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프로야구(CPBL)를 소멸시킬 뻔한 승부조작 사건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맹아 단계였 다. 하지만 점점 규모가 커지고 수법이 대담해졌다. 두 차례 승부조작 사건을 겪은 한국프로야구에 시사점을 준다. 일간스포츠는 2014년 대만 고등법원의 판결문을 분석해 CPBL에서 승부조작 사건이 어떤 단계를 밟아 발달했는지를 파악했다.
첫 번째는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한 선수 매수와 포섭이다. 최초로 불거진 1995년 '블랙 타이거스' 사건이 그랬다. CPBL은 1990년 네 팀으로 구성했다. 실업 팀을 모태로 하는 다른 세 팀과는 달리 싼상 타이거스는 다양한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연합군 성격의 팀이었다. 출신 학교별로 파벌이 있었다. 이들 중엔 이른바 '흑도(폭력조직)'와 친분이 있는 선수가 있었다. 유혹과 담합이 쉽게 먹혀들기 쉬운 구조였다. 파벌 중 일부는 승부조작을 시도했고, 중립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당시 CPBL은 큰 실책을 했다. 프로야구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흥행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연맹과 구단은 은폐와 축소에 급급했다. 14명이 연루됐지만 영구제명 같은 중징계는 없었다. 다들 자진은퇴 형식으로 팀을 떠났다. 외국인 선수와 감독은 조용히 계약을 해지했다. 당시 싼상 구단 후원회 비서장인 린치중은 "이 사건을 공개적으로 키우지 말고, 팬들도 거론하지 말자"는 성명을 냈다.
은폐의 결과는 이듬해인 1996년 6월 '블랙 이글스' 사건으로 발전했다. 승부조작의 두 번째 단계다. 외부 세력이 직접 개입한 것이다. 흑도는 선수 등 프로야구 관계자들을 위협하거나 향응을 제공하는 수법으로 포섭했다. 그리고 승부조작을 지시한 뒤 불법 도박에서 베팅을 해 큰 수익을 얻었다. 대만 검찰은 전해 터진 '블랙 타이거스' 사건 종결 뒤에도 계속 추적을 했다. 다른 줄기를 파헤치다보니 수십 명의 전·현직 선수가 걸려 들었다.
한국 실업야구에서 활약했던 쉬성밍(서생명)은 당시 웨이취안 드래건스 감독이었다. 흑도는 승부조작 협박이 통하자 않자 백주대낮에 흉기로 테러를 가했다. 39명의 전·현직 선수와 조직원이 검거됐고, 2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명이 연루된 스바오 이글스는 팀 해체를 결정했다. 팬들도 등을 돌렸다. 이해 CPBL 총관중은 136만 명. 이듬해엔 55.1%가 줄어든 68만 명이었다. 관중 감소는 계속돼 2000년 총 관중 수는 30만 명 수준이었다.
이 사건 이후 대만프로야구에는 한동안 승부조작 사건이 불거지지 않았다. 하지만 CPBL과 구단은 여전히 적극적인 예방 조치를 하지 못했다. 곪은 상처를 서둘러 봉합했지만, 속으론 썩어들어갔다. 결국 2005년 '블랙 베어스' 사건이 터진다.
총 22명이 체포됐고, 라뉴 베어스 소속 선수가 9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 사건은 본격적으로 '중개인'이 등장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1990년대 두 차례 사건은 폭력조직이 직접 선수와 접촉했다. 그만큼 사법처벌 위험도가 높았다. 조직은 뒤에 숨고 전직 선수 출신 중개인이 포섭을 맡았다. 승부조작의 세 번째 단계다. 물론, 과거에도 전직 선수가 포섭에 나섰지만, 규모가 작았다. '블랙 베어스' 사건에선 무려 중개인 한 명이 두 자릿수 선수를 포섭했다.
2007년 '블랙 웨일스' 사건은 양상은 '블랙 베어스' 사건과 비슷했다. 차이라면 지방 토착 정치인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타이난현 의회 의장을 지낸 우지엔바오가 이 사건에 연루됐다. 흑도 조직은 약 856만 위안(약 3억원)의 수익을 올렸고, 우지엔바오는 자금줄로 지목됐다. 그는 징역 2년과 벌금 22만 위안 선고를 받았다. 승부조작은 쉽게 돈을 버는 방식이다. 검은 돈은 권력자까지 조직의 비호자로 만들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연루 선수가 많았던 중신 웨일스 구단은 해체를 발표했다.
이듬해 발발한 '블랙 미디어' 사건은 승부조작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줬다. 폭력조직이 직접 구단을 운영한 사례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다. 디미디어 티렉스는 2008년 청타이 코브라스를 인수해 창단한 구단이다. 하지만 첫 시즌부터 운영난에 시달렸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린방원은 구단주에게 자금을 빌려준 뒤 구단주를 압박해 조직원을 구단에 심었다. 주로 경리 부서에 조직원이 배치됐고, 구단 관리 책임자는 린방원의 동생인 린지아칭이 맡았다.
이들은 주도적으로 코칭스태프와 선수를 협박해 고의로 경기에 지게 했다. 그리고 지하도박장에서 그 경기 결과에 베팅해 거액을 벌어들였다. 조직은 시즌 중에 외부에서 코치를 영입한 뒤 그를 중개자로 삼는 수법을 썼다. 총 16명 선수가 연루됐고, 구단 관계자 8명이 체포됐다. 단장급과 사장 비서도 포함됐다. 이해 8월 CPBL은 디미디어 구단을 제명 처분했다. 주모자 린방원의 지인 중에 차이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이듬해 터진 '블랙 엘리펀츠' 사건의 주모자였다. 이 사건은 총 59명이 연루된 대만 프로야구 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 중 52명이 팀을 떠났다.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아직 CPBL에선 승부조작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2012·2016년 발생한 KBO리그의 승부조작 사건은 대만으로 따지면 1단계와 2단계의 중간 쯤에 있다. 2014년 사건은 2012년에 비해 조작 수법이 다양해지고 사례금도 커졌다. 전직 선수가 브로커로 활동했다.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에서 폭력조직이 본격적으로 개입했다는 내용은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이라면 어떨까. 불법스포츠도박은 돈이 된다. 알려진 주모자들 뒤에 누군가가 숨어있지는 않을까. 일간스포츠 취재에 응한 대만의 선수 출신 '중개자'는 이렇게 말했다. "승부조작은 점조직 방식으로 이뤄진다. 배후를 잡지 못하면 전모를 알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