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위에서 펼쳐지는 건 치열한 볼 다툼만이 아니다. '가장 감정적인 스포츠'로 불리는 축구에서는 때로는 관중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오심과 불필요한 신경전, 폭력 사태가 벌어진다. 인종차별 역시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되풀이되는 그라운드의 '악습' 중 하나다.
한동안 잠잠했던 축구계가 또다시 인종차별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피부색은 그 이유에 포함될 수 없다"는 전 메이저리거 피 위 리즈의 말처럼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건 당연한 명제다.
국제축구연맹(FIFA)도 축구계에 만연한 인종차별을 근절하기 위해 2014년부터 "인종차별에 반대한다(Say No to Racism)"는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라운드에서는 아직도 인종차별이 계속되고 있고 상처받는 선수들도 계속 생겨나고 있다.
◇ '문타리 사태'가 불러온 후폭풍
이번에 인종차별 문제가 불거진 곳은 이탈리아 세리에 A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 미드필더 설리 문타리(33·페스카라)는 지난달 30일(한국시간) 이탈리아 칼리아리의 스타디오 산텔리아에서 열린 칼리아리와 원정경기에서 관중들로부터 흑인을 비하하는 욕설을 들었다. 문타리는 욕설을 참고 뛰었으나 점점 더 심해지자 주심에게 다가가 경기 중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심은 오히려 문타리에게 경고를 줬고, 이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문타리는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에 그라운드를 떠났다. 주심은 그의 행동에 다시 한 번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고, 문타리는 경고 누적으로 다음 경기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인종차별을 당해 자진 퇴장한 문타리에게 이탈리아축구협회(FIGC)가 출전 정지의 징계를 내린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 세계 여론이 발칵 뒤집혔다. FIFA와 프로축구선수협회(PFA)는 성명을 통해 문타리에게 행해진 명백한 인종차별 행위에 대해 항의했다. '문타리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자 국제연합(UN)도 나섰다. UN 인권 기구의 제이드 라드 알 후세인 대표는 "문타리의 사건은 UN 인권 사무소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불어넣는다"며 FIFA에 연락해 이 사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결국 세리에 A는 지난 6일 심의위원회를 열고 문타리의 징계를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문타리는 징계 철회 결정이 난 뒤인 지난 9일 영국 공영방송 BBC와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이 도처에서 심해지고 있다. 선수들은 파업을 해서라도 싸워야 한다"며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또 경기장을 떠날 것이다. 다른 선수들도 인종차별을 당한다면 경기장을 떠나라고 권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지아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은 문타리와 만나 이번 일에 대해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하지만 문타리 사건 뒤에도 세리에 A는 또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유벤투스의 수비수 메드히 베나티아가 지난 7일 라이 스포츠와 인터뷰 도중 자신의 조국인 모로코를 비하하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라이 스포츠 측은 곧바로 이 일에 대해 사과했고, 베나티아의 소속팀 유벤투스도 성명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J리그서도 '인종차별' 몸살
이웃 나라 일본 J리그도 인종차별 논란에 몸살을 앓고 있다.
사건은 지난 4일 사이타마스타디움에서 열린 J리그 10라운드 우라와 레즈와 가시마 앤틀러스의 경기 도중 벌어졌다. 공을 빼앗으려던 코로키 신조가 몸싸움 과정에서 가시마의 도이 쇼마(25)를 난폭하게 쓰러뜨려 두 팀 선수들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때 우라와의 수비수 모리와키 료타(31)가 가시마의 오가사와라 미쓰오(38)와 외국인 선수 레오 실바(32·브라질)에게 "입 냄새가 난다"고 폭언을 퍼부었다.
모리와키는 경기 뒤 인터뷰에서 "인종차별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부정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J리그 사무국은 곧바로 징계위원회를 열어 모리와키에게 2경기 출전 정지를 내렸다. 모리와키는 우라와 홈페이지를 통해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어린애 같은 발언이었다고 생각하며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오가사와라 선수에게 불쾌한 기억을 남겼고, 실바 선수에게도 마찬가지의 잘못을 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사과문을 올렸다.
그러나 일본 언론들은 모리와키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비해 징계가 지나치게 가볍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 축구 전문 매체인 '더 월드 매거진'은 "'냄새난다'는 표현이 오가사와라와 실바 둘 중 누구를 향한 것인가가 중요하다. 실바를 향한 말이었다면 인종차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며 "중징계가 아니라 2경기 출전 정지에 그친 것이 '적절'했는지는 앞으로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모리와키에게 "입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은 실바도 분노를 거두지 않았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은 잘못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쳤을 때 그 자리에서 사과를 한다. 그라운드 위에서 잘못한 게 있으면 경기가 끝난 뒤 곧바로 사과하기 마련"이라고 말한 실바는 "징계가 내려진 뒤 나중에 사과하는 건 무의미하다. 모리와키와는 더 이상 깊이 엮이고 싶지 않다"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