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우와 양동근. 어떻게 보면 대단히 근사하게 어울리고, 또 어떻게 보면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야구계의 전설 최동원과 선동열을 연기하기 위해 마운드에 선 두 배우가 서로에게 그리 호락호락한 맞수가 되었을 리 없다는 믿음 말이다. 조승우와 양동근은 ‘혹시’하는 우려도 ‘역시’하는 감탄으로 바꾸는 승부사들이 아닌가. 얘기를 들어보니, 과연 이 악바리 배우들은 촬영 내내 공 하나에 죽고 살았던 모양이다.
-의외다. 생각보다 말투가 느리고 애교 넘친다.
피곤하면 이렇게 된다. 요즘 뮤지컬 '조로' 공연 때문에 잠이 부족하다. 공연 끝나고 집에 오면 자정이고, 강아지랑 고양이들 밥 주고 놀아주다 보면 금방 새벽 되고. 피로가 계속 쌓인다.
-몇 마리나 키우는데?
원래는 개 두 마리에 고양이 한 마리였는데, 최근에 고양이 두 마리를 더 입양했다. 우연찮게 가정 분양 사이트에서 사진을 봤는데 전기가 ‘찌릿’하고 왔다. 한 마리는 대구, 한 마리는 대전까지 가서 데리고 왔다.
-확실히 동물이 주는 위안이 있지?
당연하지. 개들은 사람에게 바라는 게 없잖아. 항상 주인만 바라보고, 늘 기다려주고. 오히려 사람보다 낫다고 느낄 때가 많지. 예전에 어떤 책을 보니, 고양이는 세상을 아무런 조건 없이 아름답게 바라본다더라. 그래서 햇살마저도 고마워하면서 자기 몸을 맡기고 좋아하는 거라고.
-이제 영화 얘기 하자.(웃음) 일단 금테 안경이 그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 은근히 까다로운 아이템인데?
당시 최동원 선수가 썼던 안경과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수십 개 가져다 놓고 고심해서 딱 세 개만 고른 것이다. 영화에서 미묘하게 세 번 바뀐다. 난시가 있어서 안경은 운전할 때나 책 볼 때만 착용하는 정도다.
-남들은 평생 한 번도 어렵다는 ‘스포츠 영화’가 벌써 두 편이다. 대사보다 몸으로 관객을 설득해야 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지 않나?
어렵지만 그만큼 쾌감이 큰 것 같다. 사실 나, 운동신경이 꽤 좋은 편이다. 기본적으로 몸 쓰는 걸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뮤지컬 하겠다고 춤을 배웠는데, 하나씩 하나씩 기술적으로 성취해 나가는 맛을 알겠더라. 그래도 뛰는 건 싫어했는데, <말아톤> (2005) 찍으면서 좋아졌다. 짧게는 3킬로미터, 길게는 7킬로미터씩 거의 매일 뛰는데 그 상쾌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거지. 야구는 어릴 때부터 워낙 좋아했고.
-어릴 적 꿈이 투수였다지?
<퍼펙트 게임> 이 꿈을 이뤄줬다.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야구 영화인데, 최동원 역할? 안 할 이유가 없는 거다. 원래 경상도 사투리를 부담스러워하는데 그것도 전혀 문제되지 않을 만큼. 최동원, 그리고 배우라는 꿈을 가지기 직전까지 꿈꿨던 투수. 그거면 충분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인다.
물론 과정은 고됐지만 촬영하는 내내 정말 즐거웠다. 촬영 몇 달 전부터 트레이닝을 받고도 끝날 때까지 계속 자세 교정, 연습에 또 연습이었다. 그래도 촬영 끝날 때쯤 되니까 어쭙잖지만 투구 폼이 조금은 나오더라. 어느 정도의 성취감은 있었지. 경상도 사투리 배우려고 (김)윤석이 형 괴롭혔던 것도 기억난다. 형 집에 녹음기랑 시나리오 들고 가서 “처음부터 끝가지 세 가지 버전 정도로 읽어줘”라고 했다. 그 녹음 파일을 가지고 다니면서 감정 붙이고, 호흡도 붙여보고. 몸 힘든 거야 잠깐이었고, 정말 재미있게 찍었다. 내가 ‘정말’ 재미있게 촬영한 영화는 ‘정말’ 잘되더라고.(웃음)
-최동원이라는 인물과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려 했나, ‘조승우화’ 하려고 했나?
중점을 준 건 딱 하나다. 난 최동원이라는 사람의 인간성에 반했다. 영화에서 그게 보였으면 했다. 그 분은 전성기 시절에도 선수 위원회를 만들어 다른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던 분이다. 그로 인해 불이익도 많았을 테고, 결국 부산의 원조 20승 투수가 삼성으로 가게 된 결과를 낳았는데도 말이다. 가자마자 두 달 만에 은퇴식도 없는 은퇴라니,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상처가 너무 컸을 것이다. 말투를 똑같이 따라하는 것? 안 중요하다. 투구 폼 100퍼센트 똑같이 따라하는 것? 그건 어차피 안 된다. 대신 그 분이 얼마나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고, 얼마나 후배들과 마운드를 사랑했는지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본인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투구 폼이 꽤 비슷하다.
노력도 많이 했다. 감독님께도 공언했고. 1981년 대륙간컵 우승 때 투구 폼부터, 해태와 15회 연장까지 붙었던 경기 마지막 폼까지 미세한 차이지만 다 조금씩 바꿔서 해보겠다고. 절반 정도는 비슷한 폼이 된 것 같다.
-사실 캐스팅 소식 들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악바리 조승우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을까?
카메라에 어색한 내 모습이 담기면 정말 짜증난다. 야구 영화 보면서 늘 투수 역할 맡은 배우들의 폼이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생각했지. 나중에 내가 야구 영화를 하면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어깨가 빠지도록 던져야지. 어색해 보이는 게 너무 싫으니까 그야말로 죽어라 던진 거다.
-마운드에 서면 조승우는 무엇부터 보이던가?
시선. 내 등 뒤, 내 옆, 덕아웃에 앉아 있는 선수들, 타자, 포수, 심판의 시선. 현장이니까 물론 카메라도 다 나만 바라보고 있고.
-그 순간은 엄청나게 외롭지?
그렇지. 마운드에 오르기 전부터 예감했다. 무대와 비슷한 느낌일 거라고.
-촬영하면서 입었던 유니폼은 어떻게 보관하고 있나?
세탁해서 잘 접어놨다. 벽에 걸면 변색될 것 같아서. 파란색, 흰색 유니폼 나란히 등 번호 11번이 보이도록. 썼던 안경과 모자까지 함께 넣어뒀다.
-선동열 감독은 양동근의 연기를 볼 것이다. 故 최동원 감독은 조승우의 연기를 영원히 보지 못할 테고. 아쉬움이 큰가?
크지, 매우 크지. ‘'퍼펙트 게임'이 야구 영화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감독님 가족들은 정식으로 초대해서 보여 드려야지. 자랑스럽게.
-‘제대 후 첫 스크린 복귀작’처럼 보이지만, 중간에 구혜선 감독의 <복숭아 나무> 를 촬영했다. 상업 영화로 복귀하기 전 워밍업이었나? 복숭아>
하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군대에서 우연히 구혜선 감독이 쓴 '탱고'를 읽었는데 깜짝 놀랐다. 구혜선은 다듬어지지 않은 천재 같더라. 마침 제대하면 영화를 많이 찍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영화 규모 같은 것 신경 쓰지 않고 작품 경계도 자유롭게 넘나들고 싶고. 그러다 구혜선 감독이 소속사로 시나리오를 보내서 읽었고, ‘조금 다듬어야겠다’며 피드백을 보냈더니 2주 만에 놀랍게 고쳐 오더라. 그래서 바로 출연 결심을 굳혔다.
-직접 연출해 볼 생각은 없나?
아니. 연출은 타고나야 한다. 절대 아무나 할 수 없다. 연출은 뒷모습이 외로워야 하는데, 나는 뒷모습이 외롭고 싶지 않다.(웃음)
-그럼 조승우가 가진 창작욕은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
연출은 하지 않고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싶다. 마음 맞는 젊은이들이 모여 팀을 짜고,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아주 길게 가지며 작품을 완성하는 거다. 요즘 작품들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준비해서 올렸다가 장사 안 된다고 바로 내려서 공중분해시켜 버리는데, 그거 문제다. 오래 공들여 잘 만들어야지, 고작 몇 달, 고작 1년 동안 후루룩 뚝딱 만들어 올리는 게 외면당하는 건 당연하잖아.
-다행히 당신이 요즘 공연하는 '조로'는 화제다. 출연료도 늘 화제인 배우이니, 툭 터놓고 말해보자. '지킬 앤 하이드'보다 더 받나, 덜 받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