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중이 작아도 감독에 대한 믿음이 더 컸다. 난 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몇 개월을 서울과 경주를 오가며 '배움'에 임했다. 그리고 그것을 즐겼다. 이쯤되면 공부를 하기 위해 그 핑계로 작품과 캐릭터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배우 유준상(48)의 강점이자 능력이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죽어라 일하는' 유준상은 스스로 "육아에도 재능이 있는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배우로서 뮤지컬, 드라마, 영화 등 장르를 막론하고 종횡무진하는 것은 물론 100점짜리 아빠가 되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언제 봐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비주얼과 입담이 매력적인 유준상이 강우석 감독의 스무번째 작품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강우석 감독)의 흥선대원군을 통해 스크린에 돌아왔다.
※인터뷰 ②에서 이어집니다.
-뮤지컬부터 영화까지 쉴틈없이 일하고 있다.
"죽어라 일만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직업이 배우이기 때문에 어디서나 좋은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나'라는 고민도 많이 한다. 개인적으로 어른들과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 70대 넘은 인생 선배 분들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럼 떨어지는 낙엽을 봐도 새롭게 보인다."
-너무 많은 일이 스트레스가 될 때도 있지 않나.
"힘들다. 죽을만큼 힘들다. 끊임없이 무대에 서는 일 만큼 힘든 일이 없다. 어마어마한 대본을 외워야 하고 단순히 외우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관객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한 번이라도 어긋나면 끝이다. 그 떨림 만큼 힘든 것이 없다. 근데 요즘엔 그 떨림을 기본 좋게 받아들이고 있다."
-극복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
"반복하는 수 밖에는 없다. 그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반복하는것 만큼 귀찮은 일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20년 넘게 하고 있다. 20년이 지나니까 미세하게 좋아진 부분들이 보이더라. 끊임없는 반복 훈련만이 살아남는 지름길인 것 같다. 편법을 모르는 나는 그렇다."
-젊은 배우들과의 경쟁이 힘들지는 않나.
"상대 배역들이 많게는 20살 넘게 차이가 난다. '그날들'만 봐도 내 친구들이 이홍기 지창욱 오종혁 등 젊은 배우들이다. 그래도 '친구'라고 설정됐으니까 믿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를 믿어야 관객들을 믿게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을 할 때는 상대 여배우가 띠띠동갑이었다. 힘들다기 보다는 오히려 고맙다.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계속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 같다."
-현장에서도 먼저 후배들,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는 선배라고.
"찾아다니면서 인사한다. 보통은 찾아오는데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고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인사를 할 수는 없다. 100명이 있다면 100명 모두가 와서 인사하는 것은 아니니까.(웃음) 그럼 인사를 못하고 공연을 시작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는데 그건 좀 별로다. 그래서 조명실부터 쭉 돈다. 분위기를 업 시키는데도 나쁘지 않은 방법 같다. 촬영장에서도 똑같다. 어딜가든 '파이팅' 한다."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인가.
"어쩔 수 없는 나이? 하하. 어제도 공연을 두 번이나 했다. 무릎도 아프고 너무 힘들다. 적은 나이는 아니기 때문에 하루에 5시간씩 에너지를 쏟는 것이 별코 쉽지는 않다. 그래서 내년에는 공연을 하루에 한 번씩만 할 생각이다. 힘든 만큼 얻어지는 것들이 있지만 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에너지의 양은 이만큼인데 과욕을 부리면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게 되는 것 아니냐.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보내는 것도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는 언제 그런 감정을 느꼈나.
"공연을 하고 있는 순간 순간에도 느낀다. 함께 하는 배우들에게 '얘들아 난 좀 힘들어. 내일 모레 50이야. 그 만큼 뛸 수가 없어'라고 말하거나 '막 대하는 것은 좋은데 대신 세게만 때리지 마. 담 올 것 같아'라는 부탁도 한다. 미안하지만 양해를 구한다."
-공연 스케줄 때문에 좋은 드라마나 영화를 놓치는 배우들도 있다고 하더라. 그런 적은 없었나.
"운이 좋게도 놓쳤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병행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배려한 좋은 역할들이 많이 들어왔다. 감사하다. 말 마따나 공연은 6개월, 1년 전 스케줄이 미리 잡힌다. 그 시기를 피해 드라마나 영화를 해야 하는데 그 쪽 입장에서는 마냥 좋지만은 않은 시스템이다. 배우를 마냥 맞춰줄 수는 없으니까. 때문에 배려를 해주면 무조건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무대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까.
"너무 힘들게 해왔기 때문에 놓을 수 없다. 하루 이틀 했다면 포기라도 쉽게 하겠지만 어느새 20년이다. 그 시간을 속일 수는 없다. 무대 위에 서 있는 나는 나에게 너무 중요하다. 나를 필요로 하고 내 몫이 있다면 계속 하고 싶다. 아직까지는 몸이 움직인다."
-가수 제이앤조이 앨범 활동도 꾸준히 하는 것인가.
"아무렴. 틈날 때마다 작사·작곡을 하고 있다. 공연·연기 만큼 음악이 너무 좋다. 단순히 끝내면 나와의 약속에서 또 어긋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저러다 말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싫다. 내 성격이 원래 아닌 것은 바로 접는데 맞는다 싶은 것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포기가 빠르지만 끈기도 있다.(웃음)"
-음악 작업이 연기 활동을 하는데도 도움이 되나?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 표현되는 이유가 편집의 향방에 따라 작품의 분이위기와 색깔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 아니냐. 음악도 편곡이 엄청 중요하다. 그 만큼 어렵다. 편곡을 하면서 연주자들과 한 곡을 만들어 나가는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것들을 얻는다. 그리고 뮤지컬을 하려면 어차피 노래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앨범 만큼 좋은 레슨이 없다. 좋은 감성을 유지할 때도 음악을 듣는 것 만큼 좋은 것이 없더라."
-반 여행가이기도 하다.
"여행을 해도 좀 힘들게 다니는 편이다. 편한 것만 하다 보면 몸이 편한 것만 받아들인다. 힘든 것을 하면 그 만큼 힘든 것을 받아들이니까 계속 움직이게 되는 것 같다. 여행을 가면 꼭 일지를 쓰는데 그런 메모에 내 인생이 다 담기는 것 같아 좋다. 공연을 할 때도 1막이 끝나면 대본에 글을 쓴다. 오늘 컨디션은 어떻고 날씨는 어떻고. 이런 인터뷰도 꾸준히 다시 읽는다. 그 시점에 내 생각이 담겨 있으니까."
-스스로 '육아대디'라 자부하는가.
"와이프는 워킹맘이고 내가 육아대디다. 아이들 보는 것이 체질에 맞는다. 챙겨줘야 할 시기에 못 챙겨주면 후회를 한다고 하더라. 할 수 있는 것을 못해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아이들은 아직 내 노력을 모른다. 이곳 저곳을 데리고 다니면 '아빠 또 가요? 그만 가면 안 돼요?'라고 투정을 부리는데 그럴 수는 없다. 육아를 통해 나 역시 발전하는 것 같다."
-저예산 영화를 통해서도 또 볼 수 있을까?
"작은 영화는 예산만 적다 뿐이지 이야기는 풍부하다. 상업영화는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 만큼 보는 재미가 있지만 세상 모든 이야기를 상업 영화를 통해서만 볼 수는 없다. 단 몇 명이 보더라도 그 분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라면 필요한 영화라 생각하고 그런 영화를 안 할 이유는 없다. 나에게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좋은 이야기, 좋은 작품을 보여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