝에 복귀했지만 구위 회복을 하지 못하고 1997년 은퇴했다. 4. 빙그레 이글스의 첫 시작 1986년은 빙그레(현 한화) 이글스가 첫발을 내디딘 시즌이다. 프로야구 7번째 구단으로 KBO리그에 참여한 빙그레는 3월 대전구장 앞에서 카퍼레이드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상군·한희민·이강돈 등이 원년 멤버. 전력은 약했다. 108경기에서 31승(1무 76패·승률 0.290)에 그쳐 최하위에 머물렀다. 1983년 삼미에서 30승을 기록한 '너구리' 장명부를 영입했지만 1승 18패(승률 0.053) 평균자책점 4.98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남겼다. 5. 해태 구단 버스 방화 사건 10월 22일 KS 3차전이 벌어진 대구에서 해태 구단 버스가 전소됐다. 광주에서 열린 KS 1차전에서 호투하던 삼성 투수 진동한에게 한 관중이 병을 던진 게 화근이었다. 공교롭게도 삼성은 그 경기에 패했고, 홈 경기를 벼르고 있던 삼성 팬들이 3차전까지 패하자 해태 구단 버스에 불을 질렀다. 해태 선수들은 경기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야구장을 떠나지 못했다. 프로야구 역사에 남는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6. 호랑이해 KS 우승한 해태 1986년 해태는 KS 첫 우승으로 왕조의 서막을 올렸다. 당시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에 올라 KS에 직행한 해태는 KS에서 삼성을 4승 1패로 꺾었다. 1차전에 승리한 게 결정적이었다. 7회 말까지 0-2로 뒤져 패색이 짙었지만 3-3 동점을 만든 뒤 11회 말 2사 1, 2루에서 김성한이 끝내기 안타로 4시간 넘는 혈투를 마무리했다. 우승 확정 순간 포수 김무종을 끌어안는 선동열의 모습은 리그 역사에 남는 한 컷이다. 7. 청보의 '파격 사령탑' 허구연 허구연 당시 MBC 해설위원은 1985년 10월 김진영 감독의 뒤를 이어 청보의 지휘봉을 잡았다. 역대 최연소(34세) 사령탑으로 관심이 쏠렸지만 1986년 8월 성적 부진(15승 40패 2무)으로 사실상 경질됐다. 당시 청보는 전신 삼미 시절을 포함하면 4년 동안 감독이 11번이나 바뀌는 내홍을 겪었다. 허 위원은 이후 토론토 블루제이스 마이너리그 코치 등을 거친 뒤 방송에 복귀했다. 지난 3월에는 한국야구위원회(KBO) 제24대 총재로 선출됐다. 8. 역대 두 번째 노히트노런 6월 5일 부산에서 열린 빙그레전에서 재일교포 김정행(롯데)이 '깜짝'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1984년 방수원(해태)에 이후 2년 만이자 리그 역대 2호 기록. 김정행은 29명의 타자를 상대로 안타를 허용하지 않았고, 롯데는 8-0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김정행의 대기록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6일 새벽 축구대표팀 김종부가 32년 만에 진출한 월드컵(멕시코 대회) 본선 불가리아전에서 극적인 동점 골(1-1 무승부)을 넣었기 때문이다. 9. 만장일치 '미스터 올스타' 김무종 김무종(해태)은 올스타전에서 3점 홈런을 포함해 3타수 2안타로 맹활약, 기자단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미스터 올스타'에 뽑혔다. 재일교포 출신 김무종은 그해 정규시즌에서 타율 0.224 8홈런 44타점의 평범한 성적을 남겼다. 이후 해태는 1987년 김종모, 1988년 한대화가 '미스터 올스타'로 선정돼 3년 연속 올스타전의 주인공이 됐다. 10. '헐크'의 100홈런 이만수(삼성)는 개인 기록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9월 2일 빙그레전에서 1회 말 천창호의 초구를 강타, 프로야구 사상 첫 개인 통산 100번째 홈런을 때려냈다. 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홈런에 이어 리그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당시 해태 김봉연과 치열하게 100홈런 선점 경쟁을 벌였는데 마지막에 웃은 건 '헐크' 이만수였다. 배중현 기자 사진=IS 포토, 한국프로야구 30년사 2022.09.10 09:00
야구

KT 위즈 우승 기념 카퍼레이드, 방역수칙 강화로 취소

KT 위즈의 통합 우승 카퍼레이드가 취소됐다. KT는 16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정부의 방역 대응 비상조치(대규모 행사, 집회의 방역수칙 강화)에 따라 오는 19 열릴 예정이었던 ‘V1 팬 페스티벌’ 행사가 취소됐다"라고 전했다. 이어 "금일(16일) 예정되었던 V1 페스티벌 선착순 신청 모집도 취소될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KT는 창단 첫 통합 우승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V1 페스티벌'을 19일 개최할 예정이었다. 선수단은 수원 화성의 관광 명소를 순환하는 열차인 화성서차를 타고 수원 시립미술관부터 팔달문, 행리단길, 장안문, 화서문 등을 거치는 카퍼레이드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염태영 수원시장, 남성봉 KT 스포츠단 대표이사도 자리를 빛낼 계획이었다. 애장품 경매 및 퀴즈 게임, '루키 카페' 운영, 기부 활동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하지만 코로나19에 발목 잡혔다. 안희수 기자 an.heesoo@joongang.co.kr 2021.12.16 14:51
스포츠일반

‘50년 만에 우승’ 밀워키 벅스, 코로나19에도 축제 분위기 만끽

50년 만에 미국프로농구(NBA) 정상에 오른 밀워키가 축제 분위기다. 2020~21 NBA 챔피언 밀워키 벅스는 23일(한국시간)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 시내에서 카퍼레이드 행진을 펼쳤다. 밀워키는 피닉스 선즈와의 NBA 챔피언결정전(7전 4승제)에서 1·2차전을 먼저 내줬지만, 이후 4연승을 달렸다.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1971년 이후 50년 만에 NBA 정상에 올랐다. 축하 행사 전날 밀워키 우승을 자축하기 위해 모인 인파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해 3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축하 행사 당일에 밀워키 현지는 축제 분위기였다. 밀워키 선수단을 태운 차량이 지나가자 거리를 가득 메운 밀워키 팬들은 환호했다. 팬들은 벅스 선수단을 향해 손을 흔들고 사진 촬영을 하며 맞이했다. 선수단도 우승 트로피를 연신 들어 올리며 팬들의 환호에 화답했다. 퍼레이드를 마친 밀워키 선수단은 홈구장 파이서브 포럼 앞에서 축하 행사를 가졌다.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 야니스 아데토쿤보(27)는 팬들을 향해 “밀워키! 우리가 해냈어! 믿을 수 없어!”라고 소리쳤다. 아데토쿤보는 자신의 생후 1개월 된 아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모태 벅스팬’이 되기를 바라는 이유에서다. PJ 터커(36)는 샴페인을 자신의 입에 쏟아붓기도 했다. 대규모 인파가 밀집하는 축하 행사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위험이 존재했다.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팬들이 대다수였다. 밀워키 보건 관계자들은 축하 행사에 앞서 마스크 착용을 당부했다. 줄리 윌리엄스 반 다이크 미 보건부 차관은 우승 축하 행사가 더 많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이탈리아는 지난 7월 중순 53년 만에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우승으로 카퍼레이드를 하는 등 축제에 빠졌지만, 이후 코로나 확진자가 폭증했다. 당시 로마 거리에는 방역 지침을 무시한 수천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보건 전문가들은 “유로 우승 인파가 바이러스 확산을 도왔다”고 분석했다. 김영서 인턴기자 2021.07.23 10:10
스포츠일반

“남편처럼 선수도 명품으로 바꾸겠다”

“한 배우, 부산 갈 준비해야겠는데?” “(해운대) 처갓집 가게?” “나 BNK에서 연락받았거든.” 여자 프로농구 부산 BNK 썸에서 감독직을 제의받은 박정은(44)이 남편인 배우 한상진(43)과 지난주 나눈 대화다. 하루 고민한 한상진은 다음날 “이삿짐 싸자. 부산에 같이 내려가자”고 대답했다. 이틀 뒤인 18일 박정은은 BNK 감독에 부임했다. 18년 차 부부는 서울 용산을 떠나 부산 해운대로 이사했다. 24일 부산 기장군 부산은행 연수원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BNK 상징색인 빨강 넥타이를 매고 온 한상진은 “우리 박 감독님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시즌 꼴찌 BNK를 맡았다. 박정은(이하 박) “플레이오프 기간에 제의받았다. 당시 WKBL(여자농구연맹) 경기운영본부장이었다. 챔프전 직후 남편에게 말했다. 부산에서 초·중·고를 나왔는데, 고향 팀이 고전하는 게 안타까웠다.” 한상진(이하 한) “드라마 촬영 스케줄이 있지만, 부산에서도 반나절이면 어디든 간다. 떨어져 있으면 힘들까 봐, 아예 같이 가자고 했다.” 구단이 새 감독을 유튜브 생중계로 발표했다. 한 “촬영장에서 휴대폰으로 봤다. 기발했다. 전에는 아내를 보려면 경기장에 직접 가야 했다. 500경기 정도 직관했나. 사극 촬영하다 수염을 붙인 채로 간 적도 있다.” 1994~2013년 용인 삼성생명을 5회 우승으로 이끈 ‘명품 포워드’였는데. 한 “한 기자가 ‘우아한 플레이와 명품 슛’이라며 쓴 적이 있다.” 박 “사실 난 스피드도 탄력도 좋지 않았다. 장점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했다. BNK 선수들에게 장점을 캐치해 사냥하는 법을 가르치겠다. ” 첫 만남이 연극 같았다던데. 한 “나는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박정은 팬이었다. 아내가 2002년 내가 출연한 연극을 보러 왔다. 후배 지인이라서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박 “처음에는 내 스타일 아니었다. 넷이 밥 먹는데 메뉴를 2개만 시키고, 자기는 생과일주스만 먹더라. 운동선수는 6개는 먹어야 하는데. 사실 돈이 없어서 그랬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무명 배우와 스타 선수 열애가 화제였다. 한 “5대 스포츠지 1면을 장식했다. (무명인) 내 얼굴은 작게 들어갔다. 연기 접고 이민 갈까 했다. 주인공 친구나 까불이 역할만 했다. 그런데 아내가 ‘슛도 몇만개는 쏴야 완성돼. 방향 잡고 가다 보면 분명 빛을 볼 거야. 내가 단단하게 받쳐줄게’라고 했다. ‘목소리가 중저음이라 사극이 어울릴 것 같다’라고도 했다. 2007년 드라마 ‘하얀거탑’에 캐스팅됐고, ‘이산’ 등에 출연했다.” 박 “결혼을 결심한 건 남편 생각과 (인생) 방향이 좋다고 생각해서였다. 연극에서 처음 봤을 때 그 눈빛에서 느꼈다. 사극의 긴 대사도 한 번에 할 만큼 머리도 좋다.” ‘외조의 왕’으로 유명하다. 한 “내가 보는 앞에서 아내 손등뼈가 세 갈래로 갈라져서 내 차로 병원에 후송한 적이 있다. 걱정돼 경기장을 자주 갔다.” 박 “밥 먹을 때도 반찬 그릇을 옮기며 ‘이렇게 패스했어야 했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작작해라’라고 받아친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뒷바라지해준 아버지가 1998년에 돌아가셨다. 4년 뒤 남편을 만났고, 아버지 대신 평생 내 옆에 있어 줬다. 아버지가 보내준 선물 같다.” 지금껏 여자 감독 4명 중 플레이오프에 오른 사례가 없다. 박 “은퇴 후 감독을 꿈꾸며 과정을 밟았다. 코치 3년, 행정가 3년. WKBL 본부장 시절 거의 모든 경기장을 다녔다. 프로는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한다. 플레이오프 진출 여성 감독 1호가 되겠다. 언젠가 우승 감독도 되고 싶다. 동주여상 시절 우승 후 카퍼레이드를 했다. 부산에 다시 농구붐을 일으키고 싶다. BNK가 명품 구단이 되도록 첫걸음을 떼고 싶다.” 한 “난 단역 연기를 가르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 나 역시 주인공 조인성의 회사 직원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채널명 ‘원포’는 ‘원포인트’의 줄임말인데, 누구에게나 한 가지 장점은 있다는 뜻이다. 아내는 100m 달리기를 강압적으로 시키기보다 방향을 잡아주려 할 거다. 신뢰를 쌓고, 목표 설정하고, 동기를 부여할 거다. 나도 결혼 3년 뒤에야 빛을 봤다. 무명 배우를 명품 배우로 이끌어줬듯, 선수도 그렇게 이끌 거다. 아내가 우리 집 리더다. 2013년 11월 11일 아내 은퇴식 후로는 농구장에 가지 않았다. 아내의 감독 데뷔전을 생각하면 내가 벌써 떨린다.” 부산=박린 기자 rpark7@joognang.co.kr 2021.03.2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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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NC, 창원서 온택트 페스티벌

창단 첫 우승에 성공한 NC가 연고지 경남 창원시민과 함께 '창원 NC 다이노스 온택트 페스티벌'을 개최했다. NC와 창원시는 지난 28일 MBC경남홀에서 무관중으로 우승 축하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유튜브와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 줌을 통해 중계됐다. 황순현 NC 대표와 NC 선수단은 '창원시'와 'V1'(첫 우승)을 새긴 유니폼을 액자에 넣어 허성무 창원시장에게 전달했다. NC와 창원시는 온택트 페스티벌을 제외한 카퍼레이드, 야외 축하 행사는 모두 취소했다. 배중현 기자 2020.11.2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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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단기전 최강자 '미스터 롯데' 김용희…"KS 우승 때 믿을 건 최동원·응원뿐"

롯데 자이언츠의 홈 연고지 부산은 '구도(球都)'로 통한다. 그만큼 야구 열기가 뜨겁다. 프로 출범 전에는 지역 고교 경남고와 부산고의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1975년 6월 실업팀으로 창단한 롯데는 1982년 프로팀으로 전환해 원년 구단의 자부심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했다. '사직 노래방'은 해외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뜨거운 분위기를 자랑한다. 1984년과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우승은 아직 한 번도 없지만 팬들의 열성적인 응원만큼은 '최고'로 손꼽힌다. 1982년 출범 첫 시즌 김용희(65)는 롯데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경남고 출신인 그는 실업팀 포항제철을 거쳐 롯데의 개막전 4번 타자를 맡아, 팀의 첫 승리를 확정 짓는 결승타의 주인공이다. 1981년 허리 부상 탓에 고질적인 통증에 시달렸지만, 단기전에 강했다. 올스타전 MVP에 두 차례 선정되는 등 '미스터 롯데'로 불리기도 했다. 김용희 경기 운영위원장이 '1982 롯데' 선수단을 대표해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故 최동원의 활약, 부산의 뜨거웠던 야구 열기부터 친구 박철순(OB 베어스)에 관한 추억까지 끄집어냈다. -부산 출신으로 롯데에 입단, 그것도 개막전에 4번 타자로 출전했다."당시 해태 타이거즈와 개막전이 구덕야구장에서 열렸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열기는 정말 대단했다. 관중석이 꽉 들어찼다. 특별히 4번 타자에 의미를 두진 않았고, 팀 승리에만 열중했다." -14대2로 크게 이긴 해태와 개막전에서 1회 결승타를 쳤다."1회 무사 만루에서 중견수 앞 적시타를 쳤던 거로 기억한다. 당시 상대 투수가 누구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현역 당시 별명이 '미스터 롯데'였다."팬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아마추어 당시 국가대표를 경험해 부산 팬들에게 익숙했고, 첫해 올스타전에서 미스터 올스타(1982년과 1984년 두 차례 수상)에 뽑혀 롯데의 상징이 되지 않았나 싶다." -두 차례 미스터 올스타 수상 때 상품은 어떻게 했나."1982년 대우 맵시 자동차를 받았다. 당시 자가용이 없어 내가 직접 탔다. 2년 후엔 맵시나였다. 2년 전에 받은 맵시를 지인에게 주고, 새로 얻은 승용차를 한동안 이용했다."(다만 KBO 자료에 의하면 1984년 MVP 부상은 대우 로열 XQ다.) -1984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당시 삼성 전력과 한 마디로 비교하면 굉장히 열세였다. 삼성은 호화군단으로 타격과 마운드, 수비 모두 우리보다 우세했다. 우리가 믿을 건 최동원의 존재, 또 분위기였다. 그거로 싸웠다. 최동원이 전인미답의 한국시리즈 4승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모습을 연출했다. 선수단 분위기를 한데 모으는 힘이었다. (삼성의 져주기 논란도 선수단 분위기에 영향을 끼쳤나?) 그렇다. 삼성이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롯데를 택한 것도 우리를 자극했다. 구덕에서 맞대결하는데 페어플레이에서 상당히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었다." -당시 롯데의 인기는 어땠나."팀 성적이 좋을 때 엄청난 열기였다. 반면 1982~83년 각각 0.388(6개 팀 중 5위), 0.434(6위)의 승률에 그쳤을 땐 팬들의 비난도 많았다. 부산이 야구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프로야구 출범 전부터 라디오 주파수를 잘 조절하면 다른 지역에선 불가능했지만, 부산에선 일본 야구 중계 청취가 가능했다. 그 당시 연세가 높은 어르신들은 일본어에 능통했다. 일찍부터 야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어떻게 하면 승리하는지 알았다. 라디오를 틀면 항상 야구 중계가 이뤄졌다. 1984년에 우승 땐 난리 났다." -반면 팬들의 뜨거운 열기 탓에 고충도 있었을 텐데."경기에 지면 팬들이 버스를 막고 '왜 졌냐'고 따졌다. 야구장을 빠져나오는데 한 시간 넘게 걸리곤 했다. 소위 제6공화국 때 정치권에서 청문회가 한창이었는데, 야구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청문회' 풍경이 연출됐다. 버스를 흔들어 버스가 넘어질 듯한 상황도 있었다. 팀 성적이 안 좋을 때 경기 중에 욕을 하거나, 물건이 날아올 때도 있었다. 입장권을 사지 못한 일부 팬들이 외줄 타기 하듯이 40~50m 높이를 올라와 관중석에 들어오곤 했다. 연습 장비를 두는 좌측 외야를 무단으로 뚫고 경기장에 들어오신 분들도 계셨다. -당시에도 키가 아주 컸다. 야구 열기가 높은 부산에선 어딜 가든 눈에 띄었을 것 같다."실제로 그랬다. 고등학교 때부터 키가 컸다. 경남고 3학년 때 청룡기 대회에서 우승해 부산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당시 부산 시내에 나가면 대부분 알아봤을 정도였다. (여성 팬도 많았나?) 야구장에 와서 관전하는 정도였다. 팬레터가 많을 때 100통씩 받곤 했다."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 일본전에서 역전 적시타를 기록하는 등 아마추어에서 화려함에 비해 프로에선 일찍 은퇴했다. (당시 대회 종료 후 포지션 별 최고 선수를 선정했다. 김용희 위원장은 일본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을 제치고 베스트 3루수로 뽑혔다.)"맞다. 아마추어 시절 활약에 비하면 다소 일찍 은퇴했다. 프로 출범을 앞둔 1981년, 실업야구 포항제철에 몸담았다. 당시 경기 도중에 베이스 러닝을 하다가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포항제철 감독님께서 '야구를 그만두고 사무직으로 옮기자'라고 권하셨다. 그 당시에는 의료진의 수술이나 구단의 재활 실력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 수술대에 오르면 유니폼을 벗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수술을 기다렸다. 그런데 수술을 하기로 한 당일에 못 본 의사가 오더니 '너 김용희 맞네'라고 하시더라. 수술 전 회의 때는 '김용희'라는 이름만 봤을 뿐, 내가 야구 선수인지 몰랐던 거다. 그 의사 분이 '수술하면 야구 선수 생활이 끝난다. 그러니 수술하면 안 된다'라고 하더라. 그래서 수술이 취소됐다. 약 3개월 후에 퇴원했다." -그래서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게 됐나. "그렇다. 다만 늘 허리에 통증을 안고 뛰었다. 허리를 제대로 숙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 경기 출전이 어려웠고, 정규시즌 성적(8시즌 통산 535경기, 타율 0.270 61홈런 260타점)도 안 좋은 편이다. 반면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이나 올스타전에선 좋았다. 조금 아파도 일주일은 눈을 딱 감고 참으며 뛸 수 있어서다. 당시 3루수로 나섰는데 옛날 수비 사진을 보면 다소 이상할 것이다. 허리가 아파서 (무빙하지 않고) 무릎에 손을 대고 있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 손을 조금 뗐다. 그만큼 통증에 시달렸다. 요즘에는 구단별로 트레이너가 3~5명 있지만, 당시에는 그냥 다친 부위에 파스 뿌리면 끝이었다." -프로야구가 개막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는지."선망의 대상이었다. TV를 통해 일본 무대에서 활약한 장훈, 백인천 등 당대 최고의 선수 플레이를 보며 자랐다. 일본은 잔디 그라운드에, 관중석도 꽉 들어찬 모습이 부러웠다. 우리도 일본처럼 프로야구가 출범한다고 듣고선 굉장히 반겼다." -프로 무대를 경험한 뿌듯함과 아쉬움이 교차할 것 같다."정말 뛰어난 능력을 지닌 선배들도 밟지 못한 프로야구를 경험해 정말 행복했다. 프로야구 초창기여서 몸 관리를 비롯해 다양한 노하우를 전수받았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도 든다. 선수 때 너무 많이 아팠다." -프로야구 원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를 꼽자면."단연 박철순(OB베어스)이다. 투구가 워낙 뛰어났다. 당시 22연승 대기록을 작성하지 않았나. 요즘은 투수 대부분이 체인지업을 던지지만, 그때는 박철순이 던진 체인지업의 구종 자체를 모를 시기였다. 박철순은 내 초등학교 친구다. 동광초에서 같이 야구를 했다. 경남중에 함께 진학했는데 키가 작았던 철순이가 1년을 쉬었다. 이후 서울(배명고)로 전학 갔다. 프로에서 만난 박철순은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투수였다. 기록을 자세히 모르지만, 상대 전적이 별로 안 좋았던 것 같다. (박)철순이의 체인지업을 보고선 다음 타자에게 상대한 느낌과 구종을 일러줄 때 '공이 오다가, 안 온다'라고 표현했다. 공이 직구처럼 날아오다가 홈 플레이트 근처에서 갑자기 아래로 휘어지며 속도가 뚝 떨어졌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로 야구 선교사가 와 기술을 전수한 적 있다. 당시 투수들에게 써클 체인지업을 알려줬는데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공을 저렇게 던지노'라고 그냥 넘겼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때 투수 구종은 직구, 슬라이더, 커브 정도였으니 (박)철순이의 공을 치기 아주 까다로웠다." -프로야구 원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첫 시즌 80경기 체제로 운영했다. 대개 팀당 일주일에 4경기 했다. 연고 구단이 없는 춘천을 비롯해 지방에서도 경기했다. 선수들 의식이 아마추어리즘이었다. 왜냐면 프로야구가 처음이었으니까." -현역 은퇴 후 1992년 롯데 우승 당시 코치를 역임했다. 이듬해 바로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시즌 전에 구단에 이런 의사를 미리 전했다. 미국에서 야구에 관한 기초를 배우고 싶었다. 구단은 우승 후에 만류했지만, '이때 아니면 갈 수 없겠다"라고 생각해 무조건 갔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씩 총 4번 정도 미국 연수를 다녀왔다." -롯데, 삼성, SK에서 감독을 지냈다. 그라운드의 신사로 통하며 인자한 모습이었다."안 좋은 거다. 감독은 어떻게든 성적을 올려야 하는 위치다. 감독으로서 코치들을 이끌며 선수들이 최선의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정규시즌 기준 통산 성적은 452승 501패 23무, 승률 0.474다.) - 최근 프로야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수가 있다면."이정후(키움) 강백호(KT)다. 이정후는 故 장효조와는 또 다르게 정말 정교한 타격을 한다. 강백호는 지금껏 KBO리그 타자 가운데 스윙이 가장 빠른 듯하다. 아직 완전체는 아니지만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녔다. 하드웨어와 근성이 뛰어나 아주 좋은 선수가 될 것이다." -경기 운영위원으로 매일 프로야구 현장을 누빈다."정말 바쁘다. 경기 진행 여부와 경기장 상태,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해 선수단 입장 등을 체크한다. 바쁜 것보다 관중이 입장하지 못해 마음이 더 아프다. 얼른 코로나19가 사라져 팬들이 경기장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선수단도 관중의 소중함을 많이 느낄 것이다. 모든 것이 정상화되면 선수단이 성숙하게 바뀌어 있을 것으로 여긴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가 이토록 발전한 건 선수와 구단의 노력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팬들의 성원 덕분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응원과 관심을 보내주시면, 선수들은 좋은 경기와 팬서비스로 보답할 것이라 믿는다." 이형석 기자 lee.hyeongaeok@joongang.co.kr 관련기사 [창간특집] OB 베어스 윤동균 서른넷 '노장' 원년 KS 진출…'막강 삼성' 박살냈지 [창간특집] 원년 첫 안타, 첫 홈런 '개막전 사나이' 삼성 이만수…"최동원 때문에 타율 많이 까먹어" [창간특집] 원년 개막전 '신 스틸러' MBC 청룡 유승안…"이종도 끝내기 만루포는 내가 실수한 덕" [창간특집] 최다 우승팀의 '투타 겸업' 에이스 해태 김성한…"백인천은 제압하기 힘든 상대" 2020.09.25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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