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 제19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현 18세 야구월드컵)가 열린 캐나다 에드먼턴. 숙소 화장실에서 추신수(당시 18세, 부산고)가 혼자 울고 있었다. 부산고 스승이자 대표팀 고(故) 조성옥 감독이 문을 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신수야, 마이 아프나? 그라믄 이제 안 던져도 된다.”
소년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입니더. 괜찮습니더. 결승에서도 던지겠심미더.”
추신수는 미국과 결승전에 선발 등판해 4와 3분의 1이닝 동안 5피안타 2실점으로 호투,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대회 최우수선수(MVP)에 뽑힌 그는 이듬해 메이저리그(MLB)에 진출했다. 추신수는 기자에게 “당시 예선전부터 너무 많이 던졌다. 팔을 들 수 없었고, 통증도 심해서 눈물을 흘렸다. 이건 처음 털어놓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추신수는 운동장을 수십 바퀴 돌다가 구토하던,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뛰던, 그런 시절을 보냈다. 아픈 걸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건 이제 구식이다. 1982년생, 이제 37세인 텍사스 레인저스 추신수는 ‘구시대의 막차’쯤 될 것이다. 미국 팬들은 추(Choo)라는 그의 성(姓)에서 증기기관차 기적 소리를 떠올리며 ‘추추 트레인’이라고 부른다.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뒤, 19년째 미 대륙을 누비는 추신수는 23일(한국시각) 열린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원정경기에서 1회 초 결승 솔로홈런(비거리 140.5m)을 터뜨렸다. 시즌 23호. 올 시즌 MLB 통산 1500안타, 1500경기 출전, 200홈런 등 의미 있는 기록을 세운 그는 한 시즌 최다 홈런(2010·15·17년 22개)마저 경신했다.
추신수는 3월 29일 정규시즌 개막전 라인업에서 제외됐다. 상대가 왼손 투수라는 이유였지만, 앞으로 추신수를 주전으로 쓰지 않을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변함없이 뛰어난 기량(4월 타율 0.344)을 보여주자, 크리스 우드워드 텍사스 감독은 “내 판단이 틀렸다”고 사과했다.
텍사스가 포스트시즌에서 멀어진 지난달, 우드워드 감독은 “젊은 선수에게 출전 기회를 줘야 한다”며 추신수의 타석을 줄일 거라고 예고했다. 그런데 추신수는 계속 달리고 있다. 다른 선수들의 줄부상 때문이다. 추신수는 규정타석을 채운 텍사스 타자 중 출루율 1위(0.368), 장타율 2위(0.452), 홈런 3위(23개), 타율 3위(0.266), 도루 4위(13개)다.
‘구시대의 막차’는 멈추지 않아도 ‘새 시대의 첫차’는 이미 출발했다. MLB 전체 홈런 1위(50개) 피트 알론소(24·뉴욕 메츠), 내셔널리그 MVP 후보 코디 벨린저(24·LA 다저스), 크리스티안 옐리치(28·밀워키) 등 새로운 스타들이 MLB를 지배하고 있다. 45홈런으로 아메리칸리그 MVP 세 번째 수상이 유력한 마이크 트라우트(28·LA 에인절스)는 베테랑 느낌이다.
송재우 해설위원은 “4~5년 전부터 MLB에 특출한 선수들이 쏟아지고 있다. 타자 전성기가 28세에서 26세 정도로 낮아지는 추세”라며 “39세 넬슨 크루즈(미네소타·40홈런)와 추신수를 제외하면 주요 지표에 30대 중·후반 선수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MLB의 1990년대생들은 이전 세대보다 뛰어난 체격과 재능을 갖췄다. 어릴 때부터 과학적 훈련법을 통해 힘과 기술을 키웠다.
추추트레인이 고속열차 같은 선수들과 동시대를 달리는 비결은 구시대의 성실성과 근성이다. 추신수는 팀의 최고참이 된 지금도 가장 먼저 출근(홈 경기 경우 낮 12시)해 훈련과 분석을 시작한다. 스프링 캠프에서는 20년 가까이 새벽 5시에 출근했다.
출전 기회가 줄어들 거란 말을 들어도 추신수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감독이 다른 선수를 쓰고 싶어도 추신수만큼 준비된 선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추신수는 올해 팀에서 가장 많은 146경기를 뛰었다. 추신수의 2019년은 그렇게 흘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