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야구 승패의 향방은 역시 홈런이 가른다. 공인구 반발력이 낮아진 올해도 다르지 않다.
장정석 키움 감독은 지난 9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와 준플레이오프(준PO) 3차전에서 4-6으로 패한 뒤 "이번 시리즈는 유독 홈런이 분위기 전환과 많이 연결되는 것 같다. 결정적 홈런 두 방을 허용한 점이 아쉽다"고 했다. 실제로 그렇다. 준PO 1차전부터 3차전까지 모두 홈런 한 방이 경기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1차전이 시작이었다. 키움 간판타자 박병호가 0-0으로 맞선 9회말 선두타자로 나서 한가운데 담장을 넘어가는 결승 끝내기 홈런을 터트렸다. LG 마무리 투수 고우석의 시속 154km 강속구를 받아쳐 경기를 끝냈다. 팽팽한 0의 행진이 이어진 투수전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2차전 역시 박병호의 홈런으로 키움이 극적인 역전극의 발판을 마련했다. 1-4로 뒤진 8회말 1사 1루서 LG 불펜 김대현의 4구째 시속 147km 직구가 한가운데로 높게 들어오자 여지 없이 받아쳐 정중앙 펜스를 훌쩍 넘겼다. 1차전 9회 끝내기 홈런과 같은 코스로 날아간 2점 홈런이었다. 키움은 이 한 방을 발판 삼아 1점 차로 추격한 뒤 9회 동점, 연장 10회 결승점을 각각 뽑아 두 번째 승리를 가져갔다.
잠실로 자리를 옮긴 3차전에서는 키움의 홈런포가 침묵했다. 하지만 이번엔 익숙한 안방으로 돌아온 LG 타선이 홈런으로 응수했다. 1-2로 뒤진 4회 채은성이 키움 선발 이승호를 상대로 귀중한 동점 솔로포를 쏘아 올렸고, 3-2로 아슬아슬하게 앞선 8회엔 카를로스 페게로가 키움 불펜 김상수의 포크볼을 걷어 올려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벼랑 끝에 섰던 LG가 기사회생하는 순간이었다.
올 시즌 KBO 리그는 공인구 반발력을 낮춘 영향으로 타고투저 흐름이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지난해 '홈런 군단' 위용을 떨친 SK의 팀 홈런 수가 절반 넘게 줄어들었을 정도다.
그러나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에서는 역시 홈런 한 방이 경기의 흐름을 좌우한다. 각 팀 최고의 선발 투수들이 마운드에 올라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던지고, 불펜 역시 대부분 필승조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시리즈 승패가 결정되는 마지막 경기에선 에이스가 구원 등판하는 일도 종종 생긴다. 매 경기 사활을 걸고 진행되는 마운드 총력전에서 타자들이 집중타로 대량 득점을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다.
반대로 정상급 투수들을 상대하는 타자들의 집중력도 높아지기는 마찬가지다. 단 한 번의 실투를 노려 쳐 한순간에 득점을 생산할 수 있는 홈런이 가장 확실한 공격 루트다. 가을에 홈런과 홈런타자의 가치가 그만큼 더 커지는 이유다.
실제로 박병호의 홈런 두 개와 2차전 LG 유강남의 홈런, 3차전 채은성과 페게로의 홈런을 포함해 준PO 1~3차전에서 터진 홈런 5개 가운데 4개가 솔로 홈런이었다. 2차전에서 터진 박병호의 홈런만 2점포였고, 3점 홈런과 만루홈런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솔로 홈런들이 승부에 미친 영향은 무척 컸다. 어느 한 팀도 대량 득점하지 못하고 1~2점 차 팽팽한 승부가 이어지니, 실투하지 않으려는 투수들과 그 실투를 놓치지 않으려는 타자들의 기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준PO뿐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플레이오프(PO)와 한국시리즈 역시 홈런이 흐름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PO에서 기다리고 있는 SK와 한국시리즈에 선착한 두산은 모두 1~3선발이 강력한 동시에 홈런 타자들을 여럿 보유한 팀이다. 좀처럼 많은 점수를 내기가 쉽지 않고, 반대로 홈런으로 많은 점수를 쓸어 담을 수 있는 팀들이라는 의미다. '야구의 꽃' 홈런이 가을 하늘에 만개한 모양새다. KBO 포스트시즌이 갈수록 흥미를 더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