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가을이 왔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힘들었다. 비도 많이 왔고, 날도 무더웠다. 폭염에 전기사용량이 늘어나자 사상 최대의 대정전이 올 지도 모른다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절전하느라 온 국민이 고생이 많았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한 지인은 이번 여름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렇게 징그러운 여름은 처음입니다." 아침마다 찜통 같은 사무실로 출근할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30도를 육박하는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저절로 땀이 흘렀다. 마치 사우나에 앉아있는 것처럼 숨도 쉴 수 없었다. 게다가 전기사용량이 많아지면 사무실 불마저 껐다. 컴퓨터만 빼고 모든 전기를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직원들은 건전지로 돌아가는 작은 손 선풍기부터 시원한 재질의 방석까지 모든 것을 동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같은 사무실의 한 여직원은 임신 중의 몸으로 몇 번이나 기절했다고 한다. "벌써부터 내년 여름이 걱정입니다."
1973년도 오일쇼크 때 일이다. 국제석유가격이 급상승하자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우리나라는 대혼란에 빠졌다.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국가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석유 생산을 줄이고 가격을 대폭 올렸다. 그 여파로 아랍의 석유에 의존했던 우리나라 같은 나라는 인플레이션에 빠져 물가가 폭등하고 뜻하지 않은 불황까지 맞게 됐다.
정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석유사용을 줄이라고 명령했다. 그 중에 하나가 전국 목욕탕에 설치한 사우나를 폐쇄하는 것이었다. 사우나를 폐쇄하면 그만큼의 석유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부산의 한 목욕탕에서 때밀이로 일하고 있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과연 사우나 하나를 폐쇄한다고 연료가 줄어들까. 그때만 해도 공해 문제 때문에 사우나를 뜨겁게 만들기 위해 벙커씨유를 썼었다. 국가 정책대로라면 사우나 하나를 폐쇄하면 두 말에서 세 말 정도의 벙커씨유가 절약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막상 국가 정책대로 사우나를 폐쇄한 결과 기름은 하나도 절약되지 않았다. 사우나가 없어지자 목욕탕이 추워져 그만큼의 기름이 더 들어갔다. 이론상으로는 사우나가 없으면 기름이 절약될 것 같지만 실제는 오히려 기름 낭비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일쇼크가 끝날 때까지 우리 목욕탕은 사우나를 사용할 수 없었다. 목욕탕 입장에서는 참 억울한 정책이었다. 국가 말대로 기름을 절약하고자 사우나를 폐쇄했다가 기름도 더 쓰고, 사우나가 없어졌다고 손님들의 거센 항의도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요즘 국가에서 많은 복지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물론 복지는 좋다. 모든 국민들이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정책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책상에서 만들어진 복지는 현실과 다를 때가 많다. 올 여름 전력 예비율 때문에 울고 울었던 국민들을 생각하면서 보다 현실적인 국가 정책이 필요할 때라 생각된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