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대전구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한화-두산전은 우천 연기됐다. 이번 시즌 비로 미뤄진 경기는 4일 기준 총 65경기(노게임 6개 포함)다. 지난주 태풍 볼라벤에 이어 덴빈까지 상륙하면서 연기된 경기 숫자가 부쩍 늘었다.
비가 올 때마다 근심 섞인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우천 연기 여부를 결정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위원이다. KBO는 유남호(전 KIA 감독)·김재박(전 현대·LG 감독)·서정환(전 삼성·KIA 감독)·김호인·허운(전 심판위원) 등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경기감독분과를 운영 중이다. 감독위원들은 오후 6시30분 경기의 경우 오후 2시30분이면 구장에 나와 일기예보와 실시간 위성사진을 확인한다.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기상청과 비행장, 공항에 연락해 날씨를 꼼꼼하게 체크한다.
비구름 떼가 몰려오면 감독관들의 마음은 새까맣게 탄다. 유남호(61) 경기감독분과 위원장은 "우리는 팬들이 야구를 즐겁게 관전할 수 있는 환경을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팬들에게 종종 '쉬려고 경기를 취소한다'는 오해를 산다. 순위싸움 중인 구단의 눈치도 봐야한다"며 한숨을 삼켰다.
프로야구는 이번 시즌 700만 관중을 바라보고 있다. 인기가 높은 만큼 비 때문에 울고 웃는 사연들이 많다. 김재박(58) 감독위원은 장마철만 되면 감독들의 '애간장 녹이는' 눈빛을 받아내느라 진땀을 뺀다. 그는 "7~8월은 선수들이 지치고 피곤한 시기다. 빗방울이 조금만 비치면 '쉬었으면 한다'는 눈망울로 바라보는 감독들이 있다"며 웃었다.
김 감독위원은 1996년 현대를 시작으로 2007~2009년까지 LG의 수장을 맡았다. 그만큼 각 구단의 딱한 사정을 잘 안다. 그는 "감독이나 코치들은 모두 야구계 선·후배들이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다 보니 더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감독위원들의 본령은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데 있다. 김 감독위원은 "장맛비가 세차게 쏟아지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햇빛이 날 때가 있다. 그라운드가 마르면 경기를 열 수밖에 없다. 눈치가 보여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팬들에게 '항의 전화'를 받는 것은 다반사다. 유남호 위원장은 "일 년에 서너 번씩 팬들의 전화를 받는다. '원정 경기를 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경기가 취소됐다. 허망하다. 나를 위해 경기를 열어달라'는 하소연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며 "어떻게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아셨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분만을 위해 경기를 다시 할 수는 없다. KBO에 걸려오는 전화는 훨씬 더 많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김재박 감독관은 야구팬들 사이에 얼굴이 잘 알려져 있다. 경기를 연기하고 구장을 나서면 기다리고 있던 팬들의 '습격'을 받기도 한다. 그는 "팬들이 '이 정도 비는 맞으면서 응원할 수 있다. 경기를 해달라'고 호소하실 때 제일 난감하다"고 말했다.
허운(53) 감독위원은 도망(?)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번 정규시즌은 2~5위간 순위싸움이 유독 치열하다. 허 감독위원은 "어떤 팀이든 상대투수가 약하면 잡고 싶고, 강하면 피하고 싶다. 비가 좀 온다 싶으면 오전부터 괜히 전화를 걸어와 날씨를 전해주는 구단 관계자들도 있다"며 웃었다. 그는 "나도 사람인데 원망 섞인 눈빛을 느끼지 않겠는가"면서도 "흔들릴 수 없다. 아예 구장에 나가면 휴대전화 전원을 끄거나 줄행랑을 놓기도 한다"고 말했다.
말 많고 사연도 많지만 뿌듯할 때도 자주 있다. 우천 연기나 강행 판단이 딱 들어맞을 때다. 김재박 감독위원은 "빗줄기가 오락가락해 경기 시작 직전까지 고민할 때가 많다. 연기 즉시 비가 '콱' 쏟아지면 '오늘도 내가 옳은 결정을 했구나' 싶어 흐뭇하다"고 전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안전이다. 유 위원장은 "우리는 날씨 말고도, 그라운드 사정을 판단한다. 선수들의 안전이 달렸다.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다. 팬들께서도 경기가 우천 연기됐다고 너무 원망들 말아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