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55) 감독이 변했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던 사나운 눈빛이 유해졌고 또 유연해졌다. "증오해서 뭐하나요. 사람 미워하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네요"라며 껄껄 미소짓는 표정이 곧 김기덕 감독의 변화를 말해준다.
작품 분위기도 달라졌다. 신작 '그물'은 김기덕 감독의 이름을 달고 15세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류승완 감독의 추천을 받아 두문불출 해외 체류중인 류승범을 주인공으로 낙점, 남북한의 이념 대립을 소재로 저예산 영화를 최대한 상업적으로 풀어냈다.
준비 중이었던 400억대 한중합작 영화 '무신'은 여러 이유로 물건너 갔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김기덕 감독은 여전히 건재하다. 삶의 밑바닥부터 수면 위의 모습까지 무엇이든 '영화로 말하는' 김기덕 감독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인터뷰 ①에서 이어집니다.
-류승범만 전형적이지 않고 다른 캐릭터는 모두 전형적이다.
"이미 알고 있거나 상상한 그대로 표현했다. 전형적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을 굳이 창조적으로 특별한 캐릭터처럼 새롭게 만든다는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를 흐트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말이 쉽지 영화를 하다 보면 한 명의 캐릭터도 입체적으로 만들어 내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내 무능일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류승범에 집중해 주길 바랐다." -단순한 북한어부가 아니라 특수부대 설정까지 넣은 이유가 있나.
"북한이라는 특수성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군대 생활을 한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국방의 의무를 지킨다. 철우를 간첩으로 의심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의심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생각했다.
무엇보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 극화된 인물이다 보니 조금 더 과장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이야기를 꾸며낸 것은 아니다.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픽션이니까 살짝 빌렸다. 존재하는 한 개인의 실화를 다뤘다면 달랐겠지."
-류승범과의 호흡은 어땠나.
"사실 난 현장에서 늘 시간에 쫓긴다. 오전 7시에 모이면 밥 먹고 8시부터 촬영에 돌입한다. 하루에 10신 정도를 찍어야 하는데 내가 잠을 자야 해서 밤을 새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촬영할 때 엄청 빠른 속도로 찍는다.
어느 날 승범 씨가 그러더라. '감독님. 내가 잘해보려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냥 감독님이 하라는대로 하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아마 많이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감독 본인의 실화가 투영됐다고.
"김영민 안에 내가 있다. 우리 아버지도 6.25 전쟁에 참전했고 포로가 돼 총알 4발을 맞으셨다. 고문도 엄청 당해서 평생 병상에만 계시다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봤고 아버지의 분노와 공포가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됐다. 그래서 아버지를 늘 두려워 했다."
-아버지로 인해 복수심과 적대감도 커지던가?
"아버지는 한 인간으로서 자기 꿈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빨갱이, 빨갱이' 입에 달고 사셨지. '빨갱이는 절대 믿지 말라고 당신이 받은 고통을 우리에게 각인 시켜줬다. '수취인불명'을 보면 마당에서 시체가 나오는 장면이 있지 않나. 실제 우리 집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적대감이 커지면서 해병대에 갔고 빨갱이는 정말 죽여야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하고 살았다. 제대하고 감독이 되면서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극중 등장하는 인형에서 영어 노래가 흘러나온다. 의도한 것인가?
"그건 아니다. 소품팀에서 여러 디자인을 보여줬는데 그 인형이 귀여웠고 선택했더니 우연찮게도 영어로 된 동요가 나오더라.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봤다. 한국 사회는 미국과는 연결짓지 않고는 살 수 없고 영향권 안에 있는 것도 맞으니까. 입체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중국 간첩 서류조작이나 죽음 등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인가.
"빌려오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싶었고 진짜 그대로 갖고 오기에는 어려운 지점도 있었다. 진짜 간첩을 찾기 위해 애쓴 분들도 있지만 지나친 애국심과 성과주의에 빠져 없는 것도 만들어 내는 시절이 있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간첩 소재를 등장시켰다."
-명동신은 너무 현실적이라 무섭기도 했다.
"그 동안 영화를 하면서 명동 촬영분량이 4번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요즘엔 곳곳에 쇼핑센터가 만들어졌지만 과거엔 화신백화점 등 메인 거리가 있었다. 뭐 지금도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은 명동이라고 하니까. 그 곳에 가면 엑스트라 없이도 찍을 수 있어 좋다."
-류승범을 다 알아보지 않았을까?
"일부 엑스트라들이 류승범을 둘러싸게 해서 찍었다. 상업적인 장소를 보지 않으려 하지만 트릭에 의해 결국 눈을 뜬다. 찍을 때도 너무 슬펐고 편집할 때도 슬펐다. 자기 의지대로 살아온 사람을 옆에서 괜히 건드리는 것 아니냐. 외부 체재에 대한 공포는 지금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성욕이 사라진 에피소드를 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초반에는 건강하게 정사를 한 후 떠나지만 남한과 북한에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은 후에는 발기가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의 의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식탐과 성욕, 수면욕은 인간이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근데 잠도 못자고 음식도 잘 못먹고 아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것이다. 정신적 죽음 이후 육체도 폐허가 된 상태, 철저하게 짓밟히면 사람도 장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