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은 4~6일 롯데와 3연전에서 현역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포항구장 그라운드를 밟았다. 이를 기념하듯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4일 경기에서 2회 결승 2점홈런(시즌 15호)과 7회 쐐기 솔로홈런(16호)을 때려 냈다.
이승엽은 '라이언킹'과 '국민타자' 외에 '포항 사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2012년 개장한 삼성의 제2의 홈 포항구장에서 워낙 강해서다. 4일까지 포항구장 37경기에서 타율 0.372, 15홈런, 45타점을 기록했다. 포항구장 통산 홈런 1위뿐 아니라 한 시즌 개인 최다 홈런(2014년 7개) 선수로 기록돼 있다.
이승엽에게 포항구장을 마지막으로 찾은 소감을 물었다. 그는 "예전에는 타격감이 떨어질 때 정말 포항에서 경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추억은 짧지만 강한 기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그에게 행복한 추억을 선사했던 포항구장 명장면 다섯 개를 꼽아 봤다.
◇ 2013년 7월 18일 올스타전
2013년 올스타전은 포항에서 열렸다. 포항구장 개장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승엽은 그해 올스타전 홈런 레이스 결승에서 6개의 대포를 때려 내 나지완(KIA·2개)을 꺾고 우승했다. 생애 첫 홈런 레이스 1위. 올스타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홈런 레이스에서 칠전팔기 끝에 마침내 환하게 웃었다.
그에게 홈런 레이스 우승이 더욱 특별했던 건 아들 은혁(당시 8세)군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승엽이 공식 석상에 아들과 함께 나타난 것은 그날이 처음이다. 아버지의 타구가 포물선을 그리며 외야로 날아가자 아들 은혁군은 물끄러미 쳐다보며 환호했다.
이승엽은 "예전에 좋았을 때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이번 홈런 레이스로 아빠가 최고의 선수였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아빠로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했다. 승부의 세계를 잠시 벗어난 올스타전 축제에서 부자는 한여름 밤의 멋진 추억을 만들었다.
◇ 2014년 5월 21일 롯데전
이승엽은 이날 1-3으로 뒤진 4회 선두 타자로 들어섰다. 상대 선발 장원준(현 두산)을 상대로 추격에 불을 붙이는 솔로홈런을 쳤다. 그리고 5회말, 롯데 벤치는 이승엽의 방망이를 잠시 얕잡아 봤다. 삼성이 3-4로 뒤진 5회말 공격 2사 3루였다. 박석민 타석에서 장원준이 볼카운트 2-0으로 몰리자 고의4구를 지시했다. 다음 타석에 이승엽이 대기 중이었지만, 당시 무서운 타격감을 자랑하던 박석민을 일단 피하자는 계획이었다.
이승엽은 자존심이 걸린 홈런으로 갚아 줬다. 자신의 앞 타자를 고의4구로 거르는 작전은 프로 데뷔 후 처음 당해 보는 경험이었다. 5회 2사 1·3루에서 장원준의 공을 받아쳐 또다시 담장을 넘겼다. 결승 3점홈런. 2003년 6월 22일 대구 SK전 이후 3986일 만의 연타석홈런이었다. 롯데(13개)보다 6개나 안타가 적었던 삼성(7개)은 이승엽의 화끈한 홈런포 두 방에 힘입어 7-5로 이겼다.
다음 날 만난 이승엽은 "오랜만에 연락을 많이 받았다"고 웃으면서 "몰아치기가 돼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그 말도 실제로 이뤄졌다. 22일 경기에서도 4회 결승 솔로홈런을 기록했다. 삼성은 5월 13일 한화전부터 5월 25일 넥센전까지 파죽의 11연승(1무 포함)을 내달렸다. 연승 전 3위였던 삼성은 이 기간 선두로 치고 나간 끝에 통합 4연패를 달성했다.
이승엽 개인에게도 의미가 깊은 홈런이었다. 이승엽은 "2013년(0.253, 13홈런, 69타점)에 부진했지만, 롯데전에서 연타석홈런을 기록한 뒤 쭉 올라갔다"고 회상했다. 21일 롯데전을 앞두고 37경기에서 타율 0.303, 4홈런, 21타점을 기록한 그는 이후 90경기에서 타율 0.310, 28홈런, 80타점을 올렸다. 홈런과 타점 수가 수직 상승했다.
◇ 2014년 6월 29일 한화전
이승엽은 6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했다. 0-0 동점이던 2회 상대 선발 신인 조영우의 2구째 시속 141㎞ 직구를 받아쳤다. 공은 가운데 담장 너머에 떨어졌다. 비거리 130m의 선제 2점홈런(시즌 17호). 이어 4-0으로 앞선 3회 2사 1루에서 윤근영을 상대로 우측 담장을 살짝 넘어가는 쐐기 2점홈런(18호)을 뽑아냈다. 그해 29일까지 포항구장 6경기에서 홈런 6개를 몰아치며 본격적으로 '포항 사나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승엽은 당시 "포항에선 타구 소리가 좋다"며 "고비는 넘기지 않았나 싶다. 연타석홈런과 3연타석홈런(6월 17일 문학 SK전)을 때려 내는 등 경기를 치를수록 좋아지는 느낌"이라고 기뻐했다. 이어 "프로는 성적으로 말해야 한다. 방심하진 않지만 안도감은 조금 든다"며 "욕심을 내지 않되 냉정함을 갖고 경기에 임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 2015년 6월 3일 롯데전
모든 프로야구 팬의 시선이 포항구장으로 쏠렸다. 한국시리즈를 방불케 하는 수많은 취재진이 포항에 모였다. 홈런공을 잡으려는 팬들이 몰리면서 경기 하루 전 외야 관중석(1500개) 티켓부터 모두 팔렸다. 한동안 깨지지 않을 이승엽의 대기록을 앞두고 야구계가 들썩거렸다.
이승엽은 5-0으로 앞선 3회말 상대 선발 구승민의 공을 받아쳐 우측 담장 너머로 날려 보냈다. 이승엽이 KBO 리그에서 때려 낸 통산 400번째 홈런이었다. 타구가 솟아오르는 순간 포항구장이 술렁였고, 공이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모두 환호했다. 동시에 400개의 폭죽이 쉴 새 없이 터졌다. 이승엽의 아버지 이춘광씨와 아내 이송정씨 그리고 두 아들 은혁과 은엽군도 관중석에서 이 장면을 지켜봤다.
전날(2일) 경기에 찾아오지 않았던 이송정씨는 "은혁이가 '아버지가 왠지 오늘 홈런을 칠 것 같다. 꼭 보고 싶다'고 해서 왔는데 잘 온 것 같다"며 기뻐했다. 늘 평정을 유지하는 이승엽도 이날만큼은 감격했다. 경기 뒤 "가족의 힘이다. 400호 홈런을 치는 순간에 좀 뭉클했다. 덤덤할 줄 알았는데 뭔가 울컥 올라오더라. '이제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앞으로 남은 목표를 묻자 "우선 450홈런에 도전하겠다"면서 "2017년까지 현역 생활을 목표로 잡고 있다"고 했다. 이승엽은 지난 5월 21일 대전 한화전에서 개인 통산 450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올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모든 걸 이뤘다.
◇ 2017년 7월 4일 포항 롯데전
현역 마지막 포항 3연전의 첫날, 이승엽은 '포항 사나이'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를 보여 줬다. 0-0으로 맞선 2회 무사 1루에서 상대 선발 송승준의 5구째 시속 143㎞ 직구를 잡아당겨 우측 담장을 넘기는 2점홈런을 쳤다. 시즌 15번째 홈런이었다. 삼성이 4-2로 승리해 이승엽의 홈런은 결승타가 됐다. 2-1로 쫓긴 7회 2사 후 주자 없는 상황에서는 또다시 송승준을 상대로 시속 143㎞ 직구를 받아쳐 쐐기 솔로홈런을 때려 냈다. 만 41세의 이승엽이 20대 초반 후배 구자욱(15개)을 단숨에 제치고 팀 내 홈런 선두로 올라섰다.
포항구장에서 높은 승률을 자랑하는 삼성은 이번 3연전을 앞두고 이승엽의 방망이에 크게 기대했다. 지난달 상승세를 타면서 6월 21일 LG전에서 73일 만의 탈꼴찌에 성공했지만, 지난주 1승5패에 그쳐 다시 좋은 흐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분위기 반전이 필요했던 시점. 그 순간 역시 이승엽의 방망이가 터졌다. 이승엽은 "이번 주 첫 경기가 상당히 중요했다. (홈런 2개를 쳐) 기분이 좋다기보다 팀이 이겨 정말 다행이다"고 웃었다. 마지막까지 포항은 이승엽에게 좋은 기억을 선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