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은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15년 만에 우승했다. 정규시즌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준플레이오프부터 한국시리즈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가 역전 우승을 했다. 그동안 팀 리빌딩도 '이기면서' 해온 두산이다. 선수들은 포스트시즌에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직접 경험하면서 익혀왔다. 그런 두산이 우승이라는 고비까지 넘었다. 자연스럽게 올해는 "한국시리즈 우승 효과가 그라운드에서도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또 다른 우승 후보 NC와 함께 '2강'을 형성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결과는 그 이상이었다. 강력한 정규시즌 우승 후보였지만, 역대 한 시즌 최다승(93승)까지 기록할 줄은 몰랐다. 한국시리즈 2연패는 예상했지만, 4전 전승으로 NC를 완벽하게 제압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두산은 더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강했다. 이제 많은 야구 전문가들은 "두산의 '왕조'가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장원준-유희관의 30승 합작
두산은 FA 왼손 투수 장원준과 4년 84억원에 계약한 이후 한국시리즈 2연패에 성공했다. 좀처럼 선수에게 큰 돈을 쓰지 않았던 두산이 모처럼 결심한 '통 큰 투자였다. 지난해 12승을 올린 장원준은 올해 데뷔 후 두 번째로 15승 투수가 됐다. 정규시즌은 물론 한국시리즈에서도 완벽한 피칭으로 우승에 큰 힘을 보탰다. '우승 청부사'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활약이었다.
장원준의 영입은 또 다른 선수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왼손 에이스 역할을 해온 유희관이다. 터줏대감 유희관은 왼손 투수가 귀했던 두산에 모처럼 나타난 '보물'이었다. 두산 왼손 선발 투수의 역사를 모조리 바꿔가고 있었다. 이전까지 1승도 없던 투수가 2013년 10승으로 두각을 나타내더니, 지난해에는 18승까지 달성했다. 올해 역시 15승을 올리면서 '판타스틱 4'의 역사를 함께 했다.
비슷한 또래의 정상급 왼손 투수 둘이 서로 선의의 경쟁을 펼친 결과물이다. 두산은 이 환상적인 조합을 지켜보며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김태형 감독 재계약
김태형 감독은 2015시즌을 앞두고 두산의 새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신임 감독이라 계약 기간은 2년이었다. 취임 직후 "나는 앞으로 '어떤 리더십'이라는 수식어는 다 필요 없다. 그냥 '우승 감독님' 소리 하나 듣고 싶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말이 이렇게까지 빨리 이뤄질 줄은 몰랐다. 김 감독은 부임 첫 해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역대 3번째 감독으로 기록됐다. 그토록 '우승'을 염원했던 두산의 꿈을 이뤄준 사령탑. 올해 두산의 성적이 갑자기 고꾸러지지 않는 한, 재계약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두산은 시즌 초반부터 선두로 치고 나갔다. 전반기가 끝났을 때 이미 다른 팀과의 격차가 많이 벌어져 있었다. 두산은 후반기 시작을 앞두고 일찌감치 김 감독과의 재계약을 확정 발표했다. 다만 계약 기간과 금액 발표는 시즌이 모두 끝난 뒤로 미뤘다. 포스트시즌 결과가 김 감독의 계약 조건을 좌지우지할 터였다. 그리고 결과는 최상이었다. 4전 전승으로 우승. 김 감독은 3년 총액 20억원에 사인해 역대 두산 감독 최고액을 받게 됐다.
◇이럴 줄 몰랐다
김현수 공백 없었다
우승 후보로 꼽혔던 두산이지만, 개막 전 전력은 지난해보다 약해 보였다. 단 한 명, 김현수의 공백 탓이다. 김현수는 2008년 최연소 타격왕에 오른 이후 줄곧 두산의 중심 타선을 지켜왔다. 그러나 지난 시즌을 끝으로 FA 자격을 얻어 메이저리그 볼티모어로 이적했다. 그 공백은 지금까지 두산을 떠난 그 어떤 선수의 빈 자리보다 커 보였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 않았다.
김재환과 오재일이 각각 37홈런과 27홈런을 때려내며 숨겨뒀던 타격 재능을 폭발시켰다. 박건우 역시 데뷔 첫 20홈런 고지를 밟으면서 공격과 수비에서 제 몫을 했다. 세 선수 모두 지난해까지는 풀타임을 뛰어본 적이 없다. 약속이라도 한 듯 올해 최고의 성적을 냈다. 백업 선수들 역시 출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존재감을 뽐냈다. '화수분 야구'의 진면목을 과시한 한 해였다. 두산 주장 김재호는 "김현수가 떠난 뒤 그 공백을 어떻게 메울까 다들 많이 걱정을 했는데, 선수들 모두가 힘을 합쳐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데 대해 뿌듯함을 느낀다"고 했다.
니퍼트-보우덴 40승 합작
외국인 투수 덕을 이렇게까지 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터다. 지난해 정규시즌에 외국인 투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기에 더 그랬다. 부동의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는 이런저런 부상에 시달리다 처음으로 10승도 못 하고 시즌을 마쳤다. 나머지 한 자리는 더 심했다. 유네스키 마야가 중도 퇴출됐고, 대체 외국인 앤서니 스와잭도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는 지난해 쌓인 한을 한꺼번에 풀고도 남았다. 외국인 투수 두 명이 역대 최다인 40승을 합작했다.
니퍼트에 대한 유일한 불안 요소는 '건강'이었다. 지난해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으로 재계약에 성공했지만, 나이가 적지 않은 투수라 개막 전부터 부상에 대한 염려가 끊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기우였다. 니퍼트는 올해 역대 외국인 최다승 타이인 22승을 올렸다. 리그 전체에서 유일한 2점대 방어율(2.95)을 기록했다. 정규시즌 MVP까지 선정됐다.
한국 야구를 처음 경험하는 보우덴은 더 변수였다. 그러나 우려를 날려 버리고 기대를 뛰어 넘었다. 전 구단을 통틀어 니퍼트 다음으로 많은 18승을 올리면서 탈삼진 타이틀까지 가져갔다.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니퍼트와 보우덴의 호흡은 KBO리그 역사상 최고의 외국인 듀오로 기록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둘은 한국시리즈에서도 나란히 승리를 이끌었다.
정재훈의 고군분투
정재훈은 지난해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 하지 못했다. 2003년 두산에 입단해 2014년까지 12년간 같은 유니폼만 입었다. 그러나 2014년 말 FA 장원준의 보상선수로 지명돼 느닷없이 롯데로 이적했다. 지난해 대부분의 시간을 롯데 2군에서 보냈다. 그 사이 두산의 옛 동료들은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두산은 그런 정재훈을 지난해 말 2차 드래프트 마지막 순번으로 지명했다. 핵심 전력이 돼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투수진의 고참이자 정신적인 리더가 필요했고, 정재훈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선배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정재훈은 '고참'으로서는 물론 '투수'로서 실제 전력에 큰 도움이 됐다. 불펜이 불안정해 늘 타선의 힘으로 지탱해온 두산이다. 정재훈이 돌아온 뒤에 비로소 믿고 내세울 만한 필승 카드가 생겼다. 정재후은 노련한 경기 운영 능력을 앞세워 여러 차례 타이트한 승리를 지켜냈다. 두산이 시즌 초반 무서운 속도로 승수를 쌓아 올린 비결 가운데 하나다.
정재훈은 시즌 중반을 넘어가면서 과부하 탓에 상승세에 제동이 걸렸다. 8월 3일에는 타구에 팔뚝을 맞아 골절상을 입었고, 한국시리즈 출전을 준비하다 어깨 통증을 느껴 결국 포스트시즌을 뛰지 못했다. 그러나 7월까지 정재훈의 팀 내 공헌도가 어마어마했다는 사실을 동료들이 먼저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