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에는 현역뿐 아니라 은퇴한 선수, 지도자들 사이에 동명이인이 많다. 그러나 팬들에게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정해져 있다. 감동과 환희를 선사하며 오랜 시간 사랑 받은 스타들의 명성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선수들에겐 부담일 수 있다. 이들 중 누군가는 스타들의 그늘에 가린 채 선수생활을 마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미 없는 비교를 당하기도 한다. 꾸준히 활약하며 자신만의 플레이를 보여주지 않으면 스타 플레이어와 같은 이름이란 사실만 기억된다. 단지 이름이 같은 선수가 존재할 뿐이지만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 슈퍼스타와 동명이인 누가 있나
KIA의 신인 내야수 박찬호(18)는 야구를 시작하기 전엔 ‘코리안 특급’ 박찬호(40)와 같은 이름인 것이 부담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저 같은 이름을 가진 것뿐인데 어릴 때라 괜히 놀리는 친구들이 있었다”며 유년 시절을 언급했다. 그러나 야구 선수가 된 이후엔 누구도 그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최고 스타와 같은 이름인 것 만으로도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그 만큼 부담감도 컸다. 주변에서 ‘이름에 걸 맞게 잘해야 하지 않겠냐’는 격려 섞인 압박도 있던 것이 사실이다.
삼성의 투수 김기태(26)도 마찬가지다. 그는 김기태(44) LG 감독과 동명이인이다. 특유의 ‘형님 리더십’으로 이번 시즌 팀을 11년 만에 가을잔치로 이끈 김기태 감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반면 삼성의 김기태는 2006년 데뷔 이후 1군 무대에서 16경기에 출전해 29이닝을 소화한 경력이 전부인 무명에 가까운 선수다. 2군 무대에선 가능성을 보였지만 아직은 스타 출신 감독과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이 더 주목 받고 있다.
LG의 ‘작은 이병규’(30·7번)에게도 팀 선배 ‘큰 이병규’(39·9번)는 넘어야 할 산이다. ‘큰 이병규’는 40살에 타격왕에 오르며 여전히 물오른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다. 현역이지만 이미 레전드 반열에 있는 선수다. ‘작은 이병규’ 역시 존재감을 인정 받으며 팀에 꼭 필요한 자원이지만 ‘큰 이병규’가 은퇴한 후에도 ‘작은’ 이란 수식어가 남지 않도록 지금보다 더 많은 활약이 필요하다.
두산에서 뛰었던 내야수 이승엽(31)처럼 ‘국민타자’ 이승엽(37)에 그늘 속에 존재를 알리지 못하고 1군 무대에서 사라진 케이스도 있다.
◇ 흔하지 않은 에피소드로 기억된 동명이인 선수들
동명이인 선수들 사이에 에피소드가 화제가 되면서 기억되는 경우도 있다. 2011년 당시 삼성 외야수 이영욱(28)은 SK의 투수 이영욱(33)을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며 동명이인 선수간의 투타 맞대결에서 홈런이 나온 최초의 사례를 만들었다. 이들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11월 2차 드래프트를 통해 투수 이영욱이 삼성으로 영입되면서 군복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타자 이영욱과 같은 팀 소속으로 한 경기에 나서는 상황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2010년엔 동명이인 투수가 한국시리즈에서 나란히 승리투수와 세이브를 기록한 일도 있었다. 당시 SK의 투수 이승호(37)는 3차전에 구원등판하며 2⅓이닝 동안 완벽투를 선보였다. 그가 팀 승리에 발판을 마련했다면 현재 NC 소속의 이승호(32)는 9회 1사 2,3루에 등판하여 두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날 두 선수의 활약은 한국시리즈 3차전이라는 상징성과 맞물려 흔하지 않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타자 윤석민(28)과 투수 윤석민(27)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같은 이름뿐 아니라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온 인연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2007년 당시 두산 소속이던 넥센의 내야수 윤석민은 상무 입대를 지원했으나 KBO가 실수로 투수 윤석민(27)의 자료를 보내면서 군복무 기간 동안에도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됐다. 이로 인해 타자 윤석민은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게 되며 촌극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SK의 타자 김상현(33)과 KIA의 투수 김태영(33)의 인연도 남다르다. 2009년 KIA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타자 김상현은 지난 5월 송은범과 트레이드 됐다. 비록 다른 팀으로 떠났지만 KIA팬들에게 김상현이란 이름은 여전히 우승의 여운을 준다. 그러나 이번 시즌 KIA 팬들은 투수 김상현을 맞이하게 됐다. 2차 드래프트를 통해 KIA 유니폼을 입은 김태영은 이번 시즌까지 김상현이라는 이름으로 선수생활을 해왔다. 개명을 했지만 KIA 팬들은 타자 김상현만큼 활약해주길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