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삭' 망했다. 재미 없어서 망했고, 식상해서 망했고, 지루해서 망했다. 더 망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망했다.
최근 몇 년간 관객들의 애정을 받았던 남배우 떼주물 영화의 유행이 막을 내린 모양새다. 한국영화 단골 소재로 차용되는 정·재계 비리물은 '내부자들(우민호 감독)'이 사실상 끝이었고, 액션, 전쟁, 스릴러 등 본전은 찾았던 장르들도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명확히 따지자면 외면의 이유는 단순한 소재와 장르가 아니다. 어디서 본 듯한 뻔한 스토리, 같은 작품 아닌가 싶을 정도의 돌려막기 캐스팅이 가장 큰 문제다.
크고 작은 외화와, 특별한 경쟁작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작품들이 의외의 주목을 받자 영화계는 다시 머리를 굴리고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또한 무언가를 답습하는 모양새라 하더라도 아직은 콘텐츠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 충무로의 한 관계자는 "2019년 키워드는 '신선도'가 되지 않을까.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이 선호받는 추세다"고 전했다.
각 배급사에서 설 연휴 등 상반기에 전진 배치시켜 놓은 작품들만 봐도 배꼽잡고 깔깔 웃을 수 있는 순도 100% 오락영화가 눈에 띈다. 23일 '극한직업', 30일 '뺑반', 내달 14일 개봉하는 '기묘한가족' 모두 재미를 바탕으로 가벼운 분위기를 추구한다.
관계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내안의 그놈' 성공부터 반전이라면 반전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인 수치로만 따져도 2018년 기대작에서 망작으로 곤두박질 친 '인랑'보다 더 많은 관객이 들었다. 개봉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결과다"고 말했다.
이어 "곧 개봉할 '극한직업'과 '뺑반'도 형사물로 분류되지만 그 안에서 독특한 재미와 신선한 설정을 찾았다는 것이 강점이다. '기묘한 가족' 역시 좀비물의 확장판으로 기본 코드는 코믹이다. 각 배급사들이 접근성이 용이한 작품들을 먼저 선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작비와 톱스타 출연 여부가 여전히 주목 대상이긴 하지만, 과거엔 '틈새시장을 노린다'고 언급됐을 작품들이 슬슬 중앙 무대로 진출하고 있어 반갑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큰 변화는 단연 여성 중심 영화가 많아졌다는 것. '뺑반'부터 공효진·염정아·전혜진이 걸크러쉬를 확인할 수 있고, 라미란·이성경 '걸캅스' 역시 상반기 개봉을 준비 중이며, 박신혜·전종서 '콜', 김희애 '만월'도 제작 소식을 알렸다.
음악 영화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애정도가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정점을 찍으면서 한국형 음악 영화 시나리오도 쏟아지고 있다. 20~30대 젊은층 배우들에게는 하나씩 다 들어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 발 빠른 제작으로 크랭크업까지 마친 정해인·김고은 '유열의 음악앨범'이 첫 스타트를 끊게 될 전망이다.
관계자는 "장르물에 CG까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드라마의 등장도 무시할 수 없다. '도깨비'도 있었지만, 최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보면서 꽤 많은 영화인들이 놀라워 했다. '신과 함께' 제작진이 참여하는 '아스달 연대기'에 대한 기대도 크다"며 "드라마 장르에도 유행이 있긴 하지만 스크린에서는 1년에 한편 볼까말까 한 로코·멜로 등 영화보다는 더 많은 장르를 섭렵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로서는 오컬트물이 그나마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아직까지는 각광받고 있는 장르라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관객들은 지난해까지 '도둑들'의 아류작을 봐야만 했다. 발전이 1이라면 답습이 9였다. 어느 순간 마케팅·홍보를 담당하는 관계자들마저도 '기대치를 낮춰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더라. 홍보 포인트가 주어(영화 제목)만 바꾸면 가능한지도 꽤 오래됐다. 어쩌면 관객들보다 관계자들이 더 한 지겨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인맥으로 돌아가는 영화판이라는 말도 부정할 수 없다. '술자리에서 캐스팅이 정해진다'는 우스갯소리도 아주 없는 일은 아니다. 안정적 흥행 카드들이 다시 만나는건 좋지만 '지겹지 않은 결과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겨운 시작을 탈피할 수 있는 건 결국 영화적 반전이다"며 "작품이 변하면 캐스팅에도 변화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올해 깜짝 등장할 얼굴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