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미쳐버린' 천우희다. 강렬해서 아름답고, 처절해서 슬프다. 영화 '우상(이수진 감독)' 속 련화는 남들에겐 너무나 흔한 일상이 전혀 흔하지 않은, 제대로 된 이름조차 잡을 수 없어 그저 그림의 떡처럼 바라만 봐야 하는 인물이다. 독기 품고 달려들지만 가진 것이 몸뚱이 뿐이라 그 모든 것을 내던지고 외치는 항변이다. 단단히 미쳐도, 미쳐서 돌아버려도 왠지 늘 안아주고 싶은 천우희, 그리고 천우희의 캐릭터다.
머리카락을 댕강댕강 잘랐고 눈썹도 싹 밀었다. 비주얼적인 변신도 파격이지만 연기는 더 놀랍다. 또래 중 월등하게 앞서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한 천우희가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다. 스스로는 한계에 부딪쳐 "촬영내내 답답했고,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지만 천우희는 천우희다. 언제나 대중의 기대치 그 이상을 해내는 천우희이기에 이번에도 실망은 없다. 집요하기로 유명한 나홍진 감독과 이수진 감독을 악착같이 버텨냈다. 뭔들 못할까 싶다.
한석규는 천우희에게 "우희야, 당분간 하지마~"라며 우아하게 짧고 굵은 조언을 건넸다. 강렬한 캐릭터만 줄줄이 선택하고 있는 후배가, 갖고 있는 더 많은 매력을 더 새로운 캐릭터들을 통해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보면 하고 싶고, 해야만 한다는 마음에 결정했던 작품들은 지금의 천우희를 만들어낸 고마운 필모그래피다. 하지만 선배들의 마음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닐 터. 요즘 천우희가 하고 있는 고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차기작은 데뷔 후 처음으로 달콤한 로맨틱코미디를 택했다. 1600만 돌파에 빛나는 '극한직업' 이병헌 감독의 첫 드라마 JTBC '멜로가 체질'이다. "'나 어떡해' 하면서 벌써부터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천우희지만 또 잘 해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크린 속에서는 독하고, 강렬하게만 보여도 방실방실 짓는 미소가 누구보다 러블리한 천우희다. 2019년 열일의 행보가 천우희에게, 또 이를 지켜보는 대중들에게 어떤 선물로 다가올지 기대가 크다.
-캐릭터 자체가 스포일러다. 인터뷰에 엠바고까지 걸렸다. "다들 말하지 말라고 하니까 말을 안하고, 또 못하고 있는데 사실 스포일러의 경계가 애매하다. 영화를 보시고 '생각보다 별거 없는데?' 하실까봐 걱정되기도 하고.(웃음)"
-영화는 몇 번 봤나. "두 번 봤다. 베를린에서 한번 보고 시사회 때 한번 더 봤다. 난 원래 작품이 나오면 내 것만 보기 급급하다. 두번째, 세번째 볼 때 비로소 영화가 보이는데 '우상'은 반대였다. 베릴린에서 처음 볼 때 영화 전체가 보이더라. 그게 신기했다. 엄청 몰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두번째 봤을 때 내 것이 보이더라."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련화는 독기에서 측은까지 극과극의 감정을 모두 품고 또 표출하는 인물이다. "연기하는내내 이 친구를 많이 헤아리려고 했다. 특별한 전사가 없다 보니까 그저 '소 새끼보다 못한 사람을 살았구나. 가축,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았겠구나. 남들 갖는 이름 하나 갖고 싶은건데 그것 조차 안 되는 사람이구나'라는 정도로 설정해야 했다.
사실 난 그 동안 내 연기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근데 '우상'을 보면서는 너무 슬펐다. 7개월 동안 이 친구를 헤아리려고 하면서도, 내 안에 있는 열등 의식이나 분노가 부딪치는 지점이 있었다. 화학적인 반응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많이 동화됐다.
예전에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도 배우 천우희 말고 개인 천우희로서는 흔들리거나 감상에 빠지는걸 원하지 않았다. '한공주' 때도 그렇고, 그 외의 캐릭터들도 '현장에서만 스위치를 켜고, 연기를 하지 않을 땐 꺼야지'라는 마인드로 임했다. 그래야 내가 좀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우상'은 그게 쉽지 않았다. 물론 내가 이 영화에 욕심을 내고, 련화라는 캐릭터를 잘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아쉬운 부분이 많아서, 그 마음을 못 놓아서 슬픈건지는 모르겠는데 여러가지 복합적인 마음으로 많이 울컥 울컥 했다.(웃음) 지금도 좀 울컥 울컥 한다."
-처음 시나리오 받았을 땐 어떤 느낌이었나. "난 세 인물이 굉장히 처절하다고 느껴졌고, 보면 볼수록 연민이 생겼다. 결국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갖고자 하는 단순한 개인의 소망? 일 수도 있겠는데, 그것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현재의 나도 그렇게,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든 생각은 련화라는 캐릭터가 강하다 보니까 '감독님이 원하는 그림이 있겠지만 과연 내가 완벽하게 구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던 것 같다. 감독님과 작업을 해 봤음에도 불구하고 '한공주'와는 결이 완전히 달라 궁금하기도 했다." -을컥한다고 했다. 현장에서 직접 마주한 련화는 어땠나. 어려웠나, 아니면 두려웠나. "'어렵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은데, 어떻게든 련화를 연기해야만 했다. 난 현장에서 최대한 유연하게 있으려고 하는 편이다. 감독님마다 스타일도 다르고, 호흡하는 배우들도 다르고, 그 날의 분위기도 그 날마다 다르다. 그래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우상'은 현장에서 진행 자체가 쉽지 않은 면이 있었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 아주 많지 않다 보니까 살짝 휩쓸리기도 했던 것 같다. 처음이었다."
-돌발 상황들이 생겼던건가. "(설)경구 선배님이 '항상 피치를 올리고 현장에 가야만 했다'고 이야기 한 것처럼 나도 맘 편하게 있지는 못했다. 선배님은 내가 항상 '허허실실 잘 있다'고 하셨지만 솔직히 속은 타들어 갔다.(웃음) 릴렉스하게 있지 못할 만큼 좀 애가 탔던 것 같다."
-압박을 많이 느낀 것 같다. "'이 연기를 하려면 이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있지 않나. 사실 '곡성' 때도 많이 겪었다. '곡성'에서 잠깐 잠깐 등장하다 보니 대부분의 촬영을 선배님들 분량을 다 찍은 후 마지막 30분 정도 남겨놓고 들어갔다. 그때 경험했던지라 '이번에도 나쁘지 않겠다. 할 수 있어! 어떤 힘든 상황이 와도 다 할 수 있어!'라고 내심 자신했는데 약간 다르더라. 시간에 쫓기듯 촬영을 한다거나, 연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는 상황적인 어려움들이 있었다."
-어떤 점이 가장 아쉽나. "촬영할 때는 '힘들다,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웃음) 돌이켜 생각해보면 감독님과의 작업도, 두 선배님들과의 호흡도, 련화라는 캐릭터를 맡은 것도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 소중함 속에서 '내가 잘 해내지 못했다'는 아쉬음이 크다. 나는 지금 완성된 영화 속 련화보다 좀 더 내 것처럼 잘 할 자신이 있었는데, 그 마음만큼은 표현하지 못했다는 스스로의 아쉬움이다. 감독님에게 '제가 부족했지만 어떻게든 편집으로 살려 주십쇼' 하기도 했다. ''한공주'는 가능성을 열어 준 작품이고, '우상'은 한계를 맛보게 해준 작품이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이수진 감독을 두 번이나 경험했다. 집요하기로 유명하다. "'우상'에서 '한공주'를 유일하게 같이 했던 사람이 의상 실장님과 나 딱 둘이었다.(웃음) 우리는 (이수진 감독님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어떤 집요한 모습이 보여도 '원래 그러시니까' 하면서 넘어갔는데, 처음 겪는 분들은 꽤 당황스럽긴 했을 것이다. 하하.
감독님의 스타일은 정말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 다 잡아낸다는 것이다. 배우들에게도 그만큼을 요구한다. 나와는 조금 잘 맞았던 것이, 난 원래 밀어 붙일수록 '그래, 한번 해 볼때까지 해보자!' 하는 성격이다. 다만 '한공주'는 26회차 촬영이라 빠듯하게 찍어야 했고, 이번에는 6~7개월을 찍다 보니 그 감정선을 오랫동안 유지하는게 쉽지는 않았다. 특히 세 인물이 만나는 지점도 없다. 한 배우가 촬영하면 한 배우는 쉬고 있고, 돌아가면서 촬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현장에서 한석규, 설경구는 어땠나. "한석규 선배님 같은 경우에는 항상 '한 번 더? 음~ 알았어. 한 번 더~' 하셨다. 하하. 분명 힘드셨을텐데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셨다. 설경구 선배님도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웃음) 결국 다 해주신다. 내가 봤을 때 '우상'은 집요함과 집요함이 만난 작품 아닐까 싶다."
-나홍진과 이수진을 모두 경험한 천우희는 이제 못할 것이 없지 않을까. "이 질문 많이 받을 것 같았다. 하하. 맞다. 난 누구아 감당할 수 있다.(웃음) 두 감독님이 정말 좋았던건 한결 같다는 것이다. 전작이 잘되면 어느 정도의 부담이 생길 수 있고, 감독님들 역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수 있는데 절대. 감독님들의 강성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늘 욕심을 많이 냈던 것 같다. '우상' 역시 련화로서 조금은 일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공주' 만큼 잘해서 보답해 드리고 싶다'는 욕심 떄문에 괴롭기도 했지만 진심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