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때 우는 건 삼류다. 힘들 때 참는 건 이류다. 힘들 때 웃는 건 일류다. 그래서 나는 웃는다.'
산전수전 다 겪은 탓일까. 모든 질문에 솔직하지만 진지했다. Mnet '음악의 신2'에서 봤던 모습과 180도 달랐다. TV밖 이상민에게서 예능감은 없었다.
이상민(43)은 1990년대 가요계를 군림했던 최고의 그룹 룰라의 리더였다. 1994년 '100일째 만남'으로 가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95년 발매한 '날개 잃은 천사'는 167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헬기를 타고 행사장을 다닐 정도였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중 1995년 12월 굴곡진 인생의 서막이 열렸다. 3집 '천상유애'가 표절 논란에 휘말리며 하락세를 걸었다. 프로듀서로 전향 후 인생 그래프가 상향 곡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오래가지 않았다. 이혼과 사기 혐의,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 혐의 등 불행이 그를 집어 삼켰다. 69억원(이자 포함)이라는 어마어마한 빚까지 짊어졌다. 지상파 출연 금지를 당하며 일자리까지 잃었다. 하지만 이상민은 파산 절차를 밟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채권자에 대한 예의라고 말했다.
이상민은 Mnet '음악의 신 시즌1(이하 '음신1')'에서 복귀 신호탄을 쐈다. 이어 tvN '더 지니어스' JTBC '아는 형님' '음악의 신 시즌2(이하 '음신2')'로 대중들에게 이상민이 살아있음을 알렸고, 지상파에도 복귀해 마치 한을 풀듯 입담을 선보였다.
이상민은 셀프 디스도 마다치 않았고, 그것을 웃음으로 녹여냈다. 시청자들은 좌절에 꺾이지 않고 일어선 그를 '성실함'의 대명사, '멘탈의 승리' '희망의 아이콘'으로 불렀다. 이에 그는 "대리운전이나 발렛 해주는 분이 저보면서 용기를 얻는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 감사해요"라고 얘기했다. 이때 마침 문자가 왔다며 보기 무섭다고 말한 뒤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효효효효효'
- 가수 꿈은 언제부터 가졌나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가수의 꿈을 키웠어요. 룰라의 채리나가 동네 후배인데 동네에서 워낙 유명했어요. 춤추고 옷 잘 입기로 소문났죠. 춤과 음악을 좋아하는데 가수의 꿈을 안 가질 수 없잖아요. 소방차, 박남정에 이어 현진영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댄스 가수의 전성시대가 열렸어요. 힙합 장르가 생기고 서태지, 듀스가 나오면서 나이트에서 춤추기 좋아하는 사람이 가수로 데뷔를 했죠."
- 그렇게 룰라까지 이어졌나요. "종착역이 룰라였죠. 그 전에 데모 테이프 들고 많은 분들을 찾아갔죠. 당시에 김동률·신해철·전람회 등 소속돼 있는 대형 기획사에 들어갔어요. 댄스 가수를 하고 싶다고 욕심을 내다가 결국 다른 회사로 옮겼어요. 나미 매니저가 룰라를 만들었어요."
- 룰라 전성기 시절이 궁금해요. "룰라가 꼭 왔으면 했던 대기업이 있었어요. 근데 이미 정해진 스케줄이 있어서 안 된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취소 위약금 물어주고, 헬기까지 대절 해줬어요. 그 금액을 다 합했더니 1억 원 정도더라고요."
- 이후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죠. "그때 처음으로 PC통신이 활발해졌어요. '천상유애'와 같은 일본 곡이 PC통신을 통해 번져나갔어요. 표절에 대한 시비가 붙게 됐고, 심각하게 대두가 됐어요.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죠."
- 표절이 맞나요. "표절 맞아요. 그때 가수는 제작자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지금처럼 가수가 음악적으로 개입하던 시기가 아니었거든요. 표절을 알고 나서는 정말 힘들었죠. 피해자라고 생각은 안 해요. 음악인으로서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 많은 분들이 '천상유애'를 이상민이 작곡한 걸로 알던데. "'음신2'전까지는 사람들이 제가 '천상유애'를 작곡한 줄 알았어요. 작곡은 4집 때 이현도 형과 작업하면서 미디 음악의 매력에 빠지면서 시작했어요. 5집 때부터 음악을 만들었죠."
- 그 이후 프로듀서로 변신했어요. "책임감이 강한 편이고, 성격이 보수적이에요. 룰라 남자 멤버들이 숨을 못 쉬었을 정도였어요. 술도 못 먹게 하고 밖에도 못 나가게 했어요. 여자 멤버들도 틀 안에서만 살게끔 했어요. 책임감에 익숙하니까 가수보다는 프로듀서로서의 매력에 조금씩 빠지게 된 것 같아요. 이런 식이라면 리더에서 제작자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 프로듀서로서 자신감이 있었나요. "프로듀서를 많이 배출하면 좋은 팀을 많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프로듀서를 더 역량을 키웠어요. 당시 전속 작곡가 6명이 있었고, 작업실과 녹음실을 호환하게 만들었고, 음악적인 의견을 조율하고 교환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죠."
- 사업도 시작했어요. "1999년까지 음반이 시장이 호황을 누리다가 2000년에 접어드니 음악을 공유해 듣는 시대가 오더라고요. 음반 판매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제작자로서 콘텐츠를 다각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사업을 넓혔죠. 레스토랑도 열었어요. 그 당시 나름 최초였죠. 한꺼번에 다섯 개의 사업을 시작했죠."
- 욕심을 부렸네요. "다 나같이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죠. 전 2시간만 자고 일 하지만, 직원들은 정해진 시간만 일했으니까요. 시간과의 싸움이고 버텨야했는데 처음부터 욕심을 부렸죠."
- 빚이 많이 생겼죠. "운칠기삼이라는 게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다섯 개 사업이 다 괜찮은 건 아니었지만 버틸만은 했어요. 문제는 이종격투기 레스토랑인 '김미 파이브'를 동업으로 시작했는데, 동업 형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표이사를 사임하고, 지분까지 포기했어요. 그리고 다른 곳에서 새롭게 2호점을 시작했어요. 근데 1호점에서 사고가 난거죠. 그 사고의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있었어요. '김미 파이브'를 확장하기 위해서 1500평정도 되는 곳에 한국인 최초로 레스토랑을 만들 생각이었죠.."
- 어떤 사고였나요. "미국에서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한국의 '김미 파이브'에서 격투기 선수가 사망한걸 아냐고 묻더라고요. 저와 상관없는 회사였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서 모든 게 다 취소가 됐죠. 당시 대기업에서 무려 120억 해당하는 3개 층을 무상으로 주기로 했어요. 인테리어 50억 원도 대여를 해주겠다고 할 정도였죠. 이런 사건이 없었다면 저는 승승장구 할 수 있었어요."
- 불법 도박사이트를 운영했다는 말도 있었죠. "당시 매형이 불법인지 모르고 운영했던 사이트였어요. 제가 힘들 때 매형이 돈을 보냈줬어요. 1심에서는 무죄를 받았는데, 2심에서 '매형 처남 지간에 2억 1000만원을 줄 수 없다. 배당금을 받았다'며 혐의가 연루 됐어요. 이런 와중에 매형이 2심 재판 중에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 악순환의 연속이었네요. "인생의 흐름 속에 운 때가 있는 것 같아요. SNS에 '1994 2003 2004 2013 영원히'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어요. 1994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하락이 없는 운이었어요. 그 이후 10년간 끝없이 바닥을 치더라고요. 더 이상 저에게 희망이 없다할 정도로 바닥인가 했는데 더 바닥이 있더라고요. 누가 뭐를 기획을 하든 그들이 생각한 거보다 항상 기발하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재기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버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