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시 9단은 19일 중국 베이징 쿤룬호텔에서 열린 제9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일본의 두 번째 선수 고노 린 9단을 맞아 240수 만에 흑 2집 반승, 전날 한국의 홍민표 6단을 꺾은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로써 한국과 중국은 각각 4명이 남은 반면 일본은 벌써 두 명이 탈락해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현재 2라운드를 준비하고 있는 각국 대표는 이창호 9단, 목진석 9단, 조한승 9단 박영훈 9단(이상 한국), 구리 9단, 창하오 9단, 왕시 9단, 후야오 위 8단(이상 중국), 일본의 다카오 신지 9단, 요다 노리모토 9단, 야마다 시미오 9단(이상 일본) 등이다.
이들은 11월 26일부터 부산 농심호텔에서 열리는 대회 2라운드(11.26~12.2)에서 격돌하게 되는데, 한국의 두 번째 선수가 왕시 9단을 상대하게 된다.
이날 대국은 세력 대 실리의 대결로 출발했다. 왕시 9단은 굵은 말뚝을 박으며 영역을 다지는 사이 고노 9단은 발빠른 행마로 곳곳에 전초기지를 만들며 맞섰다.
고노 9단은 '지하철 바둑' '실리 바둑'의 대명사로 꼽히는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고바야시 9단은 지하철 바둑으로 1990년대 조치훈 9단과 쌍벽을 이루며 한때 일본 1~3위 기전인 기성·명인·본인방 등 3대 타이틀을 독식하는 '대삼관'을 달성하기도 했던 주인공이다. 스승의 영향을 받은 고도 9단도 짭짤한 실리 작전을 앞세워 왕시 9단의 세력작전에 맞선 것이다.
그런데 승패의 분수령은 너무 일찍 찾아왔다. 왕시 9단이 흑 29로 하변 백 진영을 압박하려는 순간 고노 9단은 이를 외면한 채 우변 백 30으로 뛰어들어 3선으로 짧게 '기어가는' 악수를 자초하고 말았다. 왕시 9단이 기다렸다는 듯 기꺼이 우변을 고노 9단에 내주면서 외곽으로 두터운 철조망을 두르고 지뢰밭을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변 백 대마가 살기는 했지만 생불여사(生不女死·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뜻)의 신세였고, 우변을 내준 대신 기회를 잡은 왕시 9단은 우변에 철벽처럼 단단하게 세워진 방어막을 바탕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먼저 삶을 확신할 수 없는 하변 백 진영에 공습을 감행하면서 중앙에서 우하귀로 이어지는 세력을 더욱 단단하게 굳혔고, 또한 좌하귀의 백에 대해 삶을 강요하는 상황까지 몰고갔다. 불과 100수가 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흑의 절대 유리가 한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고노 9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후반 끝내기 수순에서 왕시 9단이 좌하귀에 흑 141로 파고 들며 143으로 패를 유도하자 기다렸다는 듯 반격에 나섰다. 고노 9단으로서는 이 패만 잘 활용한다면 주변에 어정쩡하게 머물던 흑 돌들을 그대로 생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렇게 되면 단숨에 역전까지 가능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전날 한국의 차세대 주자 홍민표 6단을 꺾은 왕시였다. 이같은 결정적인 순간에도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깨끗이 물러나 좌변 흑 161로 백 한 점을 잡으면서 주변을 안정시키는 방법으로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다.
바둑은 240까지 진행되며 계가까지 갔으나 반면 10집 내외의 차이는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왕시 9단이 반면 9집으로 2집 반을 남기는 승리를 거뒀다.
베이징=박상언 기자 [separk@ilgan.co.kr]
사진설명
대국 후 계가를 마친 왕시 9단(오른쪽)과 고노 린 9단. 두 선수의 얼굴은 표정만 봐도 누가 승자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대조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