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야구 시절에는 없었지만,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된 1982년부터 각 팀에선 전력분석 업무를 진행했다. 태동을 함께한 6팀(OB·삼성·MBC·해태·롯데·삼미) 중 어느 팀이라고 하긴 힘들지만 하나둘씩 필요성을 느껴 점차 담당자를 뒀다. 당시에는 전력분석이라고 칭하지 않고 원정 기록원이나 '스파이'라고 불렀다.
'스파이'는 경기를 염탐해 정보를 알아낸다는 의미다. 홈경기 후 원정경기가 있으면 미리 원정을 가서 상대 경기를 지켜보고 관련 내용을 구단에 보고했다. 등판한 투수의 기록과 상대 감독의 작전이 어땠는지를 쭉 정리했다. 상황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A4 용지 한장일 때도 있고 많이 써서 보낼 때는 몇 장이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나갔지만, 점차 늘어났다. 세월이 흐르고 야구 발전이 이뤄지면서 각 구단의 전력분석 인원이 보강됐다. 통틀어 분석하던 걸 세분화해 구체화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기록이 다양화됐다.
전력분석 업무가 본격화된 건 1990년 중반 같다. 그때 프로야구 감독을 맡아서 상황을 잘 아는데 해를 거듭하면서 전력분석에서 넘어오는 페이퍼가 점점 두꺼워졌다. 처음에는 몇 장되지 않았던 게 몇 시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양이 많아졌다.
국가대표도 마찬가지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는 전력분석이라는 게 있었지만 미약했다. 하지만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때는 조금 세부적으로 분석이 들어갔다. 선수 한 명에 대한 내용이 폭넓어졌다. 대표팀 전력분석 업무도 처음 한두 명이 보던 걸 점차 늘어 4~5명 수준으로 확대됐다. 2015년 프리미어12 때는 전력분석이 확실하게 많아진 느낌이었다. 변화가 피부로 느껴졌다.
최근 거론되는 데이터 야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 기록의 종류가 좀 더 다양화됐을 뿐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른 게 아니다. 정규시즌(144경기) 때는 경기 전에 전력분석 파트에서 선수에 관련 내용을 설명해준다. 투수 파트와 타자 파트를 각각 하면 한 시간씩 두 시간 정도가 걸린다. 코치들도 미팅하면서 전력분석을 숙지하고 공유한다.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전력분석을 하지 않는 구단은 없다. 그러나 매년 큰 폭의 성적 차이가 난다. 하위 팀에선 전력분석을 하지 않는 걸까. 그건 아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연봉이 비싼 선수를 각 구단이 데려가 기용하는 건 선수가 중요하다는 걸 의미한다.
프로야구를 대표한 박철순, 최동원, 선동열, 류현진 같은 선수는 마운드에서 뭘 던질지 뻔히 다 안다. 일반 관중도 예상할 수 있는데 타자는 오죽할까. 전력분석 파트는 더 잘 안다. 그런데 알고도 못 친다. 그만큼 상대가 뛰어난 거고 그게 바로 야구다. 자료를 알고 있는 게 유리할 수 있어도 뻔히 알고도 못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데이터 야구는 아주 특별한 게 아니다. 데이터만큼 중요한 게 바로 선수다. 아무리 전력분석을 잘해도 결국 야구를 해내는 건 선수다. 선수가 못하면 아무것도 소용없다. 데이터 야구에서 간과해서 안 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