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은퇴를 선언한 토니 라루사(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에 대해 '절친' 짐 릴랜드 감독이 한 말이다. 그 말대로 라루사 감독은 기적같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뤄낸 직후에,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은퇴하게 됐다. 라루사 이전까지 메이저리그 역사상 월드시리즈 우승 직후 은퇴한 감독은 단 한명도 없었다.
라루사 감독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장이다. 지난 1979년 34살의 젊은 나이로 처음 감독직에 오른 뒤 33시즌 동안 3개 팀을 거치면서 통산 2728승2365패를 기록했다. 이는 현역 감독 중에서는 다승 1위, 역대 3위에 해당하는 대기록. 월드시리즈 우승도 1989년 오클랜드 소속으로 처음 달성한 뒤 세인트루이스 소속으로 지난 2006년과 올 시즌까지 세 번을 달성했다. '올해의 감독(Manager of the Year)'을 수상한 것도 네 차례에 달한다. 야구 감독으로서 이보다 더 화려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라루사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지 성적만이 아니다. 라루사는 현대 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개척자이자 혁명가였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지의 톰 버두치는 "라루사는 새로운 시도를 한 몇 안 되는 감독"으로 "경기를 펼쳐가는 방식을 바꾸었"고, 기존 감독들과 달리 "그는 경기에 개입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감독이었다"고 썼다. 특히 '라루사이즘'으로 불린 그의 불펜 운용은 이후 다른 구단들이 뒤를 따르면서, 현대 야구의 표준으로 굳어졌다. 라루사로부터 시작된 1이닝 마무리와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는 많은 '쓸모없는 투수'들의 생명을 연장시켰고, 불펜 투수들의 처우를 개선했다. 그리고 야구를 더욱 복잡하고 치열한 두뇌싸움으로 만들어 놓았다.
라루사 특유의 불펜 운영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이뤄낸 두 차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서 빛을 발했다. 역대 최소승수팀으로 우승을 따낸 지난 2006년, 포스트시즌 시작 전만 해도 카디널스 불펜은 허약체질 그 자체였다. 이에 라루사는 신예 애덤 웨인라이트를 마무리로 배치하는 결단을 내렸고, 웨인라이트의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커브는 카를로스 벨트란을 비롯한 수많은 강타자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무리의 안정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의 다른 불펜 투수들까지 덩달아 힘을 내기 시작했다. 결국 모두의 예상을 깨고 카디널스는 2006년의 챔피언에 올랐다.
올 시즌도 마찬가지. 시즌 초반 마무리 라이언 프랭클린이 무너지면서 카디널스는 뒷문 불안으로 고전했다. 확실하게 마무리를 맡을 선수가 없는 상황에서 라루사가 꺼내든 카드는 '집단 마무리'. 24세이브의 신예 페르난도 살라스를 비롯해 제이슨 모트(9세이브), 에두아르도 산체스, 미첼 보그스 등이 경기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9회를 책임졌다. 살라스는 24세이브를 따내면서 홀드도 6개를 기록했고, 모트 역시 9세이브와 함께 18개의 홀드를 기록했다. 이들은 때로는 8회부터 나와 2이닝을 막아내는 일도 자주 있었다. '마무리는 한 명이어야 한다', '마무리 투수는 9회에 나온다'는 고정관념 -라루사 자신이 만든 관념- 을 과감하게 파괴한 것이다.
포스트시즌에서도 파격은 이어졌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카디널스는 역대 최고 기록인 75회의 투수교체를 기록했다. 세인트루이스 선발투수 중에 포스트시즌에서 승리를 기록한 것은 에이스 카펜터(4승)와 에드윈 잭슨(1승) 뿐. 라루사는 카펜터 외에는 확실한 에이스가 없는 선발진과 전담 마무리가 없는 불펜의 약점을, 한 박자 빠른 투수교체와 벌떼 마운드로 만회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와의 NLDS 2차전에서는 카펜터를 3이닝만에 내리고 나머지 6이닝을 살라스-도텔-렙진스키-보그스-로즈-모트 등 불펜 6명으로 틀어막아 5-4로 이겼고, 밀워키와의 NLCS 4차전에선 5-1로 앞선 5회 1아웃에서 2선발 하이메 가르시아를 강판하고 도텔-린-렙진스키-모트를 쏟아부어 승리했다. 이닝, 점수, 아웃카운트, 주자 수에 따라 적재적소에 투수를 투입한 결과 카디널스는 '판타스틱 4'가 버틴 필리스 마운드를 이겨내고, 밀워키와 텍사스의 막강 타선에게 입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물론 카디널스에 웨인라이트가 건재하고, 확실한 마무리가 있었다면 라루사는 보다 '전통적인' 투수 운용을 선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팀이 가진 전력으로 이기기 위한 최상의 방식을 찾았고, 이를 위해 야구계의 오래된 통념 -가을야구는 선발 싸움- 을 깨뜨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실 라루사는 1993년 한동안 선발투수가 3일 간격으로 3이닝만 던지게 하는 실험을 시도한 적도 있으며, 2000년대 후반에는 투수를 9번이 아닌 8번 타순에 배치하는 파격도 감행했다. 라루사와 데이브 던컨 투수코치는 별 볼일 없는 투수를 데려다 '낮게 떨어지는 싱커 투수'로 개조해서 수없이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는 더 많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시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지도자였다. 라루사에게 고정관념은 깨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라루사 감독의 화려한 경력을 보며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지난 여름 SK 감독직에서 해임된 김성근 전 감독이다. 김 감독과 라루사는 놀랄만치 닮은 점이 많다. '비틀즈코드' 같은 프로그램에 함께 앉혀도 될 정도다. 일단 둘다 1940년대 초반 출생으로 리그에 몇 남지 않은 노장 감독이다. 라루사처럼 김성근 감독도 상식 파괴자였다. 전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기존의 틀을 깨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데이터를 중시하고 탄탄한 투수력을 바탕으로 한 정교한 야구를 추구한 것도, 그 중에서도 특히 수비와 불펜의 역할을 중시한 것도 닮았다. 사실 올해 라루사가 선보인 집단마무리, 벌떼야구, 빠른 투수교체 등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김성근 감독이 보여준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은 자신의 야구에 영감을 준 인물로 일본 지도자들과 함께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라루사의 이름을 언급한 바 있다.
60대에 생애 두번째 우승(2006년)을 달성한 뒤 세인트루이스를 꾸준히 강팀으로 이끈 라루사처럼, 김성근 감독도 60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SK를 맡아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3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것. 둘 다 올 시즌이 계약기간 마지막 해였던 것도, 각각 구단측과 불편한 관계로 재계약 전망이 밝지 않았던 것도 판박이다. 라루사 감독은 2009년 새 단장이 된 모젤리악과의 껄끄러운 관계로 다른 팀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김성근 감독 역시 지난해 중순부터 재계약이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시즌 초반부터 주전들의 부상과 이탈로 힘든 시간을 보낸 것도, 여름 들어 최대의 고비를 맞이한 것도 공통점.
하지만 두 감독의 소름돋는 비틀즈코드는 여기서 끝난다. 지난 8월, 라루사 감독은 모젤리악 단장과의 면담에서 시즌 뒤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8월이 끝날 무렵 세인트루이스와 지구 1위의 게임차는 두자리수. 포스트시즌 진출은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9월 들어 기적이 일어났다. 카디널스는 9월에 무적의 팀으로 변신했고,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으로 포스트시즌에 합류한 뒤 우승까지 이뤄냈다. 쓸쓸한 은퇴가 예정됐던 라루사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가장 영광스럽게, 행복하게 은퇴하는 감독이 됐다.
김성근 감독의 마지막은 정반대였다. 8월 막바지에 김 감독은 돌연 시즌 뒤 사퇴를 선언했다. 재계약을 둘러싼 구단과의 이견과 불화가 원인이었다. "남은 시즌 동안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게 김 감독의 변. 그러면서도 코나미컵까지 거론할 만큼 좋은 성적으로 마지막을 장식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노감독이 유종의 미를 거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김성근 감독은 사퇴선언 바로 다음날 경질 통보를 받았다. 김성근 사단도 뿔뿔이 흩어졌다. SK는 자력반 타력반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포스트시즌에서 놀라운 승부근성으로 KIA와 롯데를 연파하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체력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1승 4패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매 경기가 한두점차 접전일 정도로 최강 삼성과도 대등한 경기력을 보였다. 김성근 감독의 '유종의 미'는 SK가 아닌, 인스트럭터로 참여한 성균관대학교의 전국체전 우승에서 이뤄졌다. 만일 그가 끝까지 SK를 지킬 기회를 얻었다면, 한국시리즈의 결과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기적을 이룬 세인트루이스처럼 모두가 깜짝 놀랄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해임이나 사퇴보다는 좀 더 최고 명장의 격에 맞는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은퇴 기자회견에서 라루사 감독은 “바로 지금이 끝낼 때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마지막을 알렸다. 대가에게 어울리는 멋진 마무리였다. 톰 버두치는 자신의 기사에서 "라루사의 경력에 결점은 없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위대함은 계속되었다"고 평가했다. 분명한 건 라루사처럼 멋진 마무리도, 위대함의 계속도, 기적같은 드라마도 감독 계약이 끝까지 지켜졌기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5년 계약한 감독이 1~2년만에 해고되고, 시즌 도중에 감독 자리를 쥐고 흔드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지는 프로야구에서는 꿈처럼 여겨지는 일이다. 라루사와 닮은 꼴인 김성근 감독도, 그 마지막 한계만은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야구인이 존중받는 미국 야구의 문화가 부럽기만 하다.
<야구라> 배지헌 (http://yagoo.tistory.com/)
* 위 기사는 프로야구 매니저에서 제공한 것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야구라>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