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중심이었던 ’왕따’는 없었다. 그러나 특정 인물의 ’독단’과 ’개입’은 있었고 코치와 선수간, 선수와 선수간의 ’폭행’도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3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대한빙상경기연맹 특정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특정감사는 2018 평창 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 추월 ’왕따 논란’에서 시작된 빙상연맹의 각종 논란에 대해 국민들의 청원이 쏟아지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약 한 달간의 감사를 통해 빙상연맹의 비정상적인 운영 실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감사의 시발점이었던 왕따 논란 자체는 선수들의 고의가 아닌 읫사소통 문제로 판명됐으나 특정 인물이 연맹 행정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독단적인 역할을 한 사실이 확인됐다. 또한 코치가 선수를, 그리고 선배가 후배를 폭행한 사건들도 재조명되면서 그동안 ’성적 지상주의’에 매몰됐던 빙상강국의 그림자가 밝혀지게 됐다.
’왕따’는 없었지만 ’독단’은 있었다 문체부는 감사의 발단이 된 팀 추월 ’왕따 논란’에 대해 ’나쁜 의도가 있는 고의적 주행’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평창의 뜨거운 감자였던 ’왕따 논란’은 빙상연맹에 대한 국민 청원이 20만건을 훌쩍 넘기게 만든 불씨였다. 문체부는 이 사건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관련자 진술과 면담, 다른 국가 대표팀 사례, 이전 국제대회참가 시 우리 국가대표팀의 경기 사례, 경기 당일 전후의 상황, 경기 영상 기술적 분석, 전문가 의견 등을 종합했고 그 결과 레이스에 고의성은 없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작전 수립 과정에서 지도자와 선수들 간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하며 이 부분에 대해 연맹에 백철기(56) 감독의 징계 조치를 요구했다. 지도자들이 작전 수립의 책임을 선수들에게 미뤘고, 노선영(29·부산 콜핑)이 뒤처지고 있음에도 앞선 선수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한 명확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왕따 논란’의 발단이라고도 볼 수 있을 노선영(29·부산 콜핑)의 올림픽 팀 추월 출전 무산 논란, 그리고 특정 선수들의 한국체육대학교 빙상장 별도 훈련 관련 논란의 경우 빙상연맹의 행정 처리 미숙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혔다. 이에 대해 문체부는 관련 인물들에 대한 징계, 그리고 국가대표 훈련관리 방안 마련을 연맹에 요구하는 동시에 대한체육회에도 해당 훈련기획관을 직무태만으로 징계하고 국가대표 훈련 확인방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다. 이번 감사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전명규(55) 전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 역시 직권남용 및 단체운영 비위, 사회적 물의 등 징계 대상으로 지정됐다.
특히 전 부회장의 경우, 실제로 연맹 행정에 부당하게 개입했고 일부 국가대표 선수들의 별도 훈련도 지시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전 부회장은 권한을 남용하여 국가대표 지도자의 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2014년 3월 빙상연맹 부회장 직위에서 사임한 이후에도 권한 없이 빙상연맹 업무에 개입했다. 전 부회장이 이렇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데는 연맹 규정에 없는 상임이사회 운영 등 비정상적 조직 운영이 밑받침이 됐다. 대한체육회는 2016년 조직 사유화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회원종목단체의 상임이사회 제도를 폐지했으나 빙상연맹은 이를 지속해서 운영했고, 이로 인해 전 부회장의 개입을 초래했다는 얘기다. 문체부는 대한체육회 정관 제12조 제1항 제1호 관리단체 지정 사유(체육회의 정관 등 제 규정에 대한 중대한 위반)에 따라 빙상연맹의 관리단체 지정을 검토하도록 했다.
성적 지상주의 속 ’폭행’ 사건들 이번 특정감사에서는 미숙한 행정처리와 특정 인물의 독단적 행정 운영 외에도 국민들을 씁쓸하게 만드는 감사 결과가 여럿 발표됐다. 성적 지상주의에 기반한 지도자와 선수, 그리고 선수와 선수간 폭행 사례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1·한국체대)가 올림픽을 앞두고 조재범(38) 전 코치에게 여러 차례 폭력과 폭언을 당해 선수촌을 이탈한 사실은 보도를 통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체부 조사 결과 조 전 코치는 대표선수 강화훈련 기간 중에 여러 차례에 걸쳐 심석희를 폭행했으며,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선수단 격려를 위해 진천선수촌을 방문하기 전날인 지난 1월16일에는 선수촌 내 밀폐된 공간에서 발과 주먹으로 수십 차례 심석희를 폭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심석희는 폭행이 두려워 선수촌을 빠져나왔으나 조 전 코치 및 국가대표 지도자들은 폭행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대한체육회에 심석희가 몸살 감기로 병원에 갔다고 허위로 보고했다. 문체부 관계자는 "처음에는 경기력 때문에 손찌검을 했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태도가 불손했다고 말을 바꾸더라"며 "폭행 수단과 정도를 감안하고 가족들의 의사를 존중해 16일 자로 수사기관에 의뢰했다"고 덧붙였다.
지도자의 폭행만 아니라 선수들 간의 폭행 사실도 드러났다.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A가 국제대회 기간 중 해외 숙소 또는 식당에서 후배 국가대표 선수들에 대해 폭행과 가혹행위를 했다는 진술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문체부 브리핑에선 ’익명의 ㅇㅇㅇ선수’로 표시됐지만 A선수는 스피드스케이팅 간판 스타인 이승훈(30·후배 선수대한항공)으로 알려졌다. 이승훈 측은 "후배들과 장난치는 과정에서 가볍게 친 것"이라 해명했으나 문체부는 "후배 선수를 훈계한 적 있다는 ㅇㅇㅇ 선수의 말과 달리 후배 선수들은 폭행 일시와 장소, 상황을 일관성 있고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며 "빙상연맹 차원에서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고 조치했다. 이날 브리핑을 진행한 노태강 문체부 제2차관은 "우리 사회나 스포츠계에 결과지상주의나 성적지상주의가 만연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당한 절차와 정당한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메달은 더이상 사회나 국민이 반기지 않는다"며 "폭행은 심각한 범죄행위임을 염두에 두고 가혹행위는 근절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