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자리에서 최선의 자세를 되뇌었다. 양효진(31·현대건설)이 걷는 길이 역사이자, 교본이다.
양효진은 지난 9일 발표된 '도드람 2019~2020 V-리그 팀·개인상 전달식'에서 여자부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기자단 투표 30표 가운데 24표를 얻었다.
5라운드까지 나선 24경기에서 총 409득점·81블로킹(세트당 0.84개)를 기록했다. V-리그는 코로나19 여파 탓에 리그가 조기 종료됐고, 포스트시즌을 치르지 못한 탓에 정규리그 1위만 결정됐다. 양효진은 주전 센터이자 리더 역할을 하며 소속팀 현대건설의 1위 수성을 견인했고, 데뷔 13시즌 만에 처음으로 시즌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통산 기록으로도 금자탑을 쌓았다. 여자부 최초로 개인 통산 5500득점(5562점)과 1200블로킹(1202개)를 돌파했다. 11시즌 연속 블로킹 1위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 센터라는 수식어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양효진은 현대건설 1위, 자신의 MVP 수상의 영광을 모두 팀 동료의 공으로 돌렸다. 13년 차 베테랑은 자신이 잘한 경기보다 합작한 승리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배구를 대하는 자세가 성숙해진다. 이제 결과보다 과정, 경쟁보다 행복을 좇는다. 즐기지 못했다며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연차가 쌓이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며 웃었다. 가족을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이제 쑥스럽지 않다. 20년 넘게 뒷바라지를 한 부모님을 향해 큰 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한다. 다음은 양효진과의 일문일답.
◈'현대건설 1위, 비결은 순수한 승리 의지'
- 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들었다. 홀가분할 것 같다.
"리그가 조기 종료되지 않았더라면 완벽한 시즌이 됐을 것 같다. 아쉽다. 그러나 정말 재미있는 시즌을 보냈다. 개인적으로도 좋은 일들이 많았다. 더불어 그동안의 배구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다."
- 통합 우승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묻어난다. "2019~2020시즌에는 승리 뒤 '내가 잘했다'는 생각보다는 '우리가 잘했다'는 생각이 컸다. 그런 좋은 느낌이 꾸준히 이어졌고 어느덧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우승 갈망이 정말 컸다. 챔피언결정전이나 플레이오프를 치러보지 못한 후배들이 있다. 우승을 이뤄내서 함께 만끽하고 싶었다. 팀원 모두 안타까워했고, 나도 정말 아쉬웠다."
- 매 경기 끈끈한 팀워크가 돋보였다. '리더' 양효진의 존재감이 빛났다. "접전 끝에 이긴 경기가 많다. 승수는 쌓고 있었지만, 안주를 경계해야 했다. 동료들에게 지난 시즌에 개막 11연패를 떠올리자고 했다. '그토록 어렵게 한 경기를 이겼을 때 가졌던 절실한 마음을 잊지 말자'고 말이다. 요즘 어린 선수들은 내가 그 나이 때보다 생각하는 게 성숙하더라. 들뜨지 않았고 매 경기 집중했다. 내가 아니라 모두가 잘 해줬다."
- 시즌 말미에 주전 리베로가 부상을 당하며 당면한 위기도 잘 극복했다는 평가다. "대체 선수 (이)영주가 많이 위축됐을 것이다. 나도 체력이 떨어진 시점이라 바로 도와주지 못했던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처음에는 (김)연견이의 부상 공백을 너무 크게 의식했다. 한 팀이 되지 못했고, 안 좋은 플레이에 매몰되더라. 그래서 '모두 내 몫만 잘하자는 마음가짐을 갖자'고 했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다행히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그런 마음가짐이 좋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 6라운드 GS칼텍스전 얘기인가. "그렇다. GS칼텍스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우리 팀의 전망은 어둡더라. 그래서 더 이기고 싶었다. 시즌 초반에도 외인 마야가 부상으로 빠졌을 때, 국내 선수끼리 잘 뭉쳐서 버텨냈다. 시즌 마지막 경기가 된 GS칼텍스전도 선수단이 합심해 이룬 결과라고 생각한다.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신나게 플레이를 한 그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 지난 시즌은 5위였다. 1위로 재도약한 점은 의미가 크다.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성적이다. 이상하게 승수가 많고, 이상하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난 시즌에 너무 많이 졌기 때문에 팀원 모두 그저 앞뒤 보지 않고 승리만 바라본 것 같다. 어느새 1위에 올라가 있더라."
◈'13년 만에 최고 선수, 13년 만에 받은 선물'
- 데뷔 13년 만에 시즌 MVP까지 수상했다. "목표로 세운다고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니다. 이전에도 개인 성적이 좋던 시즌에 후보에는 올라갔지만 수상은 못 했다. 그래서 욕심을 내진 않았다. 지도자, 동료 그리고 구단의 도움이 있었다. 나 혼자 받은 상이 아니다. 지난 시즌 부진에도 응원해주신 팬의 힘도 컸다. 모두 감사드린다."
- 자신에게 칭찬을 해줘도 될 것 같다. "한 자리에서 그저 끈기 있게, 그리고 묵묵히 걷다 보니 얻어진 훈장이라고 생각한다. 적지 않은 연차에 받아서 그런지 더 뜻깊다."
- 정대영 이후 15년 만에 센터가 MVP를 수상했다. 벽을 깼다. "장소연 선배님, (정)대영 언니, (김)세영 언니를 보며 꿈을 끼웠다. 대영 언니가 MVP를 수상할 때 '어떻게 센터가 받을 수 있지'라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센터가 MVP가 되는 모습을 재연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건 아니다. 하루하루 걷다 보니 도달했다. 여전히 신기하다."
- '절친' 김연경의 축하도 받았나. "사실 '네가 MVP를 받을 것이다'며 내게 바람을 넣은 장본인이 (김)연경 언니다. 안 그래도 시상식 중에 영상 통화가 왔다. 못 받았더니 어찌나 뭐라고 하던지. 그래도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 것 같다'며 축하를 해주더라. 항상 고맙다."
- 시상식에서 부모님을 향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가족끼리도 축하를 나눴을 것 같은데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한쪽에 앨범 같은 게 놓여 있더라. 부모님이 어린 시절부터 내 이야기가 게재된 신문, 인터넷 기사들을 모두 스크랩하셨더라. 너무 감동했다."
- 그동안 스크랩북의 존재를 몰랐나.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 생각보다 정말 많더라. 사실 부모님이 내색을 잘 안 하시는 편이다.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시즌을 마치고 오거나, 다시 떠날 때 반가움과 아쉬움이 보인다. 나도 어릴 때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두 분끼리는 얼마나 많은 얘기를 하시는지. 모든 지원과 배려에 너무 감사하다."
◈'가벼워지고 싶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
- 역대 최초, 최다 기록을 쏟아내고 있다. 애착이 가는 기록이 있다면. "아무래도 블로킹 관련 기록이다. 배구를 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애착이 있다."
- 블로퀸이라는 별명도 있다. "항상 좋은 수식어만 주신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긴다."
- 센터 유망주는 모두 제2의 양효진으로 불린다. "나보다 더 잘하는 후배들이 나올 것이다. 내 이름을 넣어줘서 감사하지만, 솔직히 부끄럽다. 아직 부족하다."
- 도쿄 올림픽이 연기됐다. 아쉬움이 크겠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취소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김)해란 언니가 은퇴를 해서 영향을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올 시즌에는 아픈 선수가 많았다. 더 좋은 컨디션으로 출전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 여전히 전성기인데 '마지막 올림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기라성같은 선배들도 배구가 잘 안 되는 시점이 오더라. 어린 시절부터 봤다. 나도 올 것이다. 여전히 몸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그저 마음의 준비를 해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 자신에게 가벼워지고 싶었다."
- '가벼워지고 싶었다'는 말의 의미는. "올 시즌을 치르면서 '내가 배구를 그만두면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유독 많이 했다. 배구가 없는 내 삶은 공허한 마음이 클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 그 날이 와서 뒤를 돌아봤을 때 '더 즐겼더라면'이라는 후회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운동은 힘들겠지만 내가 걷는 길, 그 과정을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자세와 바람을 실현하고 싶다."
- 여자 배구는 현재 최고의 스포츠 콘텐트다. 그 성장과 함께 걸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나와 (김)연경 언니는 저연차 때부터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배구가 받던 관심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잘 안다. 런던, 리우 올림픽에서 선전하며 관심이 높아졌지만, 그 전에는 아니었다. 도쿄 올림픽 예선전을 치르며 새삼 실감했다. 선수촌, 공항에서의 취재 규모와 팬들의 응원을 보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배구 인기가 유지되면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다."