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20년 전 일이다. 1996년 2월 1일, 일본프로야구 12개 구단이 일제히 본격적인 스프링 캠프에 들어가며 한일 양국 언론의 주목을 받은 선수가 두 명 있다.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한 선동열과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조성민이다. 특히 마쓰이 히데키가 보유한 당시 신인 최고액과 똑같은 1억 5000만엔(약 12억 원)을 받고 일본 최고의 명문 구단의 일원이 된 조성민을 향한 주목도는 한층 더 컸다. 194cm의 장신에 150km의 강속구를 던지는 젊은 투수, 게다가 준수한 외모까지. 스타성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고3 때 받은 허리 수술 탓에 병역을 면제 받은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실제로 요미우리의 캠프가 열린 규슈의 미야자키에는 조성민을 취재하려 기자들이 몰려 들었다. 때마침 팀의 에이스인 구와타가 팔꿈치 수술을 받고 일찌감치 시즌 아웃된 것도 조성민에 대한 주목도를 높였다. 한국의 국가대표 투수가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서다. 조성민 역시 “스프링캠프에 사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시작은 그랬다. 희망에 가득찼고, 행복했다. 아마 그땐 몰랐을 것이다. 마침표가 슬픔이란 잉크로 찍힐 줄은. 조성민이 거인의 유니폼을 입고 날갯짓을 시작한 20년 전 이맘때를 회상해 봤다.
조성민은 일찌감치 핫한 선수였다. 고려대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1995년 1월 당시, 미국과 일본 등의 스카우트는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냈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이미 접촉을 시도했고, 뉴욕 양키스 역시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쳤다. 당시 양키스의 에이전트인 돈 노무라는 “조성민과 그의 부모를 뉴욕에 초대하고 싶다. 1등석 항공권은 물론 체재비를 모두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성민은 “미국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유가 뭘까.
“신체적으로 우월한 그들과 언어, 음식, 인종 차별 등의 부담을 안고 경쟁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판단했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다가 훗날 메이저에 다시 도전할 수도 있지 않은가? 1994년에 요미우리와 주니치의 시리즈를 봤다. 구와다(당시 요미우리 에이스)의 투구를 보고 ‘저 정도면 자신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요미우리에서 전성기 시절의 조성민이 보여준 투구폼> 요미우리에서>
일본 야구 역시 조성민에게 적극적이었다. 1995년 8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에서 그를 보기 위해 현지 취재진과 스카우트가 대거 몰려 들었다. 특히 조성민이 선발로 나온 같은 달 30일 쿠바전이 압권이었다. 요미우리는 무려 8명의 스카우트진을 보내 그의 공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한국팀의 더그아웃에까지 내려와 질문을 퍼부을 정도였다. 결국 조성민은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는다. 같은 해 10월 12일에 생긴 사건이다.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등 구단 수뇌부를 비롯해 100여 명의 취재진이 모인 이 자리에서 조성민은 “이번 가을 캠프부터 전력을 다해 내년에 선발로 올라 서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요미우리가 조성민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하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프로야구 규약에 따르면 외국인은 신인왕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거인 구단은 조성민을 신인왕에 등극시키기 위해 이 규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3년 이후 맥이 끊긴 요미우리의 신인왕 계보를 이을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말로 끝난 게 아니다. 위원회에 규정 개정안을 제출하는 등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고.
그런 노력이 유효화 되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다. 조성민은 데뷔 시즌인 1996년을 통째로 2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구속은 150km가 훌쩍 넘었지만 경험 부족이 문제였다. 그렇게 1년하고도 6개월을 더 2군에서 묵묵히 견뎠다. 마침내 1997년 7월 3일, 고대하던 1군 합류 통보를 받는다. 2군에서 4승을 올리는 등 최근 4경기에서 평균자책점 0.35를 기록한 덕이다. 사흘 후 한신 타이거즈와 원정경기에서 8회에 등판해 2이닝 동안 1실점하며 역사적인 데뷔전을 치른다.
조성민의 데뷔시즌 성적은 1승 2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9. 22경기에 등판해 28이닝을 소화하며 얻어낸 기록이다. 홈런은 1개를 허용했고, 삼진은 서른 개를 잡아냈다. 외국인 선수의 신인왕 자격이 허용됐다 하더라도 수상은 힘든 성적이긴 하다. 그러나 기회는 있었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 규약에 따르면 입단 5년 이내의 투수가 30이닝 이하를 던질 때 신인왕 자격이 있다. 충분히 이듬 해를 기약하기엔 충분한 결과물이다.
1년 뒤, 성장한 조성민은 승승장구했다. 시범경기에서 7차례 등판해 난타 당하며 평균자책점이 7.88까지 치솟았지만 조성민은 흔들림이 없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구속도 올라가고 경기 감각도 좋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해 4월 8일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선발로 나온 조성민은 7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내며 일본 진출 후 첫 선발승을 따냈다. 라이벌이자 ’92 학번’ 동기생인 박찬호가 그날 새벽에 승전보를 알린 날이기도 했다.
세 번째 등판인 같은 달 27일엔 8이닝 1자책점으로 잘 던져 2승을 챙겼다. 21이닝 동안 단 5점만을 내주며 평균자책점 2.14를 기록할 정도로 조성민은 압도적이었다. 날이 갈수록 조성민의 구위는 날카로워졌고, 그만큼 신인왕도 가까워졌다. 5월 2일 야쿠르트전엔 13개의 삼진을 빼앗으며 완봉승을 거뒀다. 당시까지 조성민은 센트럴리그 투수 주요 부문에서 탈삼진 1위(35개), 다승 2위, 평균자책점(1.50) 4위 등 상위권에 올랐다.
4승은 완투승으로 장식했다. 5월 9일 주니치전 9이닝 1실점. 조성민은 시즌 개막이 두 달이 채 되지도 않아 5승을 올리며 다승 공동 1위로 올라섰다. 6월 6일 주니치전에서 다시 완봉승을 거두며 6승, 다승 선두 점령. 6월 13일 야쿠르트전에서 또다시 완봉승을 기록했다. 게다가 이번엔 무볼넷이다. 7승. 시즌 세 번째 완봉승이자, 다섯 번째 완투승이다. 18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은 계속 됐고 평균자책점은 1.84까지 떨어졌다. 신인왕 뿐이더냐. 시즌 MVP까지 노려볼 만한 성적이다. 조성민은 “지금 컨디션이면 15승 이상은 올린다”고 말했다. 전반기 최종 성적은 7승 5패 평균자책점 1.99.
인기까지 덩달아 상승했다. 조성민은 센트럴리그 올스타 팬투표 투수부문 중간 순위에서 4만표를 넘게 받으며 1위에 등극한다. 7월 23일 지바에서 열린 올스타전 2차전에서 센트럴리그의 다섯 번째 투수로 등판한 조성민은 당대 최고의 타자 스즈키 이치로(당시 오릭스)를 범타로 처리하는 등 2이닝 무실점으로 호투를 펼쳤다. 경기 후 “즐거웠다”고 소감을 표현한 조성민.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올스타전 투구 도중 오른쪽 팔꿈치 안쪽 근육에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결국 나흘 후 올시즌 처음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다.
재활, 재활, 재활. 조성민은 묵묵히 하루에 40~50개의 연습구를 던지며 부활을 노렸다. 그는 “어떻게든 10승에 도전하고 싶다”고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3승만 더하면 되니 무리한 목표도 아니었다. 꿈은 내년을 기약해야 했다. 다시 승수를 올리지 못하며 그대로 시즌 마무리. 최종성적은 7승 6패 평균자책점 2.75. 전반기의 무서운 흐름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성적이다.
여기까지가 20년전 오늘부터 시작해 2년간 이어져 온 조성민의 전성기다. 조성민은 한때지만 일본에서 신인왕과 시즌 MVP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선수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한국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투수였다. 2011년부터는 두산의 재활 코치로 새출발을 하기도 했다. 또한 단신 기사 하나 없이 지나갔지만, 지난 달 6일은 그의 3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