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도 일이다. 당시 아버지는 진해경찰서장으로 계셨다. 서장 관사는 진해 탑산 바로 밑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간 진해에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바다를 봤다. 널 푸른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 광경, 어린 나이였지만 내가 본 풍경 중 가장 아름다웠다.
진해는 남국적인 도시였다. 마치 휴양지처럼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사람들도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라디오를 틀면 일본 주파수가 잡혔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구슬프게 들려오는 일본 엔카를 들으며 현해탄 너머를 바라보면 묘한 감정이 들었다. 한국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나는 여름 교복으로 반바지를 입었다. 반바지 교복은 처음이라 낯설었다. 하지만 진해에선 남학생들이 모두 반바지 교복을 입는다고 했다. 여름방학이 되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종종 근해에 있는 무인도에 가셨다. 무인도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였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 아버지는 지인들과 바다낚시를 즐겼다. 나는 옆에서 낚시를 구경하다 조개를 줍곤 했다. 피서가 따로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신나는 도시가 있다니 점점 진해가 좋아졌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태풍이 치던 어느 날 밤, 누군가 관사 문을 두드렸다. '꽝!꽝!꽝!' 태풍이 올라온다며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기에 나는 방에 숨어서 문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바람 소리인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들으니 사람 목소리도 났다. '서장님! 서장님!' 아버지는 의아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밖에는 폭우 속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서장님, 저희는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입니다." 생도 K씨와 H씨였다. 당시 진해엔 공군사관학교가 위치해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고향 후배였다. 태풍이 올라오는 바람에 늦게 외박 허가가 났는데 평소 존경했던 고향 선배인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따뜻하게 두 사람을 맞았다. 나는 아버지 품에서 10살이나 더 많은 아저씨뻘 두 형들과 담소를 나눴다.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 봤니? 오드리 헵번이라는 여자가 나오는데 정말 예쁘다." K생도의 말에 아버지도 크게 웃었다. 우리는 한참동안 영화 얘기를 했다. 밖에는 태풍 소리가 요란한데 관사엔 편안한 웃음이 계속됐다.
다음날 아침, 생도들은 아버지께 정중히 경례를 올리고 공군사관학교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생도 형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생도들이 걸어갈 험난한 길을 걱정해서였을 것이다.
내가 H생도를 다시 만난 건 10년 전 구명시식이었다. 한 치과 여의사가 나를 찾아와 공군 중령 시절 전투기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천도해달라고 했다. 영혼을 초혼하자 놀랍게도 바로 그 H생도였다. 45년 전 태풍 치던 날, 스무 살 젊은 패기로 무장했던 H가 이제는 영가가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비록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딸이 치과의사로 훌륭하게 성장해줘서 여한이 없다고 했다. 20대 듬직한 생도였던 형이 전투기 사고로 요절할 줄이야. 여름이 끝날 무렵, 문득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에 빨간 마후라를 휘날리며 하늘을 날았을 H생도 형이 그리워진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