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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갓모닝] 513. 동서양의 영혼 교감
1774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790년 국회의 동의를 얻어 워싱턴 D.C는 미국의 수도로 지정돼 철저한 계획도시로 건설된다. 워싱턴 D.C는 백악관과 워싱턴 공원을 중심으로 방사성으로 설계됐고 도로는 바둑판 형태로 교차하는 형태를 갖고 있다.
워싱턴 D.C의 정신은 자유와 평등이다. 이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워싱턴 공원에는 내셔널몰과 오벨리스크형태의 워싱턴기념탑이 서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연설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한마디로 워싱턴 D.C는 미국의 축소판이자 미국의 정신 그 자체인 것이다.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 조선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시작됐다. 1776년 왕으로 등극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사망한 뒤 숱한 암살 위협을 견뎌냈다. 세자 시절에는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던 할아버지 영조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자세로 책무를 다했다.
타고난 리더십을 갖췄던 정조는 즉위한 뒤 바로 정적들을 제거했고 안정된 정치기반 하에 자신의 세력인 규장각을 키워나갔다. 그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같은 서얼 출신의 학자들을 대거 등용했다. 대단한 독서광이었던 그는 청나라의 신문물을 익히기 위해 규장각 신하들을 보내 상해 유리창 거리에서 몇 수레에 가까운 책들을 구입, 조선까지 운반토록 했다.
그의 가장 큰 치적 중 하나는 수원 화성 건설이다. 정조는 자신의 개혁 정치의 결실을 수원 화성에서 얻고자 했다. 정약용 등 아끼는 인재들을 수원 화성 건설에 투입했다. 화성은 사도세자의 묘와 가까워, 정조는 효도를 이유로 자주 화성에 행차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유별난(?) 효도를 핵심으로 한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건설됐다. 화성은 1794년 1월에 시작돼 1796년 9월 초에 완공됐는데, 약 2년 9개월 만이었다. 이 모두가 인본주의 사상에 의거, 모든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과거 국가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이 무임금으로 노동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구상한대로 완벽한 도시였다. 산과 성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군사도시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한양으로 가는 모든 물류가 수원으로 집결해 유통, 상업도시로도 훌륭했다. 정조는 수원을 완벽한 자급자족 도시로 만들고자 저수지를 만들고 새로운 농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원 화성의 개혁은 정조의 급사로 중단되고 말았다.
1790년 자유, 평등 정신으로 건설된 미국의 워싱턴 D.C와 1794년 인본주의 사상이 바탕이 된 수원 화성은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아있다. 특히 워싱턴의 한자음표기가 ‘화성돈’이란 사실도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없다. 이는 동서양의 영혼이 교감한 증거가 아닐까한다.
1889년 13세의 소년 파블로 카잘스에 의해 헌 책방에서 발견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의 음악형식은 우리나라의 산조와 흡사하다. 탄생 시기도 서로 거의 비슷하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또한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만 치부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동서양의 영혼은 끊임없이 교감되고 있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