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31일, 경인년 마지막 밤을 후암선원에서 보냈다. 나는 그저 인연 있는 분들 몇 분과 윷놀이나 하며 새해를 맞을 생각이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몇 백 명이 모이는 바람에 법당이 가득 차고 말았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자리. 후암선원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뉴욕 9.11테러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일본 아사히야마 음악제 참가·백두산대동제·오페라 '카르마'의 이탈리아 갈라콘서트·버뮤다 삼각지대 여행·일본 북해도 문화유산답사여행 등 그동안 후암가족들과 참 많은 추억을 쌓아왔다.
행사 비디오를 함께 보다보니 법당과 소원해진 인연도 있었다. A씨는 딸이 의사가 되지 못하자 선원에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B씨는 남편이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하고 좌천되자 역시 발길을 끊었다. 시업이 시원치 않은 C씨도 그랬다. 행사 비디오 속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선원에 나오는 극성팬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후암가족이 아니게 됐다. 신기한 일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나가면 새로운 사람도 많이 들어와 선원을 채웠다.
이와 중에 지금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이제 후암 식구가 된 분들도 있다. 특히 Y약사는 목숨을 걸고 후암여행에 동참했다. 그는 심한 천식으로 항상 숨을 몰아쉬며 쉴 새 없이 가래를 뱉어야하는 중증환자였다. 산소통을 코에 꽂은 채 몇 발자욱만 걸어도 숨을 몰아쉴 만큼 심각한 그가 여행을 감행하는 그를 보고 나는 '육지UDT'라는 별명을 붙여주고는 같이 웃었다. 그런 그가 후암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겠다고 하자 담당의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한다.
"가시면 죽을 수도 있어요. 정 죽고 싶으시면 가세요. 절대 제 탓하시면 안돼요." 그 말을 듣고 그는 나를 찾아왔다. "법사님, 의사가 죽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어떡하죠? 저는 꼭 여행을 가고 싶거든요."
생애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는 여행. 참 난감했다. 비행기에는 산소통을 착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능력자라지만 모든 염력을 그의 안전을 위해 쏟을 수는 없었다. 단순히 놀러가는 여행이라면 모를까, 이번 여행도 뉴욕 9.11 진혼제처럼 많은 영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Y약사가 산소통 없이 장시간의 비행기 탑승과 빡빡한 스케줄을 잘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을 꼭 여행에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하면서도 Y약사는 연신 거친 기침을 해댔다. 주변에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칫 외국에서 응급실이라도 실려 갔다가 다시는 한국에 못 돌아오면 어쩌나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같이 가세요. 여행 중에 아무 일도 없게 해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그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법사님, 제 생애 마지막 여행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법사님하고 떠나는 여행이니까 혹시 제가 잘못되면 구명시식이라도 잘 올려주세요."
이렇게 떠난 Y약사와의 후암여행. 설령 이것이 마지막 여행이라 해도 우리는 즐거웠기에 행복하면 된 것이 아닐까.
몇 번의 고비는 있었지만 Y약사와 후암가족은 즐거운 추억과 함께 한국에 무사 귀환했다. 이후 Y약사는 번번이 산소통을 휴대하며 후암가족여행에 동참하고 3번의 100일기도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건강이 나빴기에 오히려 개근을 한 것이다. 신기하게도 Y약사는 후암가족여행을 떠날 때 산소통 없이도 잘 다니고 있다. 그는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