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부터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PS)을 관통하는 특징이 하나 있다. 불펜 야구다. 올 시즌엔 이 특징이 더 심화되고 있다.
지난 21일까지 치러진 메이저리그 PS에서 선발투수가 소화한 경기당 평균 이닝은 4.7이닝에 불과하다. 쉽게 말해 4회 투 아웃이 선발투수의 한계치였다. 선발 평균자책점은 4.06으로 형편없는 수준이 아니다. 평균 4이닝 이상을 책임진 불펜은 평균자책점이 3.84. 성적 자체는 선발투수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각 팀의 감독들은 '경기를 꼭 잡아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인지 불펜을 빠른 타이밍에 가동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역행하는 투수가 있다. 저스틴 벌렌더(휴스턴)다. 벌렌더는 올 시즌 PS에 네 번(선발 세 번·불펜 한 번) 등판해서 모두 승리를 거뒀다. 24⅔이닝을 투구하면서 4실점했다. 볼넷을 6개 내줬지만 삼진은 24개를 잡아냈다. 평균자책점은 1.46에 불과하다. 올해 PS에서 완투한 유일한 투수이기도 하다. 선발투수들이 평균 5이닝도 던지지 못하는 가운데 벌렌더가 가장 적게 던진 이닝은 6이닝(디비전시리즈 1차전)이다. 뉴욕 양키스와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ALCS) 2차전에선 9이닝 동안 투구 수 124개를 기록하면서 완투승을 거뒀다. 실점은 단 1점. 2 대 1의 아슬아슬한 경기 내용이었지만 벌렌더는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볼넷은 1개, 삼진은 13개였다. 그리고 ALCS에서 2승3패로 밀려 시리즈 탈락까지 몰렸을 땐 6차전 선발로 나와 7이닝 무실점 호투로 진정한 에이스의 빛을 발했다. 휴스턴은 6차전과 7차전에서 승리하면서 극적으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기록은 벌렌더의 가치를 말한다. 패할 경우에 시리즈에서 탈락하는 엘리미네이션 경기에서 강하다. 존 스몰츠(당시 애틀랜타) 이후 두 번째로 엘리미네이션 경기에서 3경기 연속 7이닝 이상을 책임졌다. 과거 디트로이트 시절까지 합할 경우 엘리미네이션 경기에서 다섯 차례 선발 등판해 평균자책점 1.21로 최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ALCS까지 PS 통산 11승을 기록해 커트 실링·그레그 매덕스 등과 함께 다승 공동 5위에 올랐고, 탈삼진은 136개로 역대 6위.
올 시즌 PS에선 선발로 3경기 이상 나온 투수 중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있다. 불펜으로 나와 책임진 2⅔이닝을 제외해도 22이닝을 투구해 다나카 마사히로(뉴욕 양키스·20이닝)·클레이튼 커쇼(LA 다저스)·댈러스 카이클(휴스턴·이상 17⅔이닝)을 모두 앞선다. 쉽게 말해서 질적이나 양적이나 벌렌더의 투구는 최근 PS 투수 운용 추세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할 점이 있다. 과연 불펜을 믿고 빠른 타이밍에 불펜을 가동하는 것이 옮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올해 PS 최강 불펜은 다저스다. 불펜 평균자책점이 0.94에 불과하다. 뛰어난 성적을 보이며 타 팀과 확연한 차별화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당장 휴스턴만 하더라도 불펜 평균자책점이 5.70으로 부진하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NLCS)에서 탈락한 지난해 WS 우승팀 시카고 컵스도 불펜 평균자책점이 6.21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내일이 없다는'식의 선발투수를 조기에 강판하거나 불펜의 빠른 투입으로 향후 경기에 어려움을 자초하고 있다.
메이저리그 통계 전문 사이트 '팬그래프닷컴'에 따르면 올 시즌 정규 시즌서 불펜이 승계 주자를 막은 확률은 72%였다. 하지만 PS에선 65%로 확률이 더 떨어졌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정규 시즌보다 PS에서 불펜이 주자들을 더 막아 주지 못한 것이다. 수치를 살펴봐도 그렇다. 정규 시즌에는 경기당 승계 주자가 2.9명에 그쳤다. 하지만 PS에는 아무래도 타자들의 강한 집중력 때문인지 경기당 승계 주자가 무려 4.3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PS에서 이들 승계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는 확률, 즉 불펜의 실패 확률이 37%에 달하게 된다. 이 역시 정규 시즌의 30%보다 7%가 높아진 수치다.
경기의 비중이 정규 시즌과 비교하기 어려운 PS에서는 소수의 정예 불펜이 집중적으로 투입된다. 그러다 보니 경기에 대한 부담감과 피로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주자가 있을 때의 등판과 그렇지 않은 상황에 등판한 성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선발투수의 경우에 주자가 있건 없건 수비무관평균자책점(FIP)이 4.48로 똑같다. 반면 불펜 투수는 주자가 없을 때 등판 시 4.03, 주자가 있을 때는 4.30으로 올라갔다. 특히 경기 후반에 동점 혹은 역전 위협을 받는 상황인 '하이 레버리지(High Leverage)' 상황에서 피출루율은 주자가 없을 때(0.295)보다 있을 때(0.309) 더 올라간다.
아무리 유행에 민감하고 트렌드가 바뀐다고 해도 자신에게 맞는 패션과 어울림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팀이 벌렌더같이 위기에서 팀을 구해 줄 에이스를 보유하고 있진 않다. 하지만 과거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얼마나 많은 팀이 PS에 활용할 선발 4명을 확보하고 시리즈를 치렀을까. 그럼에도 마치 불펜의 이른 투입이 경기를 내 쪽으로 끌고 오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오용될 수 있다.
우리팀에 주어진 능력을 정확히 판단하고 이를 활용하는 것이 진정한 명장일 것이다. 유행을 좇기보다 조금 더 스스로의 개성에 충실한 사람이 더 멋있어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