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축구 실력이 어른 못지않았다. 마치 성인 축구선수를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프로축구 전남 드래곤즈 유상철(47) 감독은 2007년 TV 예능프로그램인 ‘날아라 슛돌이’에 감독으로 출연할 당시 ‘축구 천재’ 이강인(17·발렌시아)을 만났던 장면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유 감독은 만 6세였던 이강인과 아크 부근에서 골대 맞히기 내기를 했다. 유 감독은 두 번 중 한 번만 성공시킨 데 비해 꼬마 이강인은 왼발킥으로 두번 모두 크로스바를 맞히면서 유 감독에게 굴욕을 안겼다. 유 감독은 “강인이는 왼발 킥, 드리블 등 내가 가르치는 걸 스펀지처럼 쏙쏙 빨아들였다”고 말했다.
당시 해설을 맡았던 한준희 위원은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처럼 또래들 5명을 제치면서 ‘메시 놀이’를 했다. 원래 ‘날아라 슛돌이’는 1대50으로 질 정도로 약체팀이었는데, 이강인이 가세한 뒤엔 반대로 50대1로 이기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꼭 11년이 흘렀다. 이강인은 그의 이름처럼 ‘강인’하게 잘 자랐다. 이강인은 24일 스페인 프로축구 명문 발렌시아CF에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스위스에서 열린 로잔 스포르(스위스 1부리그팀)와 프리시즌 경기에 전반 23분 교체 출전했다.
정규 시즌 경기는 아니었지만 이강인은 전반 34분 상대 선수 2명을 따돌린 뒤 빨랫줄 같은 왼발슛을 날리기도 했다. 비록 공은 왼쪽 골대를 살짝 비껴갔지만 이강인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발렌시아는 이날 0-0으로 비겼다. 경기가 끝난 뒤 발렌시아 구단은 홈페이지에 “이강인은 구단 역사상 최초로 1군에 오른 아시아 선수다. 1군 데뷔전이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환상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고 소개했다. 스페인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인터뷰에 응한 이강인은 유창한 스페인어로 “발렌시아 1군에 데뷔하는 게 꿈이었다. 이제 그 꿈을 이루게 돼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2001년 인천에서 태어난 이강인은 태권도 사범이자 축구광인 아버지 이운성씨 밑에서 자랐다. 2011년 발렌시아에 입단한 이강인은 어린 나이에도 텃세와 인종차별을 극복하며 쑥쑥 자랐다. 가족들도 스페인으로 건너가 다른 직업을 구해 뒷바라지 했다.
이강인은 2013년 12월 블루 BBVA 국제대회에선 득점왕(4골)에 올랐다. 그의 활약을 지켜본 스페인 대표 출신 공격수 로베르토 솔다도는 소셜미디어에 ‘10번 선수 누구냐. 정말 끝내준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자 대표팀 동료였던 산티아고 카니자레스는 ‘아들에게 들었다. 이강인이란 선수래’라는 답변을 남겼다.
한준희 해설위원은 “한국 축구엔 과거 조광래·윤정환·고종수 등 어시스트에 능한 찬스 메이커가 있었다. 공격형 미드필더 이강인은 스페인 대표 출신 사비처럼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이니에스타처럼 뛰어난 발재간까지 지녔다. 아직 어린 선수지만 스타일은 ‘사비에스타(사비+이니에스타)’ 같다”고 평가했다.
유럽에서 활동 중인 한 축구 에이전트는 “스페인 학부모들은 국제대회에 출전한 12세 이하 한국 선수들을 보면 ‘메시 같다’ 며 깜짝 놀란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대부분 거기서 더이상 발전이 없다. 중·고교를 거치며 기량이 정체되는 경우가 많다”며 “이강인은 스페인 유스시스템 알레빈(10~11세)에서 공을 차면서 기존의 한국 선수들과는 다른 돌연변이로 성장했다. 스피드는 다소 떨어지지만, 기술만 놓고 보면 스페인 선수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이강인은 지난 5월 19세 이하(U-19) 한국 대표팀 소속으로 프랑스 툴롱컵에 출전, 2골을 터트렸다. 키가 1m73cm인 그는 서너살 많은 선수들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왼발 터닝슛과 왼발 프리킥으로 득점을 올렸다. U-19 대표팀 관계자는 “막내인 강인이는 어린이처럼 형들과 장난을 많이 친다. 그러나 경기장 안에 들어가면 눈빛이 완전히 달라진다. 책임감이 강하고, 집중력도 대단하다”고 전했다.
이강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스페인 축구협회는 3년 전부터 스페인으로 귀화를 추진한 사실도 최근 알려졌다. 그러나 이강인 본인은 귀화 의사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일부 축구 팬들은 다음 달 18일 개막하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이강인이 대표선수로 뽑히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강인은 이미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잉글랜드 맨체스터 시티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그러자 발렌시아는 ‘이강인 지키기’에 나섰다. 지난 21일 이강인과 2022년까지 재계약하면서 8000만 유로(약 1058억원)의 바이아웃 조항을 내걸었다.
바이아웃은 계약이 남은 선수를 데려갈 때 지불해야 하는 최소한의 이적료를 말한다. 즉, 이강인을 스카우트하려면 1000억원 이상을 발렌시아 구단에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발렌시아가 이강인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강인은 발렌시아 1군팀 소속으로 스위스 프리시즌에 참가 중이다. 마르셀리노 가르시아 토랄 감독이 에인트호번(네덜란드), 에버턴(잉글랜드) 등과 경기에 이강인을 또 다시 투입할 수도 있다.
엠블럼에 박쥐가 새겨진 ‘박쥐군단’ 발렌시아는 다비드 비야, 다비드 실바 등을 배출한 명문 구단이다. 지난 시즌 스페인 리그 4위에 올랐다. 이강인이 2018~19시즌 1군에 깜짝 발탁된다면 중앙 미드필더 파레호, 조프리 콘도그비아의 백업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손흥민(26·토트넘)도 18세 때 독일 함부르크 1군에서 데뷔골을 터트리면서 월드클래스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