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축구 축제였던 2018 러시아 월드컵. 이 대회에서 한국은 한 조였던 스웨덴, 멕시코, 독일과 맞대결을 펼쳐 '세계 1위'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대회를 마무리했다. 16강엔 오르지 못했지만 많은 이들이 '카잔의 기적'으로 기억하게 될 대회였다.
사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조별리그 3경기 못지 않게, 그라운드 밖에서도 치열한 '장외 전쟁'을 펼쳤다. 바로 욱일기와 전쟁이다. 구 일본 군기이자 현 일본 해상 자위대 군기로 사용되는 욱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일본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독일의 '하켄크로이츠(철십자기·나치기)'와 마찬가가지로 욱일기를 '전범기'라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선 욱일기가 버젓이 사용되고 있고, 국제축구연맹(FIFA)이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도 욱일기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 세네갈전에서 일본 응원단이 대형 욱일기를 꺼내들어 논란이 됐지만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일본 욱일기(전범기) 논란은 각종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 때마다 수시로 불거지는 문제다. 특히 올해 8월엔 인도네시아에서 열리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이 예정되어 있어 일본의 '전범기 응원'이 다시 등장할 가능성도 높다. 평화와 화합의 상징인 스포츠 축제에서 전범기가 나부끼는 모습을 더이상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일간스포츠는 이 대회에서 전범기가 등장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3일 동안 '전범기 근절 특별기획'을 진행한다."전 세계적인 기관인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9시간 만에 전범기를 내릴 줄 누가 알았을까요. 하면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이제 강하게 나설 때인 거죠."
월드컵 분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5월, FIFA가 운영하는 2018 러시아월드컵 공식 SNS(인스타그램) 계정에 욱일기가 등장했다. 24시간짜리 홍보 영상 속 사진에는 얼굴에 욱일기 모양으로 페이스 페인팅을 한 일본인 응원단의 모습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게재한 지 9시간 뒤, 이 사진은 해당 계정에서 사라지고 한국과 벨기에 축구팬이 자국 국기를 얼굴에 그리고 응원하는 사진이 대신 올라왔다. FIFA가 한국 측의 항의를 받아들여 욱일기 사진을 삭제한 것이다.
FIFA를 향한 항의의 중심에는 '전 세계 전범기 퇴치 캠페인’을 펼쳐 온 서경덕(44)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가 있었다. 서 교수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은 한국 네티즌과 함께 FIFA와 해당 계정에 즉각적으로 항의했다.
지난주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성신여대 성신관 교수실에서 만난 서 교수는 "FIFA에서 9시간 만에 바꾼 걸 보고 만세를 불렀다. 전 세계적인 기관에서 욱일기, 즉 전범기 사용이 잘못이란 걸 받아들이고 바꿨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참고가 된다"고 이번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먼저 욱일기, 욱일승천기, 전범기 여러 가지 표현이 있는데 어떤 표현이 맞나."욱일승천기는 틀린 말이다. 욱일기는 맞는 말이지만, 전범기라는 단어가 조금 더 경각심을 줄 수 있어 가장 적합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할 때 내세웠던 깃발이 전범기인 만큼, 나치기(하켄크로이츠) 같은 의미라고 얘기할 수 있다. 물론 두 깃발의 탄생 배경은 다를 수 있지만 전쟁에서 가장 전면에 내세웠던 점을 보면 전범기가 맞지 않겠나."
- 스포츠 무대에 전범기가 자꾸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일본 응원단뿐 아니라 글로벌 스포츠 기업 등에서 마케팅에 전범기를 자주 쓴다. 과연 이들이 알고 쓰는 것일까? 아시아 시장이 얼마나 큰데…. 결국 전범기라는 걸 몰라서 쓰는 것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못한 탓도 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버풀의 나비 케이타(23)라는 선수가 욱일기 문신을 해서 논란이 됐다. 한국 팬들이 지적하니까 그 위에 새로 문신해서 덮었는데, 케이타 개인뿐 아니라 리버풀 구단에서 문제를 인식해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사례다. FIFA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에 FIFA 인스타그램에서 전범기를 사용했는데 항의받고 철회하지 않았나. 정치적 슬로건인데 전범기 사용에 대한 제재가 없는 건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도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전범기 사용에 대해 처음 공식적으로 징계하는 등, 좋은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전범기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이제 강하게 나설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월드컵 전에도 (대한축구협회가) 전범기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하게 얘기했다. 이번 월드컵만 봐도 세네갈전에서 전범기 응원이 나왔다. 전 세계 축구팬이 다 보는 자리에서 나왔다는 건 충분히 문제가 된다. 대한축구협회도 그렇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공식적으로 항의할 수 있는 '거리’가 나온 거다. FIFA는 물론이고 여러 기업들이 전범기가 왜 문제인지 알고, 바꾸고 사과한 사례가 있다는 건 그들도 그게 잘못됐단 걸 인정했다는 얘기다. 이제는 정부도 더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 당장 8월에 아시안게임도 있는데 전범기 사용 문제를 미리 방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한체육회가 일본체육회 쪽에 미리 전범기 사용 불가 공문을 보낸다든지,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나."
- 대한축구협회나 정부의 대응이 소극적이란 지적이 많다."직접 활동하면서 느꼈다.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외교 마찰과 이건 전혀 다른 문제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 아시안게임 전에 우리나라에서 전범기 문제 같은 걸 먼저 얘기하면 굉장히 신선하지 않을까 싶다. 대한축구협회도 마찬가지다. FIFA에 항의하는 건 대한축구협회에서 하는 게 맞다. 전범기 문제는 축구장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일이고, 2012 런던올림픽 '독도 사건’도 있지 않나. 그때만 전담팀을 꾸릴 게 아니라 아예 전담 직원을 하나 두고 전문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FIFA에 지속적으로 어필도 하고. 사례를 모아서 꾸준히 바꿔 나갈 수 있도록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 전범기에 대한 일본의 인식은 어떤가."일본은 욱일기가 곧 전범기라는 인식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본은 자신들이 잘못한 점에 대해 정확하게 역사 교육을 하지 않았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하켄크로이츠를 법으로 금지한 독일과 비교할 만한 부분이다. 일본은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다. 지금도 슬며시 해상자위대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나. 긍정적인 건, 예상 외로 일본에 있는 양심 세력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 전범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일본의 인식 변화도 중요하지만, 결국 세계적인 여론을 통해 일본을 압박해 나가는 전략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욱일기가 곧 전범기, 사용하면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 여론을 조성해서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전략이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한국과 중국 등 일본에 침략당한 과거가 있는 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전범기 금지 관련 법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아시아권에서 전범기가 국제법상 금지된다면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들의 전범기 사용도 줄어들지 않겠는가."
김희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