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에이전트. 화려한 직업처럼 보인다. 혹자는 메이저리그 최고 선수들을 고객으로 둔 스캇 보라스(62)의 성공기를 보면서 에이전트의 화려한 삶을 상상할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1996년 나온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서 톰 크루즈가 연기한 에이전트와 선수의 깊은 유대 관계에 감동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국내에서 손꼽히는 에이전트인 이치훈(45) 홀 오브 드림스 스포츠(Hall of dreams sports) 대표는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쉽지 않은 직업"이라고 말한다.
이치훈 대표는 최희섭(35·KIA)부터 최근 뉴욕 양키스와 계약한 박효준(18·야탑고)까지 여러 국내 선수들의 미국 무대 진출을 도왔다. 에이전트를 시작한지 올해로 17년째인 이 대표를 만났다.
- 야구 선수 출신이라고 들었다.
"아버지(이재성)께서 1955년 야구 국가대표를 지내신 분이다. 투수 출신이셨다. 대구시 야구협회장을 오래 하셨고, 경남육상연맹 회장도 하셨다. 김응용 한화 감독님과 함께 운동을 해 친분이 있으시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면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스포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구 남도 초등학교에서 야구(내야수)를 시작했다. 지금은 은퇴한 (양)준혁이 형이 1년 선배다. 중학교를 다니다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조기 유학을 떠난 셈이다."
- 유학 생활이 힘들진 않았나.
"잘 적응했던 것 같다. 15살 때는 미국 청소년 국가대표에서 뛰었고, 고등학교 때는 내가 살던 워싱턴주의 플레이어 오프 더 이어(Player of the Year·올해의 선수)에 뽑히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메이저리그 토론토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어차피 토론토에서는 하위 지명을 하겠다고 했고, 부모님께서는 대학 진학을 원하셨다. 그래서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루이스앤클락 대학(Lewis & Clark College)에 들어갔다. 미국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대학이다. 대학에서도 야구를 계속 했다. 대학 1학년 때인 91년에는 한국 국가대표 상비군에 들어가 훈련을 하기도 했다. 이종범, 동봉철, 정민태, 구대성 등이 당시 국가대표 멤버였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자유계약으로 토론토에 입단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국의 신고선수와 비슷한 개념이다. 한 달 정도 팀에 합류해 훈련을 하다가 연습게임에서 슬라이딩을 하다 무릎을 다쳤다. 팀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됐고, 롯데에 들어갔다. 당시 사직구장은 인조잔디라 그라운드가 매우 딱딱했다. 무릎에 다시 물이 차더라. 어쩔 수 없이 거기서도 야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됐다."
- 아쉬움이 남았겠다.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대학에 돌아가 학위를 받았다. 당시 토론토에서 나를 스카우트하셨던 분이 어느 날 에이전트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를 하셨다. 당시 막 (박)찬호가 미국에 왔을 때였고, 나조차도 에이전트라는 직업이 생소했다. 그분께 조언을 듣고, 여러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내가 가진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선수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못 다 이룬 꿈을 에이전트라는 직업을 통해 어느 정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선 당연히 반대하셨다. 국내에선 워낙 잘 알려지지 않은 직업이었던 탓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97년에 사업을 시작했다. 첫 고객이 바로 최희섭(현 KIA)이다."
- 그럼 국내 선수를 메이저리그에 보내려고 사업을 시작한 건가.
"맞다. 나는 미국에서 야구를 했기 때문에 선수들의 능력, 가치, 계약 과정 등을 잘 알고 있었다. 국내에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선수들에게 더 좋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한국에 돌아와 아마추어 야구 경기를 보러 다녔다. 당시에 눈에 띄는 선수는 단연 광주일고 최희섭과 김병현이었다. 당시에는 동양인 야수로 미국 무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선수가 없었다. 평가도 당연히 낮았다. 어떤 분들은 '동양인 야수가 더블A 이상 올라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미국에서 야구를 해본 경험상 희섭이는 드래프트에서도 1, 2라운드에 뽑힐 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 몇몇 구단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제시 금액이 15만 달러 수준으로 형편 없었다. 동양인 야수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그럼 얼마를 기준으로 협상을 진행한 건가.
"나는 무조건 120만 달러 이상은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희섭이의 경기를 함께 보면서 계속 설득했고, 평가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80만 달러 선까지 올랐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시카고 컵스에 '스프링 캠프에 초대해주면 확실히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때 희섭이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고려대로 진학하기로 하고, 입학 전에 컵스의 스프링 캠프에 다녀왔다. 당시 프리 배팅을 하는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30개를 쳐서 30개가 다 넘어갈 정도였다.(웃음) 나도 놀랐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원한 계약금 120만 달러를 확정했다."
- 최희섭 이후에는 어떤 선수들을 맡았나.
"희섭이 계약을 성사시키고,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그러고 나서 인하대 포수 권윤민이 120만 달러를 받고 컵스에 진출했다. 다음에 2001년 류제국이 컵스와 160만 달러에 계약했다. 봉중근 같은 경우에는 CSMG라는 에이전시와 애틀랜타 입단 계약을 했고, 이후에 나와 함께 일을 했다. 정영일도 같은 케이스다. 이학주, 하재훈, 나경민, 김진영, 정수민(이상 컵스), 장필준(LA 에인절스), 김성민(오클랜드), 그리고 올해 양키스와 계약한 박효준까지 나를 통해 미국에 진출했다. 프로 선수들 중에는 KIA 이범호가 일본 소프트뱅크에 갈 때 나와 함께 했다."
야구선수 출신인 이치훈 대표는 91년에는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이종범, 정민태, 구대성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사진은 당시 동료인 이종범(왼쪽 사진의 왼쪽), 정민태(오른쪽 사진의 오른쪽)과 찍은 것
- 에이전트가 하는 일은 정확히 뭔가.
"우선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선수가 구단에 입단한 후에는 잘 적응하고,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선수 편에 서서 구단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 계약상 문제로 선수와 구단의 마찰이 생길 때 중재하고 일을 해결한다. 또 선수가 구단이나 동료 선수들과 마찰을 빚었을 때도 에이전트가 나선다."
- 에이전트를 하면서 가장 속상한 점은 뭔가.
"한국에선 에이전트라는 직업이 생소해서 그런지 몰라도 에이전트를 연예인 매니저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에이전트는 선수와 동행하면서 선수를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선수가 기대한 만큼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에이전트가 관리를 잘못한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에이전트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야 에이전트 피(fee)를 받을 수 있다. 선수가 잘되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들이다."
- 일에 대한 회의가 들진 않던가.
"솔직히 회의가 들고 일을 정리하고 다른 일을 해볼까도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힘들어 했다. 나름 선수들을 최선을 다해 대했고, 하나라도 더 얻기 열심히 뛰어다녔다. 나랑 마찰이 있던 선수도 분명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이 더 많았다.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지인들이 상당히 큰 힘을 주셨다."
- 그들이 국내에 복귀하는 과정에서도 에이전트 역할을 하는 건가.
"사실 최희섭이나 봉중근이 복귀할 때는 가능했다. 해외파 특별 지명 제도가 있었고, 계약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에서 뛰던 선수가 국내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2년의 유예기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프로 신인 드래프트에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 지금은 그냥 프로 구단 스카우트들을 만나 선수에 대한 정보를 드리는 정도다. 김진영이나 장필준 같은 선수들은 인성과 실력을 갖췄기 때문에 구단 관계자나 스카우트를 만날 때마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있다."
- 박효준 이후에 국내 아마추어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지 않겠나.
"그렇지 않다. 앞으로 많이 못 갈 거 같다. 아마 효준이가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우선 국내 프로야구도 이제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좋다. 효준이처럼 도전 정신이 강한 친구가 또 나온다면 모를까.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면 한국에 남는 경우가 많을 거다. 그리고 최근 추세상 미국 구단에서 계약금을 많이 주지 않는다. 구단마다 해외 아마추어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 있다. 또 그동안 미국에 진출했던 많은 선수들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비용 대비 효율을 따지기 때문에 아무래도 효준이 같은 대형 선수가 나오지 않는 이상 힘들 거란 생각이 든다."
- 앞으로 어떤 일을 해보고 싶나.
"지금도 몇몇 구단과 함께 외국인 선수를 국내에 데려오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와 파트너십을 맺은 미국 내 회사에 선수들이 300명정도 있다. 좋은 선수들을 계속 데려오면 한국 야구도 발전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 또 국내 선수들이 미국이나 일본에 진출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프로 선수들 중에 해외 진출이 가능한 선수들이 여럿 있다. 또 매니지먼트에 국한되지 않고 게임 개발 등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 에이전트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조언을 한다면.
"에이전트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스캇 보라스를 생각해 일확천금을 손에 쥘 수 있을 거란 착각을 한다. 내 생각엔 야구 선수 출신이 아니라면 외국 에이전시에 들어가 경험부터 쌓으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야구 구단이나 스포츠 용품 회사 등에서 마케팅을 경험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에이전트를 하기 쉽지 않다. 야구에 대한 관심을 늘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